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동상이몽
(33/85)
33.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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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동상이몽
2022.11.21.
세아의 말에 차승조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또 말도 안 되는 거짓말하지 말거라!”
당황하는 차승조를 보며 기분이 좋아진 세아의 얼굴과 목에 홍조가 번졌다.
하지만 곧 싸늘한 미소가 얼굴 위로 퍼져나갔다.
“거짓말이라…….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차 회장님.”
세아는 폭탄 같은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내가 옛날처럼 바보같이 다시 버려질 것 같아? 어떻게 다시 잡은 기회인데! 절대 그럴 수 없어.’
절대로 이 집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쫓겨나갈 수 없었다.
임신 사실을 안 건 이틀 전이었다.
기간이 되었는데도 소식이 없어 혹시나 했다.
임신 테스트기로만 2번 확인해서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세아는 바로 다음 주에 병원에 예약을 해두었다.
“제발, 제발…….”
언젠가부터 세아와의 시간을 귀찮아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자꾸 피하던 민우를 매번 구슬려서 함께 밤을 보냈었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밤을 보낸 건 아니었지만 아기가 생기기를 바라며 꾹 참았었다.
분명 세아의 노력에, 이때 생긴 소중한 아이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혹시라도 외로움에 딱 한 번 보냈었던 그 하루 때문이라면……?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 아이는 반드시 나와 차민우의 아이여야 해!”
세아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민우와 보낸 밤에 생긴 아이여야만 했다.
아니! 그때 생긴 아이였다. 그렇게 믿을 것이다.
세아는 자신의 배를 소중히 감쌌다.
“아가……. 넌 엄마가 지킬 거야. 그리고 반드시 이 집에서 나고 크고 자라가게 해줄게.”
지금은 배 속의 아기는 세아가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
주란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김지원 그 여자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도대체?”
얼마 전 에메랄드 클럽에서 당한 망신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세아라는 계집애는 분위기도 모르고 그 와중에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다니기나 하고.
사태를 관망한 사람들은 경멸의 눈길로 주란과 세아를 쳐다보았었다.
“아이고 머리야. 나이 들어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돈 쓰러 다니는 맛에 살아야 하는데, 이게 무슨 낭패야 낭패가.”
지연이 계집애는 민우와 살 때는 몇 년간 죽은 듯이 있더니,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와서는 자신과 민우에게 패악을 부렸다.
그리고 겨우겨우 떼어냈다고 생각했던 세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나 민우 녀석과 살림을 차리고 있고.
평소 조용하고 자신에게 설설 기던 안사돈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망신이나 주었다.
거기에 차 회장은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 집에 오라고 몇 번을 연락해도 오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답장도 없었다.
“내가, 이 강주란이가 왜 이렇게 구박을 받고 살아야 하는 거야! 왜!”
생각할수록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은지연의 마음은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그리고 민우 녀석도 원하지 않는 듯했고.
그렇다고 정세아를 받아들여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 표독스럽고 되바라진 사기꾼 같은 계집애는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 안 되지.’
드러누워 끙끙 앓던 주란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정세아는 정대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그 계집애를 받아들일 바에는 그냥 우리 민우를 총각 귀신으로 늙어 죽게 하는 게 나을 거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 동네의 마당발 청담동 김옥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김 마담에게 부탁했어야 했는데 그이가 하자는 대로 해서 이 사달이 난 걸지도 몰라. 역시 뭐든 내가 나서야 하는 건데! 으이그, 지나간 거 후회해서 뭐 해. 이제라도 좋은 데 내가 찾아봐야지.’
일명 ‘김 마담’이라고 불리는 김옥자는 상류층 사모들 사이에서 ‘금손 중매쟁이’로 통했다.
요즘에야 결혼정보 회사, 커플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그건 일반인들에게나 노출되는 곳이었다.
거기서 최상층이라고 해봐야 검사, 변호사, 의사 등의 사자 돌림 직업들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상류층들을 이어주는 사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야 이런 걸 우습게 생각할지 몰랐지만, 김 마담, 김옥자가 성사시킨 대기업 자제들 결혼은 무려 300건이 넘었다.
