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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오늘 밤은 그냥 나만의 비밀로 (36/85)


36. 오늘 밤은 그냥 나만의 비밀로
2022.12.01.



[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오늘은 제발 돌아와.]

[내가 다 설명할게. 설명할 수 있어, 모든 걸.]

[내가 막말로, 지금 그런 것도 아니고 이전에 있었던 과거 일인데 이렇게 당신에게 비난받을 일이야?]

[제발 나와 대화 좀 해. 정말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단 말이야.]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기를 미간을 찌푸린 민우가 노려보았다.

세아에게서 메시지와 전화가 연이어 오고 있었다.

주말, 아버지 차 회장을 만나고 온 뒤 민우는 계속 세아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호텔에서 계속 지내는 것은 당연히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집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차 회장의 방에서 보았던 문서들이 눈앞에 빙글빙글 돌았다.

아직은 세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진실을 듣는 것도, 그렇다고 거짓을 듣는 것도 준비가 안 되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보내자 점점 더 피폐해지는 자신이 느껴졌다.

거울을 보자 거칠고 어두워진 얼굴에 퀭한 눈빛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회사에는 나갔다.

뭐라도 해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미팅에 참석해 팀원의 발표를 듣는데, 회의실 밖으로 지나가는 지연이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기분이 좋은 건지…….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눈부셨다.


 
이제는 끝난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아름다워지는 지연을 보면, 그때마다 못내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너와 잘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너무 늦은 걸까?’

‘너는 나에 대해 이미 다 지운 걸까?’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무님, 그래서 이 부분은 오늘 승인이 되어야 합니다.”

“…….”

“상무님? 상무님?”

“……아, 지금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 한번 설명해 주겠습니까?”

결국, 회의 내내 지연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 회의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그냥……. 지금은 더도 말고, 얼굴만이라도 잠시 보고 싶었다.

착하고 순한 은지연은 왠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 리는 절대 없겠지만.

무심결에 자신도 모르게 메신저에 쓴 한마디.


[보고 싶다, 은지연.]

실수로 메시지를 보냈지만, 굳이 지울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마음이 그러니까.

지연은 메신저를 읽은 듯했지만, 역시 답장은 없다.

충분히 예상했던 그녀의 반응.

울컥하는 짜증스러움이 마음 한편에 올라왔지만 아무 곳에도 표현할 수 없으니 더 힘들었다.

똑똑-


“상무님, 오늘 6시 S&G 김우식 전무님과의 저녁 약속 전에 기흥 공장에 들르시려면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나가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미뤄둘 수만은 없으니, 세아와도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게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우리 둘 모두에게 마무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기흥에서 올라오는데 도로가 예상보다 훨씬 막혀, 공장에서 일찍 나왔는데도 길에서 예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김우식 전무님 쪽에는 연락해 두었습니다. 지금 가면 30분 정도 지연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비서의 얘기에도 시큰둥하니 대답하며 멍해 있는 차민우였다.

다행히 서울에 다다라서는 길이 뚫려 약속 시각에서 15분 정도 늦게 도착하였다.


“그럼 말씀 끝나시면 전화 주십시오. 문 기사님과 함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고, 강 대리는 들어가세요. 문 기사님만 대기해 주시고요.”

허리 숙여 인사하는 비서를 뒤로하고 차민우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안내된 장소로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김우식 전무가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무님. 예상보다 차가 많이 막혔습니다.”

고개 숙여 민우가 사과의 말을 하자 김 전무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비서분에게서 미리 연락받아서 나도 이제 막 도착했네. 그나저나 차 상무, 오랜만이야. 우리 얼마 만인 거지? 어서 앉아서 내 잔 받아야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득히 채워지는 자신의 잔을 바라보며 민우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전무가 말술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은 피곤해서 그런지 술이 그다지 당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약속 시각보다 늦은 데다 투자 관련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라 장단을 맞춰야만 했다.

채워진 잔을 비우자마자 바로 다음 잔이 채워졌다.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잔을 채우는 김 전무를 보니, 동이 터야 이 만남이 끝이 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오랜만인데 오늘 밤새 이야기 나눠보자고! 준비됐지?”

“네, 전무님. 좋습니다.”

 

***



“지연아, 지연아.”

“네, 말씀하세요.”

“지연아, 내가 미친놈 같겠지만……. 나 요즘 후회하고 있다.”

“후회요?”

“너를 보낸 거……. 너무 후회된다.”

“괜찮아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정말 괜찮아요.”

지연이 그녀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차가운 손으로 넘겨주자, 민우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는 이런 편안함을 이전에는 몰랐을까? 왜 나는 너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

그대로 그녀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그녀의 향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지연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난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백합의 향이 너무 매혹적이다.


“그리웠어, 네 품. 너무 그리웠어.”

“…….”

“지연아……. 나 밀어내지 마. 제발 밀어내지 마.”

너무나 달콤한 그녀의 향기에 민우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전히 자신의 머릿결을 넘겨주는 그녀의 손길에 민우는 마음을 참기가 어려워졌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민우는 단숨에 지연의 품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민우를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

삐빅삐빅- 삐빅삐빅-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호텔 천장이 보였다.

고급 이불에 푹 잠겨 있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다.

민우는 일어나 앉자마자 깨질듯한 편두통에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윽…… 머리야. 도대체 어제 몇 시까지 마셨던 거야.”

