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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 남자친구야 (35/85)


35. 내 남자친구야
2022.11.28.



 
방금 자신이 들은 유나의 말에 지연은 어리둥절해 눈만 껌뻑였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왜 이래, 유나야. 네가 잘못 알아도 완전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권충식이 나를 좋아하다니……. 에이 말도 안 되지.”

“에효, 우리 지연이 눈치가 빵점이니 도저히 안 되겠네. 이 언니가 다 말해줘야지.”

앞에 놓인 컵의 물을 한 번에 쭉 들이킨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충식이가 널 좋아한 건, 중학교 2학년 말쯤이라던가? 뭐라더라……? 네가 잡지에서 뭘 보고 와서는 손금 봐준다고 걔 손을 잡았다던가? 암튼 그때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고…… 나에게 고백했어. 너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며 기회를 살폈나 보더라구. 고등학교 입학하면 고백하겠다고. 그러다가 중3 말에 그 일이 터진 거지.”

“충식이 부모님 이혼…….”

“그래 맞아. 두 분 이혼하시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잖아. 충식이는 어머니랑 미국 LA로 가고, 걔네 아버지는 이혼 후에 사업하신다고 동남아로 가시고. 누나는 또 따로 유학한다고 뉴욕으로 가고.”

“그래. 그랬지…….”

“그렇게 정신없는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급히 떠났잖아. 얘가 성격 좋고 무던한 애지만 그때 상처 많이 받았었을 거야.”

“어렸을 때니 상처가 컸을 거야.”

“그래도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 보고 싶다고 한국 매년 왔었잖아. 근데 그거 알아? 마지막으로 걔 한국 왔었을 때. 너한테 고백한다고 나에게 이벤트 물어보고 장난 아녔어.”

“충식이가 그랬다고?”

상상도 못 한 말에 지연은 당황스러웠다.


“근데…… 네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 모두 모인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했었지. 몇 년간 짝사랑 중인데, 마음을 못 접어 힘들다고 울고불고. 기억 안 나? 너 그때 충식이 붙들고 엉엉 울고불고 난리였던 거?”

“아…… 그때. 기억나지.”

기억이 안 날 수 없었다.

대학생활 내내 차민우를 쫓아다녔지만 별다른 인연을 만들지 못했고, 나중에는 만나기조차 어려워지니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 힘든 마음을 내비칠 수 있는 사람이 5인조 친구들뿐이라 결국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충식과 함께 모두 모였던 날, 친구들을 힘들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울고불고 질질 짜면서 깽판 쳐도 친구들이 참으면서, 많이 위로해줬었는데.


“나 민우 선배 평생 못 잊을 것 같아. 너무 좋아해서 마음이 막 부서질 것 같은데 어떡해 유나야. 나 어떡해 얘들아. 시간이 지나도 더 좋아지기만 해.”


“충식아! 나 너무 힘들어. 너 몇 년 동안 짝사랑만 하는 이 마음 알아?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네가 아냐고!”


“나야 모르지. 그나저나 우리 지연이 대단하다. 한 사람을 몇 년이나 좋아하고. 그 마음만으로도 대단한 사랑을 하는 거야, 지연아. 내 친구인 게 자랑스럽다.”

울고 불며 힘들어하는 지연을 충식은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었는데……. 충식은 이때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충식이가 너 좋아하는 거, 모두 알고 있었어. 특히 나는 걔가 종종 고민 상담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러고서 사라지니…… 걔 맘이 이해도 되고. 암튼 그랬다.”

“난 전혀 몰랐었어. 괜스레 미안하네, 충식이에게.”

“네가 미안할 건 없지. 걔가 어필도 못 하고 도망쳤는데 뭘.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 말해준 거야.”

괜스레 마음이 아프기도, 또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이 해보니 짝사랑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고, 충식이도 그때의 감정 다 잊었을 거야.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또 모르지. 아무튼, 너 새로운 연애 시작한 것 같은데 선 잘 긋고.”

