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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XX친구, 충식이 (34/85)


34. XX친구, 충식이
2022.11.24.



 
즐거운 소식에 지연은 기분이 좋았다.


“우와! 드디어 회신이 왔네.”

메일을 보다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을 한 지연을 옆에 앉아 있던 주연 대리가 궁금증을 담고 쳐다보았다.


“과장님, 기분 좋은 소식 있으신 거예요? 뭔데요?”

“주연 대리님, 드디어 SOO(수) 작가 에이전시 피드백이 왔어요. 우리가 제안한 그대로 계약을 진행하자고요. 그리고…….”

지연이 메일 본문을 읽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SOO(수)가 마침 한국에 있다고, 가능하다면 이번 주에 기획팀과 미팅하고 싶어 한다네요? 이번에 만나서 추가 제안에 대한 부분은 논의하자고…….”

“우와!”

“유명 작가를 이렇게 속전속결로 만날 수 있다니! 이번 일이 잘되려나 봐요, 대리님.”

“그러게요, 과장님. 원래 뭔가 일이 되려면 막 거침없이 된다잖아요. 우리 제품도 대박 나고 광고 대박 나려나 봐요. 신난다 신난다 신난다아.”

지연의 신남에 주연이 흥을 더해 함께 기뻐해 주었다.

야근이 많아도, 일이 넘쳐나도 이런 맛에 일하는 것이었다.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는 일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 과정을 함께해 주는 사람들.

지연은 일을 다시 시작한 게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뭐가 그렇게 신난 거예요? 귀엽게.]

화면에서 깜빡이는 메신저를 열자 강현이 보낸 메시지였다.


‘풋, 귀엽게……라니.’

메시지 하나에도 강현의 애정이 느껴져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폈는데 막상 강현은 보이지 않았다.


[본부장님, 근처 지나가셨어요?]

[네, 멀리서 지연 씨가 보였는데 너무 신나하며 웃길래 괜히 아는 척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셨구나. 좋은 소식이 있었거든요.]

[뭔데요? 지연 씨를 그렇게 기쁘게 한 소식이?]

[드디어 SOO(수) 작가님 쪽에서 긍정 회신 받았어요. 그래서 너무 신났었어요.]

[그래요? 너무 잘됐군요!]

“과장님, 커피 한 잔 어떠세요?”

[저 주연 대리님이랑 커피 한잔하고 올게요. 나중에 봐요.]

[그래요.]

주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커피를 마시자고 해서 지연은 서둘러 메시지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컴퓨터 모니터에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한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보고 싶다, 은지연.]

둘은 회사 건물 내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쭈욱 들이키고는 잠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연이 그녀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과장님. 최근에 남자친구 생기셨죠?”

“푸웃-.”

자리에 앉자마자 비밀 얘기를 물어보듯 속삭이는 주연의 말에 놀라서 지연이 마시던 커피를 뱉어낼 뻔했다.


“말씀하시기 불편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지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연을 쳐다보았다.

주연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쭉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과장님, 어느 순간부터 시도 때도 없이 이쁘게, 흐뭇하게 미소 지으시더라고요. 이 험난한 야근 주간에도 활짝 피어나는 게, 왠지 남자친구가 생기신 것 같다……라는 느낌이 팍- 들었죠.”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 주연의 얼굴에 확신한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음……. 그래 보였어요?”

지연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전 연애 추종론자거든요. 모두 연애를 반드시 할 필요는 없지만, 하면 너무 좋다고 생각해요. 혹시 연애하시는 게 맞는다면 제가 팍팍 밀어드리겠으니 일도 저에게 좀 넘기고 자주 데이트도 하시고 일찍 퇴근하세요. 우리 팀에 일이 많기는 하지만, 특히 과장님 너무 일이 많으시잖아요. 연애 초반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주연 대리님.”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과장님.”

지연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충식 과장님은 안됐네요.”

“충식이요? 걔가 왜요?”

갑작스럽게 충식의 이름이 나오자 지연이 감을 못 잡고 물어보았다.


“우리 지연 과장님이 일은 LTE 급인데, 왠지 연애에는 2G 정도이신 것 같단 말이죠.”

