28. 삐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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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삐딱하게
2022.11.03.
어젯밤 지연이 걱정되었는지, 강현은 사무실에서 야근하면서도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주었다.
-지연 씨, 기분은 좀 어때요?
강현의 근사한 저음이 들리자 심장이 간질간질하였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본부장님. 확실히 일이 바쁘니 다른 생각 안 나더라고요. 앞으로 더 많이, 세게 굴려주세요!”
지연이 좀 더 과장하여 장난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래요? 알았어요. 확실히 바쁘면 다른 생각 덜 들긴 하죠. 어쨌든 다행이네요. 더 화끈한 스케줄이 다가오고는 있어서, 제가 굳이 더한 계획을 만들지 않아도 되긴 해요. 근데 지연 씨랑 주연 대리님 다크서클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거 아닐지 걱정되는데…….
강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앗! 저희 다크서클이 정말 그렇게 티 나나요? 큰일이네. 가린다고 가린 건데. 요즘 대리님과 저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거든요.”
-농담이에요. 항상 예뻐요, 지연 씨. 걱정하지 말아요.
“치…….”
-맘 같아서는 바로 보쌈해서 강릉이나 속초같이 탁 트인 바닷가에 데리고 가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아프네요. 지연 씨 일정도 그렇고, 막상 저도 새벽까지 온라인 회의가 있어서.
“말씀만이라도 정말 고맙습니다. 본부장님.”
-지연 씨가 이름 불러주는 거 듣고 싶었는데, 제가 아직 근무시간이라 안 되는 건가요? 매우 아쉬운데요?
“그게…….”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지연 씨가 조심하려는 거 다 알아요. 나중에 주말에 많이 불러줘요, 내 이름.
“……네, 그럴게요.”
-그럼 이만 쉬어요.
“네, 내일 뵐게요.”
강현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 마음이 훨씬 편해졌는지, 지연은 잠도 설치지 않고 바로 잠들었다.
사무실에 출근하자 주연 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연을 맞아주었다.
“과장님, 나오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아직 눈이 좀 부어 있는 것도 같고. 오늘도 아주 힘드시면 재택근무 말씀해 보시지 왜 나오셨어요?”
진심 어린 걱정에 지연은 따뜻함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싹 다 나았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대리님. 눈은 어제 짠 거 먹고 자서 부었나 봐요.”
지연이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나아지셨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영업부와 중간 검토 미팅이 있는 날이어서 요 며칠 미팅 자료를 정리하느라 프로젝트팀이 더 바빴었다.
어쩔 수 없이 차민우를 미팅에서 만나게 되겠지만, 이 회사에 다니는 한 피치 못할 부분인지라 지연은 더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 미팅 전, 발표 자료 검토와 함께 광고 관련 건 보고를 위해 모두가 회의실에 모였다.
강현은 어제도 거의 밤새워 일했을 텐데 여전히 생기 넘쳤다.
“본부장님은 오늘도 에너제틱 하시네요. 오늘 새벽 3시 넘게 뉴욕 기획팀이랑 온라인 회의하셔서 서너 시간밖에 못 주무신 것 같은데, 얼굴만 보면 열 시간은 푹 주무신 꽃 비주얼이시네요. 부럽다.”
주연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요즘 주연이나 지연 둘 다 얼굴이 눈에 띄게 푸석해져서 걱정이었던 탓이었다.
“너무 피곤하시겠는데요? 요즘 매일 저렇게 바쁘신 것 같은데.”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국제 모바일 박람회 전시 기획까지 맡으셔서 더 바쁘신 것 같아요. 본부장님 정도면 그냥 아래 직원들에게 시키고 최종 승인만 해도 되실 텐데, 워낙 꼼꼼하시고 의욕적이시니 하나하나 다 챙기신다죠. 그쪽 프로젝트팀도 일정 타이트해서 엄청 빡빡하게 일하느라 힘들다는 소문 들었어요. 영양제는 좀 드시면서 일하시는 건지…….”
주연의 말을 듣고는 지연 역시 강현이 걱정되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강현은 자신을 위로해 주고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려 노력했는데 자신은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주말에 밥이라도 대접해야겠어.’