“너 어떻게 알았어?”

“야, 내가 널 만난 게 내 인생 반평생이야. 너 딱 보면 알지. 그 차민우 또라이는 잘 정리한 거지?”

“응 잘 정리했어. 암튼 너 족집게다.”

“나중에 남자친구나 소개해라. 이 언니가 잘 살펴봐 주마. 또라인지 아닌지. 내가 은지연 다 믿는데 남자 보는 눈은 잘 못 믿겠거든.”

“알았어, 내가 한번 시간 잡을게.”

편의점 갔던 친구들이 돌아와서 둘은 이야기를 끊었다.

밤이 늦었지만 오랜만에 뭉친 5인조의 이야기는 끊이지를 않았다.


“아무튼, 충식이 저 자식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아야 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자취를 감춰 감추기를? 그러더니 이렇게 어이없게 등장하고.”

유나가 아직도 열받는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알았어. 비 오는 날 한번 너희 집에 찾아갈게. 먼지 나도록 한번 때려줘. 아니 유나 너라면 세 번까지 오케이!”

“어후 얄미워. 저거 입만 살았지.”

“진심이야.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여러 가지 좀…… 힘든 일들이 있어서 그랬는데, 그래도 그게 핑계가 될 수는 없지. 앞으로는 잘할게.”

“암, 그래야지. 한 번 더 말도 없이 잠수타면 이 누나가 미국이 아니라 아프리카라도 쫓아가서 너 가만히 안 둬.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시간 가는지 모르고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지연이도 쉬어야지.”

“다음에는 좀 더 일찍 만나자. 오늘 너무 급하게 만나서 회포를 풀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집으로 초대해 줘서 고마워, 지연아. 집 너무 예쁘다. 또 초대해줄 거지?”

“그럼, 당연하지. 너희들에게는 우리 집 상시 개방이야.”

어질러진 것들을 대충 치우고 모두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유나는 차를 가져와 일부러 술을 마시지 않았고, 태호는 같은 방향이라 유나와 승규가 내려 준다고 했다.

충식은 택시를 타고 간다 해서 유나네를 먼저 배웅했다.


“조심히 가, 곧 또 보자!”

“그래, 충식이 너도 잘 들어가고! 다음에 좀 맞자!”

“하하하, 그래 알았어. 인간 샌드백 할게.”

유나의 차를 배웅하고 충식의 택시를 잡기 위해 1층으로 올라왔다.


“너 택시 불러야지.”

충식이 택시 앱을 검색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런데 늦어서 그런지 근처에 차가 없네. 제일 가깝게 있는 차량이 오려면 20분 좀 더 걸린대.”

“그거라도 잡아야지. 어서 예약해.”

“그래야겠다.”

“여기서 택시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줄게.”

둘은 1층 정원 벤치에 함께 앉았다.


“오랜만에 애들이랑 다 함께 모이니까 너무 좋다.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너도 함께라 이제야 완전체가 모인 듯해.”

“모두에게 너무 미안하네. 사실…… 연락하고 싶고 다들 너무 보고 싶었었어.”

“그럼 빨리 연락해야지, 이게 얼마 만이야 충식아. 다음에 이러면 너 정말 안 본다.”

그때 충식이 지연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아마도 약간의 취기가 그에게 힘을 준 듯했다.


“내가 너무 소심했던 거 알아. 그리고 잘못했던 것도. 사실…… 나 너를 너무 좋아했어. 그런데, 네게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도저히 너를 보기가 어렵더라고. 하지만 한국 올 때 너를 안 보면 죽을 것처럼 힘들고.”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연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지금 너에게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내가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옛날 말에 이런 말도 있잖아.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너무 유치한 말인 거 알지만, 이런 말이라도 믿고 너에게 다가가고 싶은 심정이야 나는.”

충식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 지연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안타깝다고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친한 만큼 더욱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했다.


