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너무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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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너무 달아
2022.11.14.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에 지연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으음……. 몇 시지 지금?”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막 7시가 넘은 시각.
일어날지 조금 더 잘지 고민이 되어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지만 강현의 품 안이 너무 포근해서 빠져나오기가 싫어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강현이 눈떴을 때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결국 이겨버렸다.
지연은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려진 그의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강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내 남자친구지만 정말 잘생겼네.’
잠들어 있는 모습마저 아름다운 강현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피곤한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자면서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모습이 안타까웠다.
프로젝트 시작하고 하루에 서너 시간도 못 자고 있을 텐데, 오늘만큼은 푹 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연은 그가 깨지 않도록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샤워실로 향했다.
살짝 부어 있는 자신의 입술이 거울을 통해 보이자 괜스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떨어지는 물살 아래에 멍하니 서 있자 갑자기 어젯밤이 생각나 얼굴이 홧홧해졌다.
“케이크 먹고 갈래요?”
‘꺄아아앗! 살면서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하게 될 때가 생기다니!’
밖으로 소리 내지는 못하고 팔을 휘저으며 부끄러움을 삼켰다.
‘근데 어째……. 내가 자꾸 강현 씨를 유혹하는 느낌인데? 다행히 강현 씨가 잘 넘어와 주기는 하는데 말이지…….’
강현이 선물해 준 보디 샤워에서 상큼한 그의 향기가 물씬 났다.
그의 향기가 나자 아직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느낌이 들어 지연의 양쪽 뺨 위로 홍조가 번져나갔다.
지난밤의 강현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달콤했다.
***
달콤하기도 하고, 향긋하기도 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잎인지, 아니면 농밀하게 익어 꿀이 뚝뚝 떨어지는 과실인지…….
정신없이 키스의 달콤함에 빠져들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어느새 지연이 강현의 무릎 위에 앉아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다시 내려온 강현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다시 살포시 내려 감아버렸고, 지연의 입안에서 모든 호흡을 빨아들이듯 깊게 들어와 유영하는 그에게 매달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걸까?
지연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강현 역시 한껏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달다, 은 지연. 너무 달아……. 그래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그렇게 속삭이던 강현이 지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환히 타오르는가 싶더니 깊어지기도 하고 어느새 부드럽게 변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강현의 눈동자가 영롱한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보다 연한 눈동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그의 눈 안에 있었다.
“당신의 눈 안에는 아름다운 우주가 있네요.”
입맞춤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자신도 모르게 지연이 중얼거리자 그가 미소 지으며 지연의 눈꺼풀 위에 입 맞추며 말했다.
“당신의 눈 안에는 내가 있어요.”
그러고는 곧이어 이마, 뺨, 턱에 옮겨가며 버드키스를 하였다.
“나를 당신 눈 안에 담아줘서 고마워요.”
살짝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에 지연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시 입술에 버드키스를 한 강현이 지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눈에 다른 사람은 담지 말아요. 장난도 치지 말고…….”
낮에 충식과 장난친 것이 생각난 것 같았다.
별거 아니었는데도 그가 질투하는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강현은 그대로 지연을 안아 올려 소파 위에 그녀를 눕히고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입 맞췄다.
좀 전보다 깊어진 입맞춤에 흠뻑 빠진 지연은 더욱더 그에게 매달렸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져 자신도 모르게 강현을 약하게 밀어내자 그가 얕은 숨을 헐떡이듯 몰아쉬며 지연에게서 떨어졌다.
“강현 씨…….”
그의 이름을 부르는 지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이 아니어도 돼요.”
“미…… 미안해요.”
지연이 난감한 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
강현과 입맞춤, 그리고 그와의 시간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너무나도 황홀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연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걸 예민한 강현이 놓칠 리 없었다.
“우리의 시간은 앞으로도 많이 있잖아요. 지연 씨가 마음으로부터 열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지금처럼 조금씩 곁에 오면 돼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강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나에게서 도망치지만 말아요.”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지연도 그를 마주 안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듯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지연이 작게 한숨지었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를 몸의 반응에 지연조차 난감하였다. 그리고 속상했다.
결혼은 했었지만, 연애는 처음이고, 남편과 밤을 보내 보았지만, 사랑을 나누지는 않았던 그녀였기에……. 왜 이러는지, 어떻게 하면 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사실 차민우와는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밤을 보내 힘든 시간으로만 기억하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무의식이 몸을 굳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든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과거에도 지연 몸의 반응은 비슷했지만 차민우는 그런 걸 상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이런 걸 깨달을 시간도 주지 않았었다.
그걸 꿈에도 모르는 지연은 그저, 이 순간을 이해해 주는 강현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강현이 지연의 목 뒤로 팔베개를 해주었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우리.”
강현이 팔베개를 해주며 지연을 끌어안자 지연이 그의 넓은 가슴 안으로 폭 안겼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지연은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꺼낸다면 언제가 되어야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어떻게 꺼내도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걱정만이 가득했던지라 결심을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말 안 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네, 이야기해줘요.”