지연은 강현의 일정을 물어보고 가능하다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오늘 오후 미팅은 알다시피 영업부와 중간 검토가 있는 날입니다. 여러분이 업데이트해 두신 자료는 제가 모두 확인했고 몇 가지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은 파일에 적어놓고 여러분들에게 메일 보내두었습니다. 이 미팅 끝나시면 확인해 주세요.”
역시나 꼼꼼하고 섬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현이었다.
“광고 기획 쪽 업데이트가 있다고 하셨죠, 은지연 과장님?”
“네 본부장님. 오늘 아침에 SOO 아티스트의 에이전시에서 피드백을 보내주었습니다. 광고 제작에 매우 긍정적이라고 하네요. 광고를 위한 SOO 아티스트의 새로운 작품 제공 및 본인 직접 출연도 모두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주에 대략적인 광고 시안 전달하면 빠르게 최종 피드백 주겠다고 했어요.”
“좋은 소식이네요. 해당 아티스트가 우리 제품과 콜라보하는 작품들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았는데 역시나 신선하고 멋지더군요. 기대가 큽니다.”
이후 추가 업데이트된 내용과 오후 영업부와의 회의에 관해 한 시간 정도 의견 나눈 뒤, 회의를 마쳤다.
지연은 자리로 돌아와 미팅하는 동안 와 있던 사내 메신저들을 확인했다.
[이따 미팅 끝나고 잠시 보지.]
도착한 메시지 중 하나는 차민우였다.
자꾸 보자는데, 봐서 뭘 이야기하려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은 만나줘야 다시는 달라붙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미팅 끝나고 회의실 근처 비상구에서 봐요.]
비상구로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른 회의실이나 근처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비상구가 사람들에게 노출이 안 되어 훨씬 안전할 터였다.
‘으……. 만나기 싫다.’
지연은 다른 메신저 창을 열었다. 강현이었다.
[오늘 점심 약속 있어요? 없으면 저와 함께하면 어때요?]
메시지만 보아도 입에 미소가 걸렸다.
“과장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이렇게 흐뭇하게 웃어요? 누가 보면 꽃남친이 앞에 서프라이즈로 나타난 줄 알겠어요.”
주연 대리가 지연을 보더니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만큼 티 나게 미소 지었나 보았다.
“좋은 일……. 그냥 기분이 좋아서요. 바쁘지만 프로젝트도 순항하는 것 같고.”
“역시 긍정맨이라니까 우리 과장님은.”
주연이 양손으로 엄지 척을 했다.
“고마워요.”
지연은 주연에게 대답하고 메시지에 답장을 썼다.
[없어요, 강현 씨. 함께 해요.]
이름을 듣고 싶다는 강현을 위해 일부러 ‘본부장님’ 대신에 ‘강현 씨’라고 쓰고는 미소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딱 3초 뒤에 ‘헉!’하고는 깜짝 놀랐다.
강현에게 답장한다는 것이 메신저 창을 잘못 봐서 차민우가 보낸 메신저에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다행히 빨리 발견해서 보낸 메시지를 삭제했다.
‘바로 삭제했으니 다행이지……. 어휴, 정신이 없긴 없구나. 조심했어야지.’
지연은 강현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고는 후 미팅 자료 피드백을 보며 업무에 집중했다.
강현이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은 회사에서 가까운 프라이빗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모든 테이블이 룸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좋았다.
강현은 먼저 도착하여 와 있었다.
“왔어요? 오는데 찾기는 어렵지 않았죠?”
“네, 금방 찾았어요. 여기 엄청 유명한 맛집이라면서요? 점심 예약이 힘들다던데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저와 다니면 곧 맛집 블로거보다 더 많은 맛집 갈 거라고.”
강현이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부장님 덕분에 매번 저만 호강하는데요?”
바로 음식을 시킨 둘은 점심을 먹으며 회사 일이며 최근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새로 오시는 분은 어느 팀에서 일하시던 분이세요? 권이안 과장님?”
“다른 회사에서는 마케팅팀에서도 일했고, 제품 기획팀에서도 일했어요. 우리 회사 미국팀에는 작년에 조인했고요.”
“이번 광고 진행하는 데 엄청나게 도움이 되겠는데요?”
“그럴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친구인데, 일도 꼼꼼히 잘하고 성격도 좋아요.”