“충식아, 너의 마음 고마워.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야 할 게 있어. 그게…….”

“그 골키퍼, 난데?”

갑작스럽게 뒤쪽에서 들리는 강현의 목소리에 충식과 지연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이안, 아니 권충식. 은지연 씨 골키퍼 있는 여자고, 그 골키퍼가 나야. 골키퍼 보기에 매우 안 좋으니 그 손 좀 놓아줬으면 좋겠는데?”

충식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강현…… 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형이?”

“그래, 내가 지연 씨 남자친구야.”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강현이 아직 충식이 잡고 있는 지연의 손을 낚아챘다.


“마……말도 안 돼. 형이 지연이 남자친구라고? 형 말이 사실이야 지연아? 사실이냐고?”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밝히게 된 강현과의 관계에 난감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해줘야겠지.’

마구 흔들리던 충식의 두 눈동자가 지연을 향하자,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강현 씨가 내 남자친구야.”

충격을 받았는지 지연의 대답을 들은 충식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강현 씨, 충식이랑 잠시 둘만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아무래도…….”

“아니, 오늘은 이만 끝내죠. 충식이도 집에 가봐야 하고. 내일 회사에서 멀쩡한 정신에 이야기 나누는 게 더 현명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강현은 단호한 말투로 지연의 의견을 반대했다.

막무가내인 의견은 아니고, 강현의 상황도 이해가 갔기에 지연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충식아, 우리 내일 차 한잔하자. 나머지 얘기는 그때 해.”

“그……그래, 알았어. 내일 얘기하자. 나 갈게. 나오지는 않아도 돼.”

당황했는지 충식은 둘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인사했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지연과 강현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강현 씨.”

강현의 눈을 똑바로 보기가 왠지 어려웠다.

정말 그런 게 아닌데, 상황이 무슨 남자친구 놔두고 다른 남자 만난 거 같은 분위기인지라 지연의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강현 씨, 제가 말했었잖아요. 오늘 5인조 모임 있다고. 충식이도 5인조 친구 중 하나예요. 그런데 저도 충식이가 저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요.”

지연이 온 마음을 두 눈에 담아 간절하게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강현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지연을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보다 서늘해 보인달까.


“은지연, 내가 이 두 눈에 다른 사람 담지 말라고 했는데.”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말을 내뱉은 강현의 손이 지연의 뒷머리를 감싸 끌어당겼고, 곧 그의 입술이 지연의 입술을 덮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입맞춤에 지연은 당황스러워 그의 품 안에서 잠시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맞춤에 화답했다.

이전보다 좀 더 거친 듯, 숨 쉴 틈도 주지 않은 강현이 지연의 안을 유영하며 그녀를 흔들었다.

마치 그의 입맞춤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너는 내 여자라고.

나만이 너를 안을 수 있고, 나만이 네 눈 안에 담길 수 있다고

결국, 지연이 숨을 쉬기가 어려워 강현의 가슴을 약하게 통통 치자 그가 지연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하아……. 미안해요.”

“강현 씨.”

“상황 설명 듣지도 않고, 갑자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괜찮아요.”

“내가, 이렇게 질투심에 휩싸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는데…….”

지연이 오늘 친구들과 집에서 모임을 한다는 건 그녀가 미리 말해줘서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자며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하지만 발코니에서 와인을 한잔하는데, 밖에서 지연과 충식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둘만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이게 무슨 못난 모습이야 이강현. 철부지 애도 아니고……. 전후 사정 듣지도 않고.’

하지만 충식의 갑작스러운 고백, 특히 남자친구가 있어도 상관없다는 말에 갑자기 흥분하여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터는 전후 사정을 꼭 들어주세요, 강현 씨.”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바로 꼬리를 내리는 호랑이 같아 지연은 속으로 쿡쿡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제가 이상한 건가……. 이런 질투, 나쁘지만은 않네요.”

두 팔을 올려 다시금 강현의 목을 감싸 안은 지연이 그의 입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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