그러면서 지연의 입술에 쪽 하고 입 맞췄다
“제가 이혼한 거는 말씀드려서 아실 텐데…….”
“네,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 상대가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
“차……민우 상무. 그 사람이 제 전 남편이었어요.”
지연이 말하고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눈꺼풀을 살짝 내려 지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강현 씨, 방금 들……었어요? 제 얘기?”
“네, 들었어요. 차민우.”
“…….”
“당신의 전남편이 누구인지는 사실 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 사람에게 아직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지.”
강현이 지연의 이마에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고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당연히 없어요, 아무 감정. 아니, 쓰레기 같아서 꼴 보기 싫다……라는 감정은 있네요.”
“말해주어 고마워요, 그럼 됐어요. 너무 무리해서 나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강현 씨. 그런데,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내 얘기. 강현 씨가 괜찮다면.”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그렇게 말한 강현이 지연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지연은 천천히 어떻게 그를 만났는지부터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사람은 어렸던 제가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뜬 강현은 몇 초간 어리둥절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지난밤, 지연의 집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잠이 든 것이다.
아직 품에서 지연의 달콤한 향이 나는 듯했다.
지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기에, 일어나 테이블로 가서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밤새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준지라 오른팔이 조금 뻐근하였지만,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자신의 보디 샤워 냄새가 훅하고 풍겨와 뒤를 돌아보았다.
“꺄아앗!”
지연이 샤워를 막 마치고는 큰 수건을 두르고 샤워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깜짝 놀란 지연이 얼음이 된 듯 그 자리에 서버렸다.
그 모습이 놀란 토끼 같아 강현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연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폭 품에 안았다.
“나 참느라 몸에서 사리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너무하네요. 우리 지연 씨.”
그렇게 말하며 지연의 이마에 입 맞췄다.
스치듯 손에 닿는 그녀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워 계속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그게 주무시는 줄 알고…….”
지연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버렸다
“내 여자에게서 내 향이 나니 미치겠네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여자’라는 말에 지연의 얼굴이 더욱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지연의 목덜미에서 한껏 지연의 향을 들이마시더니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자 얼른 배고픈 호랑이에게서 도망쳐요, 은토끼 씨. 빨리 안 도망치면 호랑이가 한입에 꿀꺽 삼켜버릴지도 몰라요.”
몇 분 뒤, 지연이 옷을 제대로 입고 나오자 강현이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집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써서 미안해요. 집에 다양한 재료들이 많아서 내가 좀 빌렸어요.”
“저야 고맙죠. 제가 만들어야 하는데.”
“여자친구의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은데요?”
지연은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고는 컵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그림처럼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아침을 만들어 주다니.
거기다 음식도 맛있고.
이건 모든 여자의 로망이 아니었던가?
거기다 밤새 자신의 길고 길었던, 어쩌면 너무 듣기 싫었을 수 있을 이야기도 다 들어준 강현이었다.
갑자기 강현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보여 지연이 컵을 옆에 두고 그의 옆으로 갔다.
“강현 씨.”
강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뒤에서 포옹하고는 그의 등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밤새 내 이야기 들어줘 고마워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해 주어 고마워요. 나누기 쉽지 않은 얘기들이었을 텐데.”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지연의 마음에 사르르 스며들었다.
‘이 사람은 진심이야 은지연. 차민우 같은 가짜가 아니야.’
“오늘 우리 공원에 소풍 가요. 제가 맛있는 김밥 만들게요.”
“좋아요. 가서 피크닉 매트 깔고 누워 여유로운 시간 가져요. 가서 읽을 책도 좀 가져가고요.”
서로 마주 본 둘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한 기분이 가득 담긴 얼굴들이었다.
***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다가 짜증이 치민 민우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휙 던져버렸다.
[민우 씨, 언제 집에 들어올 거예요? 우리 대화 좀 해요.]
[며칠 어머니 집에서 보낼 테니 그리 알아. 그동안 네가 뭘 잘못했는지도 생각해보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런 일로 집을 나가면 어떡해!]
별다른 설명 없이 이렇게만 메시지를 보내고는 며칠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가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지만,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 자꾸 생각나 점점 더 화가 났다.
어쩌면 그녀를 마주하기 싫어 괜스레 핑계를 대고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나와 모친 주란의 집으로 갔었으나, 민우를 붙들고 계속 하소연이며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회사에서 가까운 호텔로 이동해 며칠을 보냈다.
자꾸 이상하게 삐뚤어져 가는 세아도,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은지연도, 팀원들 앞에서 무안을 주며 깔아뭉개는 강현도 모두 꼴 보기 싫었다.
세아를 다시 만나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마음은 그새 어디로 간 건지.
요즘은 그녀를 보면 짜증이 나거나 걱정이 앞서기만 했다.
‘뭐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지?’
‘너를 위해 얼마나 큰 것을 포기했는데, 나를 이렇게 실망하게 해 세아야.’
‘너를 위해 무엇을 버린 줄은 알아?’
이런 생각들만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