정말 모르겠다는 듯, 지연이 어리둥절해 하자 주연이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충식 과장님, 틈만 나면 과장님 쳐다보고 계셔요. 회의 때도 어찌나 애절하게 보시는지. 지연 과장님 발표할 땐, 무슨 팬이 평생 보고 싶어 했던 연예인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이라니까요. 물론 제가 이런 쪽으로 워낙 해박하고 눈치가 빨라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는 걸 아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네에? 아휴 무슨 소리예요. 충식이는 아니에요. 제가 걔를 안지가 얼마나 오래됐는데요. 진짜 못 볼 꼴도 서로 얼마나 많이 보면서 지냈는데. 이건 대리님이 잘못 짚으셨어요. 저희 일명 XX친구 같은 관계예요.”

지연이 손사래를 치더니 크게 웃었다.

하지만 주연은 그녀의 대답을 듣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효. 충식 과장님도 안됐네요, 안됐어. 짝사랑인 건 딱 봐도 알겠는데 그 상대가 자신을 XX친구라고 하다니. 참 포지셔닝을 못 하셨구만요, 그 양반도. 쯧쯧쯧. 근데 어쩔 거야, 자신이 제대로 어필 못 한 것을. 게다가 과장님은 이제 연애 중인데. 물 건너 간 거지.”

명확한 답을 듣지도 않았는데, 지연이 연애 중이라고 굳건히 믿는 주연 대리였다.


“제가 장담하는데, 한 달 안에 충식 과장님이 고백한다는 것에 제 한 달 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겁니다!”

주연과 짧은 커피타임을 보내고 자리에 돌아온 지연은 괜스레 충식이 신경 쓰였다.


‘충식이 쟤는 아닐 텐데, 이런 얘길 들어서 괜히 신경 쓰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하필이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충식과 눈이 딱 맞아버렸다.


“커피 한잔하지 않을래?”

“어쩌지? 조금 전에 주연 대리님이랑 마셨어.”

“그래? 한발 늦었네.”

충식의 살짝 풀 죽은 표정에 지연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저 녀석 원래 저런 캐릭터 아닌데. 오늘따라 왜 저러지?’

“충식아, 그럼 이따 저녁 시간은 어때? 너 한국에 왔는데 연락 안 했다고 애들이 난리야. 당장 모이라는데……. 네가 미리미리 연락 돌리고 했어야지, 왜 내가 대신 구박받아야 하냐.”

“시간 돼!”

충식이 바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애들한테 모이라고 얘기해 둘게. 10시쯤 짧고 굵게 모이자. 참고로 너 최유나한테 혼날 각오하고.”

“윽 최유나! 나 죽은 목숨인 거냐.”

“몰라서 물어? 인간 샌드백이 될 각오하고 와. 참고로 나도 유나와 함께할 거다.”

지연이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 웃었다.


‘에이……. 충식이는 아냐. 주연 대리님이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어.’

 

***

오후 팀 미팅, 지연은 ‘수’ 작가와의 미팅 일정을 목요일 오후로 잡은 뒤, 함께 갈 인원을 점검했다.


“설 차장님, 목요일에 함께 가실 수 있으세요?”

“나는 그날 좀 힘들 것 같아. 은 과장이 충식 과장이랑 같이 가서 얘기 좀 잘 하고 와. 나는 나중에 스토리보드 검토 미팅할 때 참석해도 될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도 바쁘시니까 못 오시겠죠?”

다른 미팅 때문에 자리에 없는 강현이 목요일 미팅에 참석할지 애매했다.

일반적으로 광고 관련해서 특히 광고 모델 미팅에 임원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다른 광고와는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참석할 수도 있었다.


“저 근데 다들 왜 저를 충식이라고 부르세요? 저 권이안인데.”

갑자기 충식이 모두에게 묻자,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제품 쪽도 같은 작가 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본부장님 가실 수도 있겠네. 비서실에 일정 남겨봐.”

“네, 그럴게요.”

모두 충식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처럼 다음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식 과장님은 미국에서 수 작가님 관련해서 뭐 좀 들은 거 있어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한 작가니까.”