주는 대로 마시기는 했는데 얼마만큼 마셨는지, 몇 시까지 함께 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약속 시각에 늦은 데다 김 전무에게 부탁해야 할 주제가 있던 민우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60대였지만, 평소 체력관리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김 전무였고, 평소 몸에 좋다는 걸 많이 챙겨 먹는지 민우보다 체력이 좋은 것 같았다.

핸드폰을 보자 아직 여섯 시로 늦게 일어난 건 아니었다.

창밖으로 이제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약이라도 사 먹어야 하나. 하……. 머리가 정말 깨질 것 같네.”

지끈거리는 두통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그런 꿈까지 꾸어서 기분이 더욱 좋지 않았다.

은지연이 꿈에까지 나오다니……. 자신이 정말 미쳐가는 것 같다.

달칵-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오던 찰나, 샤워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라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두 눈이 커졌다.

샤워실에서 나온 것은 강지현 대리, 그의 비서였고, 방금 샤워를 했는지 샴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강지현 대리. 어째서 거기서 나오는 건지…….”

깨어 있는 민우를 마주한 강지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우가 어이없다는 듯 물어보자 지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표정이 얼굴 한가득 실렸다.


“상무님. 그……그게 말이죠.”

 

***

강지현은 민우가 퇴근하라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모셔다드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문 기사와 함께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최근 들어 차민우의 기분이 매우 안 좋았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왠지 그가 멀쩡하게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문 기사 역시, 만약 민우가 취했을 때 본인 혼자 데려다주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지현이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2시간 정도 후에 김 전무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민우 상무님이 많이 취하셨어요. 아무래도 부축해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전무님은 제가 먼저 모시고 가겠습니다.”

연락을 받고 안내된 장소로 들어가자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어 있는 차민우가 보였다.


“상무님, 차민우 상무님.”

많이 취했는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아무리 불러도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문 기사와 함께 그를 부축해 요즘 머무르고 있다는 호텔 방으로 어렵게 옮겨왔다.

다행히 그의 지갑을 열자 카드로 된 방 열쇠가 바로 보였다.


“아이고, 이런 일이 많이 없으신 분인데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드신 거야.”

침대에 힘겹게 민우를 눕히고는 문 기사가 투덜거렸다.


“문 기사님. 제가 마무리하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아무래도 새벽에 드실 숙취해소 음료는 사다 놔야 할 것 같아요.”

“그럴래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오늘 운전을 오래 해서 몇 시간이라도 제대로 자야 내일 시간 맞춰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잠시 고민하던 문 기사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숙취해소 음료만 사 놓고 바로 갈게요. 얼른 들어가셔요. 수고 많으셨어요.”

“그래요, 그럼 대리님도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요. 먼저 가서 미안해요.”

혹시라도 차민우가 깨어 뭔가를 더 할세라, 문 기사는 재빠르게 방에서 빠져나갔다.

강지현은 우선 민우가 입고 있는 불편해 보이는 겉옷과 신발만 좀 벗겨 놓고 음료를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의 팔을 들어 올렸다.

몸이 늘어져 있어 그런지 겉옷 하나 벗기기도 쉽지 않아 지현은 낑낑거리며 어렵게 재킷을 벗겨내고 있었다.

겨우 한쪽 팔을 재킷에서 빼내고 다른 쪽 팔을 드는 순간 민우의 손이 지현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어맛!”

끌어 당겨져 함께 침대에 누워 마주 보는 자세가 되어버린 불편한 상황.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몇 번 껌벅이고는 자신을 불렀다.


“지연아, 지연아!”

“네, 말씀하세요.”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민우의 부름에 지현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지연아, 내가 미친 것 같겠지만…… 나 요즘 후회하고 있어.”

“후회요?”

“너를 보낸 거……. 너무 후회된다.”

그렇게 말하더니 지현을 끌어당겨 그녀의 무릎 위로 머리를 대고는 좌우로 비비적댔다.

지현의 느낌상…… 민우의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다 큰 남자가, 이렇게 멋지고 다 가진 남자가, 세상 누구보다도 처량하게 자신을 보며 말하는데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평소에도 차민우를 멀리서 흠모하고 있었기에 그의 비서 자리가 육아휴직으로 빈다고 했을 때 바로 지원을 하였다.

그와의 어떤 미래를 꿈꾼다든가 하는 허황한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그를 가까이서 보고, 함께 일해보고는 싶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처량하게 이야기하는데 왠지 다 받아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주고는 민우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에게 뭔가 너무 힘든 일이 있는 것 같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내용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주어 그를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다.


‘상무님 잠들 때까지 잠시 함께 있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찰나, 민우가 갑자기 지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더욱 깊게 그녀의 품에 안기더니 곧 그녀의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아……. 너무 좋다 지연아. 그리웠어, 네 품. 너무나도 그리웠어.”

“…….”

너무 갑작스러운 민우의 행동과 말에 지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그가 애처로워 그의 머릿결을 계속해서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 뿐.

갑자기 민우가 그녀를 눕히면서 그녀에게 얼굴을 내렸다.


“지연아……. 나 밀어내지 마. 제발 밀어내지 마.”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지현은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만이야. 단 하루, 오늘만. 이 사람은 내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러고는 지현이 두 팔 벌려 민우를 끌어안았다.


“밀어내지 않아요.”

오늘 밤은 그냥 나만의 비밀로…….

***

차민우와 강지현이 마주친 서로를 보며 놀라고 있는 사이, 민우의 핸드폰에는 전날 밤 읽지 않은 메시지 마크가 깜빡이고 있었다.


[민우 씨. 나 임신했어. 우리 아기라고. 이거 보면 빨리 연락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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