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눈물 젖은 바짓가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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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눈물 젖은 바짓가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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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눈물 젖은 바짓가랑이
2022.11.17.
차 회장의 말에 세아를 본가에 데려가기는 하지만, 민우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저번에 크게 싸운 이후로 밖에서 지내다 보니 며칠 만에 만나는 세아였다.
“화는 좀 풀렸어요?”
세아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민우의 눈치를 보았다.
“…….”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앞으로 당신 하라는 대로 할 테니, 빨리 집으로 돌아와요.”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는데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운전에 집중하는 민우가 원망스러웠다.
‘그거 거짓말 좀 했다고 이렇게 화낼 일이야? 하여간 속도 밴댕이같이 좁아서는.’
세아는 입을 삐죽이고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세아 너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4시까지 준비하고 있어.”
‘만나자는 건 이제 나를 인정하시겠다는 거겠지. 나도 이젠 숨겨진 여자가 아니라 재벌가 며느리가 되는 거야.’
드디어 C&C 글로벌의 실세를 만나다니, 꿈에 그리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란은 사실 이 집에서 큰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세아의 판단이었다.
차승조 회장과 김지원 여사, 이 집안에 안착하려면 이 두 사람을 공략해야 했다.
민우도 자기 아버지 말씀이라면 꼼짝 못 하니까.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운전하고 있는 민우가 옆에 있었지만,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도착한 민우의 본가를 본 세아는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TV나 인터넷으로나 본 풍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높은 담벼락이 감싼 거대한 저택. 너무나 압도적이라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언젠가 내 집이 될지도 모를 곳이야.’
기대감이 충만한 세아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들어가지.”
민우를 따라 들어간 저택 안쪽은 더욱 멋졌다.
마치 작은 공원을 옮겨온 듯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이 심겨 있었고, 한쪽에 있는 작은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이 정원에서 파티하는 자신의 모습이 절로 눈에 그려져 세아의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자 집안일을 봐주는 분이 둘을 안내했다.
“회장님께서 바로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안내받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방의 주인을 꼭 닮은 중후한 마호가니 가구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방이었다.
차 회장은 책상 뒤로 의자를 돌리고 앉아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방엔 커튼도 쳐져 있는 데다, 차 회장이 앉아 있는 책상 옆쪽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 두고 있어 방의 조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아버지, 세아…… 데리고 왔습니다.”
민우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정세아라고 합니다.”
세아는 최대한 예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돌아앉은 차 회장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둘의 말을 듣고도 차 회장의 움직임이 없자 민우와 세아의 긴장이 배가되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끔찍하리만큼 고요한 시간이 지나자 차 회장이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는 마치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세아는 그런 눈빛을 처음 보다 보니 찔끔하여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 사람 왜 저러는 거지? 자기가 보자고 해서 온 건데 도대체 왜 이렇게 죽일 듯 무섭게 노려보는 거야?’
점점 입안이 말라 목이 칼칼해지자 세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차 회장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책상 위에 있던 무언가를 들고 천천히 둘의 앞으로 걸어왔다.
짝-
둘 앞에 멈춰 선 차 회장이 갑자기 팔을 들어 세게 민우의 뺨을 쳤고, 그 충격에 민우의 몸이 휘청였다.
“아버지! 왜 이러세요!”
이유도 없이 뺨을 맞은 민우는 화가 난 듯 반사적으로 차 회장을 노려보았다.
“네가! 네가 얼마나 눈과 귀가 먹었으면 이런 망종을 데려와서 이 사달을 내! 돌아도 아주 제대로 돌았구나!”
민우를 향한 차 회장의 꾸지람이 마치 사자후같이 쩌렁쩌렁 방 안에 울렸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차 회장은 들고 있던 서류들을 민우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수십 장의 종이들과 사진들이 민우와 세아 주변에 뿌려졌다.
천천히 몸을 구부려 흩뿌려진 종이를 주운 민우가 종이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정세아 보고서]
강웅(연예인 지망생)- 3개월 교제.
김태우(무직)- 2개월 교제.
기명우(무직)- 8개월간 정세아 집(서울)에서 거주.