그중에는 재계 5위 안에 드는 기업들 자제들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김옥자와 시간을 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고, 최소 한두 달 전에는 예약해야 했지만 강주란은 예외였다.
몇 년 전 우연히 좀 가까워진 김옥자가 전남편에게 크게 맞아서 쓰러졌을 때, 우연히도 주란이 그 상황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주란이 차 회장 도움을 받아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김옥자의 전남편을 멀리 떨어지게 해줬더니, 그다음부터는 ‘언니, 언니’ 하며 주란을 잘 따랐다.
Rrrr- Rrrr-
“어머 주란 언니, 오랜만이에요. 내 이럴 줄 알았지. 언니 전화가 왜 안 오나 했어. 이번 에메랄드 클럽 모임에서 한 건 하셨다며? 오호호호.”
김옥자가 주란의 전화를 받자마자 속사포로 이야기하더니 크게 웃었다.
“야! 너 미쳤어? 왜 전화를 받자마자 내 속을 휘젓는 거야?”
역정을 내며 주란이 크게 소리 지르자 김 마담은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바로 전화해야지 왜 이제 해. 언니 전화 며칠을 기다렸잖수. 그래……. 우리 언제 볼까요?”
“지금 당장 우리 집에 좀 와. 시간 되지?”
“어휴~ 성미 급한 건 여전하네. 내가 일정 안 돼도 언니 말이라면 되게 해야지. 그럼 1시간 뒤에 만나요. 준비 좀 하고 갈게.”
“준비는 뭔 준비야. 아직 안 씻었어도 그냥 넘어와. 나 만나는데 치장해서 뭐 해. 나 머리 아파 죽겠어, 그 준비도 좀 해 오고.”
“알았수, 알았어. 가면 그날 일이랑 민우 얘기 다 해줘야 해요? 내가 궁금한 건 죽어도 못 참잖수.”
김옥자는 1시간을 말했지만 30분도 안 되어 주란의 집에 도착했다.
정말 씻지도 않고 부한 파마머리에 꽃무늬 조끼를 입고는 슬리퍼를 끌고 왔다.
상류층 중매 한 건에 최소 5천에서 많을 때는 2억까지 받는, 가장 유명한 중매쟁이라는 건 그녀의 외모를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언니, 머리 아프다길래 내가 두통에 좋은 차 좀 가져왔으니 이거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주란의 집에 이미 여러 번 와 본 김옥자는 바로 부엌에 가서는 포트에 물을 부었다.
“아니…… 민우 걔는 언제 그 여자앨 찾은 거래? 언니가 지방 어디로 깨끗하게 쫓아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우 내가 그거 때문에 신경질이 나 죽겠다니까. 지금 민우랑 같이 산 지 6개월이란다. 어휴, 내가 속상해서 원.”
“어머 그렇게 오래됐대? 온유 제약이랑 그 며느리가 그래도 가만있었나 보네? 이혼 도장 찍기 전에 그러면 고소당하는 거 아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민우가 혼인신고를 깜빡해서 둘이 법적으로 안 엮였다잖니. 그래서 지연이가 난리 한번 부리고 갔고.”
“웬일이야, 완전 아침 드라마보다 스펙터클하네.”
김옥자가 남의 얘기라고 눈을 반짝이며 너무 재미있어했다.
“야! 너 자꾸 불난 집에 기름 부을 거야?”
“아휴~ 내가 왜 그러겠어요, 언니한테. 대신 불난 집에 119까지는 아니어도 소화기로 쓸 건 가져왔지요. 왔지요~ 요기 왔지요.”
김옥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져온 가방에서 여러 개의 서류철을 꺼냈다.
“언니 그 세아라는 계집애 가만 안 둘 꺼잖수. 이번 에메랄드 클럽 다녀온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온유 제약 딸내미는 아예 물 건너간 것 같고. 그렇다면 새로 장가드는 수밖에 없지.”
김옥자가 내민 서류철을 받아든 주란이 눈을 반짝였다.
“네가 나를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니, 이젠 말 안 해도 내 맘을 아주 훤히 아는구나?”
“어휴, 내가 아니면 언니 맘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이런 일이 언니한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요. 소문만 안 났지 칼부림 난 데도 있고, 때려 부수는 데도 있고. 별일들이 많아요.”
