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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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2022.11.07.
강현의 서늘한 표정에 지연은 소름이 돋았다.
“전략기획실은 전략을 짜고 기획을 하는 팀이지 영업부 입에 밥을 떠 넣어 먹여주는 부서가 아닙니다. 잘 차려놓은 밥상 같은 자료를 잘 소화하시는 것은 본인들의 몫이에요. 저희가 차려놓은 밥상의 밥까지 씹어서 목구멍에 넣어 드려야 할까요, 차민우 상무님?”
“무슨 말씀입니까? 어쨌든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가시는 거면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자료를 만들어 보여주셔야지요.”
민우는 마치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렸다.
“자료를 한번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고, 거기다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된 자료를 보고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본인의 집중력과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은데,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 보셔야 하겠는데요?”
“뭐……뭐야?”
강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욱했는지, 차민우가 자신도 모르게 반말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으세요. 차민우 상무님.”
냉정한 눈빛으로 민우를 쳐다보며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던 강현이 말을 이었다.
“전략기획실은 영업부와 협력부서이지, 영업부 산하에 있는 팀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는 차민우 상무에게 보고해야 할 팀원이 아닙니다.”
강현이 눈빛에 경멸을 담아 민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기획의 중간 단계를 공유하는 미팅이라는 건 아시고 참석하셨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획팀이 리드하는 미팅이라고 해도, 아무런 자료 없이 빈손으로 와서 보고받듯 앉아계시는데. 제가 상무님의 그 자리였다면 최소한 그간의 세일즈 결과나 다른 브랜드와의 세일즈 분석 등은 가져와서 어떻게 하면 기획에 도움이 될지 공유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다른 영업부 참석자들을 휙 하고 둘러보고는 다시 민우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리더가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리더의 행동 하나하나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 팀원들이 휩쓸려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팀원들도 리더에 맞춰 닮아갑니다. 오늘, 차 상무님과 다르지 않은 영업부 분들의 자세는 함께 일하는 부서로서 매우 실망스럽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하네요.”
강현은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열어놓은 노트북을 닫더니, 참석자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오늘은 더는 미팅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 같으니 이만 마칩니다. 다음 미팅에서는 부디 나아진 모습을 기대합니다, 차민우 상무님 그리고 영업부.”
강현의 갑작스러운 미팅 마무리 코멘트를 들은 민우의 얼굴이 타오르듯 시뻘게져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숨이 거칠어졌다.
뭔가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만 족족 하는 강현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상무님. 설마 저희가 영업부에 아무 말할 것이 없어서 가만히 있겠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최근 세일즈 하락이 두드러지던데, 저희도 자료 좀 공유 받아야겠습니다. 판매 트렌드를 알아야 더 확실한 준비가 될 것 같은데, 준비 좀 해서 공유 주시죠.”
“뭡니까? 그럼 우리는 전략기획실에 보고하라는 겁니까?”
민우가 흥분하여 질문을 이상하게 곡해해서 듣고는 엉뚱하게 대답했다.
강현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민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으면, 말이라도 좀 똑바로 알아들으셔야지요. 이 부분은 그냥 제가 차재우 부사장님에게 바로 요청하겠습니다. 하나하나 알아듣게 다시 설명하는 것도 지치네요.”
강현은 더는 민우의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렸고, 노트북과 자료를 챙겨 회의실에서 나갔다.
그가 회의실에서 나가자 기획팀 역시 바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미팅에 참석했던 영업부는 민우의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회의실에서 하나둘 나가 곧 민우 혼자 회의실에 남게 되었다.
‘저 자식이! 감히…… 감히 나에게!’
이상하게 꼬여 있던 감정들이, 더욱 배가되어 민우의 가슴에서 까맣게 물들어갔다.
강현은 차민우나, 차재우, 차근우와 같이 집안을 배경으로 하여 빠르게 임원 승진을 한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젊은 나이에 업계에서 성공한 보기 드문 케이스의 임원이었다.
“이강현 말이야, 자기가 세운 작은 회사로 시작해서, 레XX 어워드며, IX 디자인 어워드 등등…… 세계 유수 디자인 어워드를 5년 동안 휩쓴 디자인 천재라며?”
“그것뿐이게? 디자인뿐만 아닌 기술 특허도 수없이 냈던 기술력으로 유명한 A컴퍼니 창립 멤버였다잖아.”
“진짜 신화를 썼네! 신화를 썼어.”
처음 이강현이 C&C에 왔을 때 그를 보면 누구나 뒤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이강현은 꽤 오래전부터 그를 눈여겨본 차승조 회장이 C&C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 시, 가장 먼저 영입한 인물이었다.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본인의 힘만으로 글로벌화 되어 있는 대기업의 전무 타이틀을 집안 배경 없이 달 수 있는 것은, 거의 신화 같은 존재라는 말이었다.
거기다 차민우 자신이 가장 가지고 싶었던 전략기획실, C&C에서 가장 핵심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절망에 가까운 패배감을 느꼈었다.
차민우뿐만 아니라 재우, 근우 형제들 역시 차승조 회장을 6개월 넘게 설득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차후 회장직의 승계는 다른 이야기였고, 회사에 대해서는 자식만을 보지 않는 차 회장의 공격적인 결정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쌓여 있던 삐뚤어진 자격지심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은지연이라는 예상치도 못한 발화점에 의해.
***
지연은 지금, 이 순간 차민우를 만나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아까 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차민우와 만나면 더욱 껄끄러울 것 같았다.
비상구 계단에서 민우를 기다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서는데 그때 비상구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은지연.”