감진명(회사원)- 3개월 교제.
강진규(자영업)- 클럽에서 만나 4회 이상 만남.
고민재(자영업)- 1년 교제 및 고민재 집에서 정세아 함께 거주.
금수원(카페 운영)- 1년 교제 및 금수원 집에서 정세아 함께 거주.
김태우 (무직)- 현재 무직으로 @#$$%
종이에는 정세아의 과거 연애사가 적혀 있는 듯했다.
“이……이게 뭡니까 아버지.”
종이를 들고 있는 민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기 여자의 과거를 아버지가 조사했다는 것에 화부터 났지만, 종이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정세아의 최근 10년, 민우와 만난 후의 이성 교제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름과 직업, 그리고 교제 기간 등. 참 많은 내용이 빽빽이 적혀 있는 종이.
더욱 놀라웠던 것은 자신과 만나는 동안 동시에 만났던 사람들도 몇 있었고, 또 일부는 함께 살고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착했던 세아, 그 누구보다 청순하고 아름답던 세아가 차민우를 배신했었다는 말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거기다 이 자료에 의하면 그런 일들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라지기 직전, 민우와 미래를 이야기하던 때에도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너……. 이게 뭐야, 정세아! 이게 뭐냐고!”
부들거리던 민우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들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며 흩날렸다.
세아는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여 떨어진 종이를 들어 읽어보았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이건……이건 잘못된 거예요. 모조리 다 거짓말이라고요! 아버님! 저 이런 여자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이거 다 이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거라고요!”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세아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민우가 떨리는 손으로 떨어져 있는 사진들을 집어 들었다.
사진들은 누군가 몰래 찍은 것이 아닌, 셀카 또는 누군가 찍어준 것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와 환하게 웃는 정세아.
곁의 남자와 뽀뽀도 하고 공원도 가고, 카페며 노래방…….
곳곳에서 많이도 찍은 사진들이었다.
찍은 날짜들도 명확하게 적혀 있어서, 조금 전 보았던 자료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예전에 주란이 개인적으로 알아본 내용과는 차원이 다른 자료들이었다.
아주 자세하고 확실한 정보.
“거짓말? 이 사람들, 돈 몇 푼 쥐여주니 술술 다 이야기하면서 너와 있었던 일들이나 사진들을 갖다 바치던데. 인생을 그리 가치 있게 산 것 같지는 않구나. 그중에는 네 친구도 있었다지?”
차 회장이 바닥을 기는 바퀴벌레를 쳐다보듯 세아를 쳐다보았다.
“네가 민우를 만나지 않았을 때의 사람까지 뭐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우리 민우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얘를 만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차 회장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세아는 그 목소리에 더욱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아버님. 이건…… 이건……. 히끅! 이건…… 히끅!”
갑자기 세아가 바닥을 기어가 차 회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버님, 저 민우 씨 사랑해요. 다 민우 씨와 헤어지거나 떨어져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이에요. 믿어주세요!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세아가 절규하듯 울며불며 매달렸다.
차 회장이 발끝의 때를 보듯 경멸의 시선으로 세아를 내려다보더니 테이블 위의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녹음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세아요? 봉 잡았다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데요. 결혼까지 할 거라고 하던데? 아직 안 했나? 걔 남자 엄청나게 밝히는 앤데, 얼굴이 반반해서 그런가? 남자들이 그거 모르고 걔보고 청순하다며 따라다녔었죠. 우리가 그거 보고 얼마나 웃겼는데요.
-그…… 민우인가 만우인가. 대학교 때 세아 엄청나게 쫓아다닌 남자 하나 있었는데 세아가 뒤에서 얼마나 비웃었는데요. 그 사람이 자기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걔가 학생인데도 자기한테 돌아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줬다나 뭐라나. 암튼 그때 정세아 다른 남자 만나고 있었는데 정리도 안 하고 둘 다 만났을 걸요?