“아, 개인적으로도 아시는 분이에요? 인연이 깊으신 분이네요”
“네, 작년에 다른 프로젝트로 온라인 회의하다 우리 회사에 입사한 걸 알게 되었어요.”
“세상이 참 넓으면서도 좁은 것 같아요.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 보면요.”
“맞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전적으로 일만 보고 데려오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개인적으로 잘 알아도 일 못 하면 안 되어서.”
“하긴, 본부장님 성격이면 완전 칼 같을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보였다니, 나쁜 거죠. 그거?”
“아니요, 공과 사를 완벽히 구분하시는 믿음직한 상사라는 뜻이에요.”
“음……. 그렇게 안 들리지만, 그런 거로 하죠.”
곧 커피와 케이크가 후식으로 나오자 강현이 주제를 바꾸어 지연에게 물었다.
“마음은 좀 나아졌어요?”
“네, 많이 좋아졌어요. 감사해요, 본부장님.”
“다행이에요. 걱정됐는데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많이 신경 쓰였어요.”
“멋진 남자에게 기대어 울었더니 완전히 살아났어요.”
지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멋진 남자의 넓은 어깨에 기대서 울었더니 그간의 고민이 순식간에 싸아악 사라지더라고요.”
“꽤 쓸 만하죠? 제가 그러려고 운동하는 거예요. 상시 대기 중이라는 거 항상 기억해 둬요. 아무 때나 써도 됩니다. 지연 씨 한정이니까.”
지연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강현도 함께 장단을 맞춰 대답해 주었다.
장난처럼 말하는 대화 속에 달콤함을 한 스푼 넣어 말하는 그를 보니, 후식으로 먹고 있는 카푸치노와 생크림 케이크보다도 더 달콤한 것 같아 지연의 마음이 솜사탕처럼 몽글몽글해졌다.
혹시나 하여 따로따로 회사로 돌아온 둘은 바로 오후 영업부와의 미팅을 위해 자료들을 가지고 회의실로 향했다.
이번 미팅 이전에도 영업부와 크고 작은 미팅들은 진행했었지만, 임원들…… 즉 강현과 민우가 모두 함께 참석하는 미팅은 저번 분기 리뷰 이후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치열한 설전이 예상되는지라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에는 프로젝트팀이 리드하는 미팅인지라 강현을 필두로 고강식 사원을 제외한 모두가 각자 담당하고 있는 내용으로 발표를 했다.
“아직 인지도가 쌓이지 않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작가의 광고가 시장에 먹히겠습니까? 제품 콜라보는 다른 이야기고요”
역시나 차민우 상무의 질문으로 설전이 시작되었다.
“아시다시피 이번 제품은 국내 판매뿐만 아니라 미국 시장까지 겨냥한 매우 큰 프로젝트입니다. SOO라는 작가와는 가능성을 보았기에 제품 콜라보가 먼저 시작된 것이고요. 미리 공유해 드린 자료에도 작가의 인지도나 영향력을 수치화한 데이터들이 있지만, 우선 간단하게라도 많은 SNS를 찾아보신다면 SOO 작가의 인지도가 낮지 않다는 걸 바로 아실 겁니다.”
“그걸 저희가 왜 하나하나 찾아봅니까, 그건 기획팀 일인데. 그런 것까지 영업부에서 다 찾아보면 저희가 기획하지 왜 따로 기획팀을 만들었겠어요.”
차민우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표정부터 인상을 찌푸리고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하였다.
“그래서 보시라고 참조 자료를 미리 공유드렸잖습니까, 지금 앞에도 놓여 있고요.”
“그걸 미리 다 살펴보려면 이런 미팅은 뭐 하러 합니까? 그냥 자료 돌리고 말지!”
이강현과 차민우의 평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지만, 오늘의 회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차민우의 말투나 태도는 건설적인 토론을 위해 나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는 지금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삐딱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 느낌을 회의실 안의 모두가 받았다.
“페이지가 100페이지도 아니고 10페이지도 안 되는 잘 정리된 자료 한번 안 읽고 미팅에 참석하시는 배짱에 박수를 드리고 싶군요. 차민우 상무님.”
감정을 싹 뺀, 하지만 살얼음이 언 듯한 강현의 서늘한 말투에 회의실 안의 모두가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