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인생은 우연의 연속 (37/85)


37. 인생은 우연의 연속
2022.12.05.



 


“충식아, 우리 출발하기 전에 차 한잔하면서 얘기 좀 하자. 시간 괜찮지?”

“……그래. 그래야지.”

보는 눈들이 있어서 지연은 충식과 회사 내에 있는 커피숍이 아닌 회사 밖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전날 예상치 못한 충식의 깜짝 고백을 들었기도 했고, 둘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오늘은 오후 내내 충식과 함께 SOO 작가와 미팅이 있었다.

그 미팅에는 강현도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미팅 전에 이야기를 마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선……. 내가 먼저 말할게, 지연아. 어제 내가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을 해서 미안해. 고백하더라도 그렇게 성의 없이 이상한 말 해대면서 하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이 너무 성급했어. 사과할게.”

자리에 앉자마자 충식이 머리 숙여 사과했다.

사과를 받으려고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기에 지연은 충식의 말에 당황했다.


“충식아……. 이러지 마. 네가 왜 사과를 해.”

“아니야. 사과하는 게 맞아. 그렇지만, 사과와는 별개로…… 내 마음은 진심이야 은지연. 결코, 쉽게 생긴 마음도 아니고 한순간 지나갈 마음도 아니야.”

알고 있다.

자신의 친구 권충식은 누구를 쉽게 보지 않는 사람, 또 쉬운 마음으로 감정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

“너에게 내 마음을 받아 달라고 하지 않을게. 그리고 나를 좋아해 달라고 하는 말도 아니야. 하지만 너를 간단하게 포기하기는 어려워. 이 마음이 생긴 것은 꽤 오래되었고…… 또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감정이야.”

지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그의 두 눈에 다양한 감정이 울렁이는 듯했다.

아픔, 슬픔, 사랑, 절망.


“충식아. 우선……. 나를 좋아해 주는 네 마음, 고마워.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감사해.”

지연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참 좋은 사람. 이런 그의 소중한 마음을 다른 좋은 사람이 받았어야 했는데.


”네 마음은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그건 내가 뭐라 할 수 없어. 다만 네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마음에 답해 줄 수는 없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내 마음이야. 그건 알지?”

진해진 괴로움이 담긴 표정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 충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어.”

“나……. 너를 계속 내 친구로, 친한 친구로 생각해도 돼? 이건 너무 내 이기적인 생각일까?”

“아니야. 우린 여전히 친한 친구야. 그렇게 생각해 줘. 나는 너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찐 우정의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해.”

충식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데 왜 그리 슬퍼 보이는 건지…….

지연은 마음이 아파왔지만 티 내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나는 너를 앞으로도 5인조, 내 찐 우정의 남사친 권충식으로 볼게. 이런 나의 행동에 네 마음이 어렵다면 언제든지 알려줘.”

“알았어. 걱정하지 마. 앞으로 저번과 같은 추태를 부리지 않을게.”

“추태까지는 아니었고……. 꼰대 아저씨 같은 발언이었어.”

지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곧 충식도 따라 웃었다.

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SOO 작가와 처음 만나기로 한 원 테이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충식이 미팅을 위해 예약한 곳은 아트 갤러리와 함께 있는, 예약하면 딱 한 테이블만 예약을 받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벤트나 프러포즈, 혹은 기념일 장소로도 SNS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 너무나도 유명한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예약이 됐어?”

“아는 분 통해서 사정사정했지. 그리고 다행히 우리 미팅이 낮이라 가능했어. 이따 여섯 시 전에는 나가야 해. 그다음에 또 예약이 있는 것 같아.”

“여기 너무 예쁘다.”

실내 정원처럼 다양한 화초들이 가득 차 있었고, 바닥에는 잔디까지 심겨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신진 작가들의 유화가 놓여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사랑을 속삭여도 좋겠지만, 오늘처럼 작가와 처음 만나는 것도 매우 좋은 생각이었다.


“충식이 센스 넘치는데?”

“고맙다. 칭찬해 줘서.”

충식은 지금 웃고는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지난밤이 생각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 아파져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연을 잃을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좋아하는 여자이기도 했지만, 또한 너무나도 사랑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지연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네 마음이 허락하는 순간까지는.


“약속 시각까지 몇 분 남았지?”

“대략 10분 정도? 본부장님은 몇 시에 오신다고 하셨어?”

충식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마 2-30분 내로 오실 거야. 이렇게 안 오셔도 될 텐데……. 이번 제품 협업이 너무 좋았나 봐. 광고도 엄청나게 기대하고 계시더라고. 광고에 꼭 SOO 작가님이 직접 나오게 하고 싶다고 의욕에 불타시던데.”

“그러면 좋지. 나도 너무 궁금하다. 드디어 베일을 벗는 비밀의 작가라니…….”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레스토랑의 문이 열렸다.

SOO가 도착한 것 같았다.


“드디어 도착했나 봐!”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중간 문을 열고 당사자가 들어오자 충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20대 중후반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SOO 작가는 30대라고 들었는데 만약 그녀가 맞는다면 굉장히 동안인 얼굴이었다.


“혹시……. SOO 작가님이신가요?”

지연이 어색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은지연 씨?”

“네, 맞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C&C 기획실 은지연 과장입니다.”

“SOO예요. 반가워요. 한국 이름은 권지수니까 한국 이름으로 불러도 좋아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주변까지 밝게 만드는 미소였다.


“충식 과장님, 과장님! 인사 나누셔야죠.”

지연이 충식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충식이 인상만 찌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연이 대신 소개를 하려 하였다.


“이분은 저희 팀…….”