-세아 걔 완전 여우예요. 남자 돈만 보고 만나는 애잖아요. 근데 웃긴 게 남자 돈이랑 얼굴 보고 만났는데, 나중에 보면 다들 양아치나 사기꾼 같은 애들밖에 없었어요. 걔도 그런 거 보면 눈이 참 낮아서 인생이 참 안된 거예요? 친군데 왜 이런 얘기 하냐고요? 어우 우리 안 친해요. 걔가 그냥 빈대 붙는 거지. 남자 잘 만났으면 꿔간 돈이나 갚으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정세아, 저번 모임에서 돈 없다더니 너 때문에 비싼 브런치 먹었는데 왜 먹튀야. 5만 원 빨리 내놔.
-못 헤어지겠다고 붙잡는 나한테 정세아가 뭐라고 한지 아세요? 자기 이제 재벌 만났다고 헤어지자고, 너는 그만큼 자기한테 해줄 수 있냐고 하던데요? 자길 위해 매달 일이 억씩 쓸 수 있냐고……. 그 남자도 미친 거지. 걔 완전 여우인데. 근데 웃긴 건 걔가 헤어지자고 하곤 두 달인가는 더 저한테 찾아왔었어요. 만나는 남자와 뭐가 안 맞다나?
-정세아 그 계집애 어딨어요? 엄청나게 꼬셔서 잠깐 같이 살고, 가게에서 일도 하게 해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 가게 계산대에서 매일 얼마씩 빼갔더라고요.
정세아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지더니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서 차 회장에게 달려들었다.
녹음기를 뺏으려는 듯 두 팔을 뻗으며 달려들었지만, 차 회장이 강하게 밀쳐내 세아는 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꺄아아악 그만해!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당혹스러움이 지나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인지, 정세아가 소리를 지르며 민우의 다리에 매달렸다.
“민우 씨 저것들 다 거짓말이야. 다들 날 시기해서 못 잡아먹어 저런 거라구! 저 말 믿지 마. 믿지 말라고 민우 씨, 으흐흑.”
세아는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민우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마치 TV에서 연기하는 연기자를 화면으로 보고 있는 듯,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울고 있는 정세아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거 놔.”
민우의 눈빛은 흐릿하게 초점이 맞지 않았고,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이럴 리 없어. 세아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래. 어떻게!”
몹시 고통스러운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민우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마치 위장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세아가 민우의 말에도 그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내 얘기를 믿어줘야지 민우 씨. 우리 좋았잖아. 어떻게 저런 것들 말만 듣고 이래! 어떻게 나를 안 믿어, 으흐흑.”
민우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세아의 팔에서 억지로 다리를 떼어냈다.
그러고는 차 회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 방을 나갔다.
자신을 그냥 놓아둔 채로 민우가 나가버리자 세아는 바닥에 엎드린 채 엉엉 울었다.
‘못된 것.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리석은 민우는 속여도 나는 어림없다.’
차 회장은 세아를 보며 삐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나가보았으면 좋겠구나. 세아 양.”
차 회장의 말에 세아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흐느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은, 뭐가 그리 잘나서 나한테 이래.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세아가 발악을 하듯 격양된 목소리로 차승조를 향해 내뱉었다.
너무 흥분하여 존댓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나한테 당신이 그랬지? 민우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그를 만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느냐고? 그러는 당신은? 당신은 김지원 여사님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다른 여자를 함께 사는 집에서 품어? 그건 뭔데? 그건 미친 거 아니야?”
세아가 씩씩대며 절규하듯 소리치자 차승조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해도 당신은 나에게 그럴 수 없어! 왜냐고? 그 증거인 나의 민우 씨가 저렇게 태어나 있으니까! 엄마가 다른 혼외자로 태어나 나를 만났으니까! 그러면서도 민우 씨 어머니도 김 여사님도 손에서 놓지 않는 당신이 감히 나를 비난해? 웃기지 마!”
독기를 뿜어내며 이야기를 하는 세아의 얼굴이 점점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당신들 두고 봐! 나에게 울고 불며 빌게 할 거야.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어떻게 그럴 거냐고? 궁금하지?”
미친 사람처럼 세아가 기괴하게 웃어댔다.
“내 배 속에 있는 당신의 손주가 그렇게 만들 거야. 이 엄마를 대신해서 내 새끼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