그렇게 말하며 맨 위의 서류철을 열어 펼쳤다.
“자~ 골라 보시지요, 마나님.”
주란을 부추기며 김옥자도 눈빛을 빛냈다.
강주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져온 것도 있었지만, C&C 아들내미 중매에 성공하면 1억은 그냥 굴러들어올 것이었다.
요즘 애들은 옛날과는 다르게 자꾸 연애결혼을 하고, 자기네 목소리를 높이는지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예전과 비교하면 큰 건수들이 현저히 줄어들었기에 이번 건은 반드시 성사시키고 싶었다.
“얘는 삼중건설 첫째, 나이는 서른셋이에요. 나이가 어리지는 않은데 똑똑하고 가정교육 잘 받아서 어른한테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해. 얼굴이 좀 못나서 그렇지. 근데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뭐. 안 그래요?”
“그래? 흠……. 근데 못나기는 했네. 우리 민우가 얼굴을 좀 많이 보는 것 같은데. 그럼 얘는?”
“얘는 강문 철강이라고 현금 많기로 유명한 곳이에요. 얘는 외동딸. C&C도 좋지만……. 민우 위치 생각하면 여기 외동딸이랑 결혼해서 강문이랑 제휴하는 거 생각하거나, 아니면 외동딸인데 물려줄 테니 여기 먹어도 좋지. 근데 얘는 재작년에 이혼했어요. 애는 없고.”
“얘!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민우 위치가 어때? 저 나이에 유명 대기업 상무면 끝내주는 거지. 그리고 난 갔다 온 애 싫다.”
“요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민우도 한번 갔다 왔잖아요.”
“얘, 말 바로 해. 서류상으로 우리 민우는 총각이야.”
주란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게 참 자랑이다, 자랑이야.’
김옥자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생각을 했지만 내뱉지는 않고 속으로 꿀꺽 삼켰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업계에 결혼했던 거 다 소문났었는데.’
“아무튼, 다른 애는 없어? 얘는 좀 별로네.”
“아, 얘도 괜찮아요. PP제과 알죠? PP베이커리도 계열사로 있고. 건실하기도 하고, 요즘 사업 확장하고 있어요. 여기 셋째예요. 아직 대학교 3학년 학생인데 일찍부터 신부 수업 받고 있다네요. 근데 민우 배우자가 굳이 학교 졸업할 필요 있나?”
김옥자도 대충 은지연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못돼먹은 성격의 주란 눈 밖에 나서 엄청나게 구박받고 고생했다지.
‘은지연이라는 애도 따지고 보면 민우보다 배경이며 여러모로 더 나은데……. 안됐네. 착해빠져서 그래.’
“언니나 민우한테는 시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한테 잘하는 가정적인 애가 필요하잖아요? 그럼 PP제과 막내가 딱 맞지. 아직 어려서…… 손주 볼 기회도 더 많을 테고.”
손주 이야기가 나오자 주란의 안광이 번쩍였다.
주란은 손자가 너무 가지고 싶었다.
차승조 회장이 아기를 너무 좋아해 손주를 바라고 있었으나, 김지원의 첫째 아들 차근우도 아직 아기가 없었고, 민우 역시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손주가 있다면 C&C를 가지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민우가 이제는 다 커서 마음대로 되지 않자, 아들처럼 손자를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반드시 손녀가 아닌 손자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연이에게도 그렇게 이것저것 먹이고, 해다 바치고…… 신점까지 봐가며 동침 날짜까지 받아 줬는데도 결국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지연과 민우는 모르지만, 민우의 집 침대와 가구 곳곳에 그 둘 모르게 용하다는 스님에게 받아온 글씨나 그림들도 붙여놨었는데 모두 허사였다.
새 며느리를 들이면,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다짐하고 또 하는 주란이었다.
“그래, 우선 PP제과 막내딸 쪽이랑 주선 좀 해봐. 알지? 이번 일 잘되면 내가 섭섭하지 않게 신경 쓸게. 그리고 나보다도 회장님이 더 크게 좋아하실 거야.”
주란의 화통한 말을 듣자, 옥자의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