“이안, 아니 권충식. 내 동생을 여기서 만나다니. 진짜 세상 좁아. 웬일이야, 진짜. 왓 어 서프라이즈!”

‘뭐라고?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충식이가 SOO 작가님 동생?’

지연은 SOO의 말을 듣고도 어리둥절하였다.


“넌 오랜만에 누나 만났는데 인사도 제대로 안 해? 누나가 너 그렇게 키웠어?”

갑자기 SOO가 충식의 등짝을 짝- 하고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충식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누나한테 눈을 부릅뜨고 대들어? 한 대 더 맞아야 정신 차리지?”

짝-

다시 한번 찰지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는 소리가 레스토랑 안을 채웠다.


“아야! 미쳤어 누나? 지금 5년 만에 동생 앞에 나타나서 이게 무슨 행패냐고!”

자신이 모르는 얘기를 하며 충식과 SOO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지연이 어리둥절하며 서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서서 듣고 있다 더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둘을 말렸다.


“저……. 죄송하지만, 오늘 작가님과 여러 가지 협의도 해야 하기 때문에요. 두 분 잠시 진정을 해주세요.”

지연이 한숨을 푹 쉬면서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개인사는 일에 전혀 중요하지는 않지만, 두 분의 대화를 살짝이라도 이해하려면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혹시 SOO 작가님이 충식 과장님의 친누나이신 건가요?”

“네, 제가 충식이 누나예요. 5년 만에 만나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냥 지수라고 불러주세요. 저희끼리 있을 때는. 권지수.”

“아…… 네.”

지연이 또 어색해하며 충식을 쳐다보았다.

친누나를 5년 만에 만나는 게 말이 돼? 거기다 이렇게 극적으로?

충식의 씩씩대는 표정을 보니…… 가능한 듯싶었다.


“제가 일에 집중하느라, 그리고 좀 바빠서 연락이 뜸했더니 저렇게 삐졌나 봐요. 제가 엄마와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연락이 뜸해? 5년을 뜸하다고 하냐?”

충식은 어이없다는 듯 지수를 노려보았다.

이대로라면 작업 이야기를 전혀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충식 과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나만 남아서 권지수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 과장님은 먼저 들어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리고 곧 본부장님도 오실 텐데 이렇게 흥분해 있으면 어떡해.”

지연이 사태를 정리하고자 이야기하자 충식이 퍼뜩 생각난 듯 지연에게 말했다.


“빨리 본부장님에게 전화해서 오지 마시라고 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빨리! 내가 이따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어서 문자 좀 남겨. 일정 미뤄졌다고!”

“충식아, 그건 안 돼.”

“아…… 씨. 내가 할게!”

충식이 다급한 듯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충식의 전화를 받으며 강현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강현은 안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더니 들어오다 멈칫하였다.

조금 전까지 해맑게 웃고 있던 지수 역시 강현을 마주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라고 있었다.


“강현……아. 강현아!”

강현의 이름을 부르던 지수가 그에게 뛰어가더니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연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아……. 이래서 강현 형 못 오게 해야 했는데.”

충식이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흔들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거 놔, 권지수. 이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름답게 뛰어가 자신을 안은 지수를 보며, 강현이 그녀의 팔을 풀어내고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밀쳐버렸다.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없는 이 상황에, 지연이 헛기침을 하더니 강현을 향해 말했다.


“오셨어요. 본부장님. 여기…… 이분은, 저희와 같이 작업하실 SOO 작가님이십니다. 그리고, 왠지 저보다는 세 분께서 서로를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맞을까요?”

지연의 물음에 셋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지수가 입을 뗐다.


“개인사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저와 업무를 진행하시려면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짧게 말씀드릴게요, 지연 과장님. 괜찮죠?”

“네, 부탁드립니다.”

“아까 보셨듯이, 충식이는 제 친동생이에요. 서로 연락 없이 지낸 지 5년 좀 넘었고…… 얼굴 본 지도 5년 만이고요. 뭐 남매가 그다지 친할 일도 없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죠.”

“아…….”

“그리고 강현이와 저는…….”

권지수가 말을 하는 와중에 강현이 갑자기 끼어들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예전에 사귀었던 사이고, 헤어진 지 5년 됐습니다. 얼굴도 5년 만에 본 거구요.”

강현은 뱉어내듯 말했다.

그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아 보였다.


“헤어지지는 않았지, 우리. 헤어지자는 말은 안 했었어. 그냥…… 서로 못 본 지 5년이 된 거지.”

지수가 생글생글 웃었다.


“우리 항상 만났다 안 만났다 했었잖아, 강현아. 이번에 한국 온 것도 너 만나려고 온 거야, 나.”

순진무구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지수가 강현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다니!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말이 돼?”

그런 그녀를 강현은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쳐다보았다.


 


“권지수. 네 멋대로 관계를 끊었다 이었다 하지 마. 운명? 진짜 웃기지도 않는군. 우린 끝났어, 5년 전에. 그리고 네가 그 작가인 줄 알았다면 난 여기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야.”

“미워하는 감정이 있는 것도 아직 감정이 있는 거야, 강현아.”

지수는 옆에 지연과 충식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말을 했다.

그런 그녀를 보는 강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짜증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다.


“하……. 그만하자. 너와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오늘 하기로 했던 회의는 나중에 따로 은지연 과장과 함께하도록 해. 오늘 일정은 취소하기로 하지. 그리고 은지연 과장님, 잠시 저 좀 보시죠.”

강현의 목소리가 살얼음이 언 것처럼 차가웠다.

말을 마친 강현은 바로 등을 돌려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