차민우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개인적으로 보게 된 것은 민우의 집에서 지연이 폭발한 뒤 처음이었다.
“그렇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계속 만나자는 건가요? 나는 당신과 나눌 말이 이제는 하나도 없는데.”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시선이 민우에게 향했다.
지연의 말을 들은 민우는 피곤한 듯 자신의 목덜미를 잡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의 목에서 두두둑 소리가 났다.
“아버지를 만났더군. 나에게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민우가 지연에게 성큼 다가갔다.
뭐에 그리 열 받았는지 그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고, 분위기가 위험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내가 차 회장님 만나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 끝난 사이라고 알려드린 것뿐인데.”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했잖아, 얘기 좀! 왜 나를 무시하고 네가 아버지를 만나! 왜!”
민우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거의 고함에 가깝게 소리쳐댔다.
“소리 좀 낮춰요. 여기 회사예요!”
지연은 그의 큰 음성에 놀라 낮게 경고했다.
“회사? 회사인 건 알아서 그렇게 대놓고 연애질인가?”
“연애질? 무슨 말이에요?”
“강현 씨, 함께 해요.”
민우가 이죽거리며 지연이 메신저에 썼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하! 그걸 봤어요? 그런데 그게 뭐요?”
지연이 기죽지 않고 바로 대답하자 민우가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 눈 그렇게 조심하면서, 회사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회사에서 상사와 연애질이나 하는 거야 은지연?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니 아무 남자에게나 꼬리치는 건가? 엉? 이강현, 그래 외모 나쁘지 않지. 이미 그 자식이랑 갈 데까지 간 건가?”
민우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상하게 웃어대며 이죽거렸다
“10년간 나만 좋아했다더니 그 마음 참 쉽게 바뀌네. 은지연, 원래 쉬운 여자였었나 봐? 이렇게 쉬운데 어쩌면 나랑 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 만났던 거 아니야?”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대며 이죽거리는 민우의 모습이 징그럽게 못나 보였다.
한때 저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맞춰갔으며,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일 줄 알았는데.
어쩜 이리 최악으로 못났는지.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민우 앞에 한발 다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차민우. 내가 당신 뺨이라도 치면, 내 손이 더러워질 것 같아서 참아. 열 받는 것도 상대에게 기대하는 감정이 남아야 하는 건가 봐. 길 가다가 술 취해서 나에게 시비 거는 또라이는, 같이 싸우기보다 피해 가야 하는 거 알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어? 똥 묻을까 봐 더러워서 피하지. 진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네 수준 알 만하다.”
지연은 소름 끼친다는 듯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는 존댓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웠으면 정세아와 함께 지르기 전에 플랜 B라도 세웠어야지. 그렇게 사랑해서 아내도 버리고 다 필요 없다 하더니, 이제 와서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니? 똥 퍼질러 싸놓고 보니 이제야 어떻게 치워야 할지 걱정돼?”
지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격한 단어들에 놀랐는지 민우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지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한숨을 한번 쉬더니 말했다.
“아버지에게 오해가 있었다고 하고, 나중에 합의 이혼으로 다시 말해. 그리고 은 회장님과 자리 좀 마련하고.”
아직도 자신이 지연에게 중요한 뭔가라도 되는 듯, 이 와중에 어이없는 요청을 하는 차민우에게 정말 학을 뗄 정도로 정이 뚝뚝 떨어졌다.
‘차민우, 네가 정말 나에게 1도 안 남은 정을 떼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내가 왜? 내가 왜 당신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해?”
“너 원래 이혼하면서 협력하기로 한 거였잖아!”
“협력? 그런 거 지나가던 개나 줘버려. 협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뭐를 말했던, 그건 우리가 법적으로 묶여 있었을 때의 얘기야. 네가 우리의 관계를 공기 중의 먼지보다도 가볍게 생각했을 때 이미 모든 게 무너진 거라고. 저번에 다 이야기해줬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나는 네 말을 들어줄 단 하나의 이유도 없어. 넌 이제 나에게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눈빛으로 차민우를 태워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눈도 깜빡거리지 않으며 엄청난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우리 이제 이런 불필요한 에너지 써가며 보는 건 그만 좀 합시다, 차민우 씨. 자꾸 만나자고 메시지 좀 보내지 말고.”
“이강현과 네 사이 밝혀지는 건 안 두렵나 보지?”
궁지에 몰린 쥐처럼, 갈 데까지 간 듯한 말이 차민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 바람난 유부녀에게 협박하는 것처럼 말하네! 이 사람…….’
“당신 앞가림이나 잘하세요, 차민우 씨. 본처 버리고 헤어지기도 전에 함께 사는 정세아와의 사이 밝혀지는 건 안 두렵나 봐요? 아무것도 아닌 사이를 퍼트리고 싶다면 퍼트려. 하나도 안 무서워. 대신 나도 가만있지 않아. 당신 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 줄 테니 기대하든가.”
민우의 대답을 듣기도 싫다는 듯 그를 밀치고 비상구 문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민우가 지연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어딜 맘대로 가려고 해!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꺄아아악!”
지연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민우가 깜짝 놀라 지연의 입을 막았다.
“뭐 하는 거야, 은지연!”
그러자 지연이 자신의 입을 막은 민우의 손을 이빨로 세게 물어버렸다.
“악!”
“바로 놓지 않으면 나 바로 인사팀에 갈 거야. 놔 당장, 이 새끼야!”
민우가 지연을 놓았다.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마, 차민우. 소름 끼치니까!”
잡혔던 팔을 더러운 게 묻었던 것처럼 털어내고는 지연은 비상구 문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