“아니요. 그 작가 워낙 비밀스러워서 본명이랑 얼굴 노출이 하나도 안 되었잖아요. 작업도 혼자 모두 다 한다면서요? 그리고 모든 외부 커뮤니케이션은 에이전시가 도맡아서 하고. 그래서 이번에 우리 광고 참여하고, 거기다 직접 회의 참석한다고 해서 너무 놀랐어요. 지금 한국이라니 완전 서프라이즈.”

“우선 광고에 활용할 새로운 작업해주는 건 승인을 받았고, 이번에 만나면 출연도 한번 설득해 보려고요.”

“자, 그럼 회의는 마치죠. 본부장님 회의 참석 여부는 지연 과장이 확인하시고, 주연 대리님은 한국 에이전시에서 예산 확인해서 저에게 공유해 줘요. 그리고 충식 과장님은 작가와 미팅 할 장소 섭외해 주시고요. 1차 미팅에는 한국 에이전시 없이 우리 기획실만 참여하는 거로 해서 크지 않고 조용한 곳으로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고 사원은 법무팀 쪽에 계약서 점검하고.”

설동석 차장이 회의 마무리를 하며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결국 충식의 이름은……. 그냥 권충식인 거로.

미팅에서 나오자마자 읽지 않은 메시지를 확인한 지연은 깜짝 놀랐다.

10여 년을 혼자 차민우를 좋아하는 동안, 아니 함께 사는 3년 동안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 메시지에 들어 있었다.


[보고 싶다, 은지연.]

‘차민우,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봐.’

지연은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바로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도대체 인제 와서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정세아랑 뭔가 잘 안 풀리나 보지?’

차민우가 이러면 이럴수록 지연은 그에게 더욱 정이 떨어졌다.

자신이 얼마나 쉽게 보였으면, 이런 말 한마디에 뭔가 바뀌기라도 할 듯이 툭툭 던지는 게 진짜 꼴 보기 싫었다.


‘제발 내 인생에 더는 좀 나타나지 마라, 얼굴이든 메시지든, 그림자든!’

 

***

늦게 만나는 만큼 식당보다는 집이 좋을 것 같아, 지연은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지연아! 집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니니? 나도 여기서 좀 함께 살자.”

5인조 중 지연과 가장 연락을 많이 하고 지내는 유나가 집에 오자마자 거실에 벌렁 드러눕더니 너무 좋아했다.


“승규가 노려본다, 유나야. 너의 남편 레이저에 맞기 싫거든! 대신 언제나 환영이니 아무 때나 놀러 와.”

은지연, 권충식, 최유나, 김승규, 강태호.

이렇게 다섯 명은 중학교 내내 꼭 붙어 다녔었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미국으로 떠난 충식을 제외한 네 명은 최소한 한 달에 두세 번은 모여 공부하고 놀며 가깝게 지낸 찐 친구들이었다.

너무 친해서 서로 이성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일명 XX 친구였는데, 유나와 승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연애를 하더니만 결혼까지 한 것이다.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남자들 세 명은 마실 것 좀 사 오겠다며 편의점으로 갔고 지연과 유나는 배달 온 음식들을 테이블에 차리기 시작했다.


“충식이 저 자식, 오늘 먼지 나게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잠수를 타다가 뿅 하고 나타나냐.”

유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근데 유나야. 신기하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건데 엊그제 만난 것처럼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가족이 몇 년 못 본다고 어색할 건 아니니까. 그런데 회사에서는 어때 쟤는?”

“온 지 얼마 안 돼서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나도 아직 파악 못 했는데, 본부장님이 충식이 일 잘해서 데려왔다고 하시더라고. 일에는 아주 깐깐하신 분인데 그런 말을 하시는 거 보면 일 잘하나 봐.”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저 녀석이 너한테 안 찝쩍대냐고.”

유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지연의 두 눈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찝쩍대다니? 쟤가? 권충식이 나한테? 아니? 전혀!”

“어휴, 우리 지연이가 이런 쪽에는 눈치코치 빵점이니 쟤가 어필했어도 모르겠고만.”

유나가 한숨을 포옥 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나야? 내가 눈치가 없어서 모른다는 게?”

“너만 빼고 다 알고 있어. 충식이가 너 좋아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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