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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네가 나를 알아가듯, 나도 너를 알아간다 (38/85)


38. 네가 나를 알아가듯, 나도 너를 알아간다
2022.12.08.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지연은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강현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조심스레 살펴본 강현의 얼굴에 큰 표정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눈빛의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된 지연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연 씨, 이 이야기가 간단하게 전하거나 끝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괜찮다면 저녁에 시간 좀 내주겠어요?”

“네, 알았어요. 그럴게요.”

“일부러 이야기 안 한 건 아니에요. 당연히 작가가 누군지 몰랐기도 했고, 그전에 있었던 일이 너무 오래돼서 이야기 안 한 것뿐이에요. 이 일에 대해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깊은 한숨을 쉬던 강현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오해하지 않아요, 강현 씨.”

지연이 정말 오해하지 않는다는 듯 일부러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야기해 준다고 했으니, 기다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현은 지연을 말을 듣고도 걱정된다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작가님과의 협업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오래전이지만 그가 기억하는 권지수의 성격이 그렇게 쉬운 성격도, 그리고 일반적인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밝게 이야기하는 지연이 더욱 염려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이었고……. 지연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겠지만, 혹시 마음이 어렵다면 담당 업무를 변경하는 것도 고려해 봐요.”

강현이 알고 있는 지연은, 어떤 상황을 곡해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이런 걱정 따위 안 할 것 같았지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괜찮을 것 같아요. 저 일할 때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거든요.”

지연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제가 미팅 잘 마무리하고, 따로 보고드리도록 할게요, 본부장님.”

“알겠습니다.”

강현을 보내고 다시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지연은 냉랭한 분위기의 충식과 권지수를 마주하고 앉았다.

말을 하기에 앞서 지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우선 권지수를 향해 몸을 돌려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작가님, 우선…….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저희가 함께 약속하고 시작해야 할 내용이 있어서 말씀드려요.”

“네, 말씀하세요.”

“정말 신기한 우연으로 프로젝트 함께하는 분들이 작가님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네요. 하지만 저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작업의 결과물인지라 이 프로젝트를 하실 때는 개인적인 부분은 잊고 프로젝트에 전념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이고, 팀으로도 더욱 그러므로 성공적으로 프로젝트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권지수가 지연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너무 당연한 건데 이 상황에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저에게도 이 프로젝트는 너무 중요해요. 꼭 멋지게 완성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권충식 과장님.”

이번에는 지연이 고개를 돌려 충식을 향해 말했다.


“과장님도 개인적인 부분은 묻어 두시고 업무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게 어려우시다면 팀 미팅을 통해 업무 조율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업무 조율하시는 게 좋을까요?”

조금은 냉정한 어투인 지연의 말을 듣는 충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찌 보면 너무 어린애 같은 행동을 그녀에게 보인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개인적인 만남을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 모인 것임을 잠시 잊고 어설프게 행동한 것이다.


“아닙니다. 개인적인 부분은 모두 잊고 업무에 집중하겠습니다, 은지연 과장님. 모자란 모습 보여 죄송합니다.”

충식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존댓말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두 분 모두 긍정적인 답변 주셔서 감사해요. 여러 생각이 머리에 많으시겠지만, 프로젝트 진행 일정이 무척이나 빡빡하여서 오늘 꼭 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회의 시작하려고 하는데 두 분 모두 괜찮으실까요?”

권지수와 충식,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직하고 단호한 지연의 말에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둘은 강하게 받았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광고 콘셉트에 어떻게 작가님 작품을 표현하고 싶으신지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그리고 1차 제안서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광고 직접 출연 가능 여부도 논의하고 싶습니다.”

셋은 조금 전까지 달아올랐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힌 뒤, 노트북을 켜고 협업 부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약 2시간의 미팅을 끝낸 뒤 자리를 정리하며 지연이 지수에게 물었다.


“광고에 활용될 작가님 작품 확인을 위해 며칠 내로 작가님 임시 스튜디오에 찾아뵈려고 합니다. 연락처와 주소를 공유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지수가 바로 핸드폰으로 몇 가지를 확인하였다.


“은지연 과장님, 이메일로 방금 주소와 연락처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도 물어볼 것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강현…… 아니, 본부장님 연락처를 받았으면 좋겠는데요.”

해사하게 웃는 지수가 핸드폰을 내밀며 지연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본부장님 개인 연락처를 본인 동의 없이 제가 함부로 전달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작가님께서 물어보셨다고 말씀은 드려 볼게요.”

지연은 최대한 평온한 얼굴을 하려 노력했다.

눈에 띄게 실망하는 지수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었다.


“음…… 알겠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꼭 말씀 부탁드려요.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다고 같이 전해주시면 더 좋구요. 그럼…… 우리 오늘 일정은 모두 끝난 거죠?”

‘반드시 알아야 할 일…….’

지수의 알쏭달쏭한 말이 더한 궁금증을 일으켰지만 지연은 애써 머리에서 지우려 했다.


“네, 끝났습니다.”

“그럼, 이안…… 충식이 너 나 좀 잠깐 보자.”

지수의 말에 충식이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연 과장님, 먼저 들어가요. 나는 누나와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요. 늦지는 않을 거고.”

“그래요, 과장님. 얘기 잘 하고 와요.”

둘을 레스토랑에 남겨두고, 회사로 돌아가는데 머리가 점점 아파져 와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고,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SOO 작가가 충식의 누나라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강현의 전 여자친구라니!

사실 누구나 사귀는 사람의 전 연인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을 일이었기에 지연의 마음은 사실 착잡했다.

그리고 아까 얘기하는 걸 보면 권지수는 강현에게 아직 마음이 있는 듯 보였고.

하지만 지연은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바로 이 안 좋은 마음을 지웠다.

자신은 결혼도 했었고, 전 남편이 강현과 동료인 데다, 그 이야기를 강현에게 모두 하고서 이해를 바라놓고는.

자신은 아직 강현의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않고 이 짧은 상황만 보면서 기분 상해하고 있다니……. 갑자기 자신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하……. 은지연, 너 왜 이렇게 못됐니. 네 이야기는 들어주길 바라고 이해를 바라면서,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은 듣지도 않고 뭐 하는 거야. 부끄러운 줄 알아.’

아무도 이런 지연의 마음을 몰랐지만, 지연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멀었구나, 나는…….”

오늘은 강현과 만나기 위해 업무를 싸 들고는 사무실에서 일찍 빠져나왔다.


[지연 씨,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만날까요? 8시?]

[좋아요. 시간 맞춰 갈게요.]

8시에 딱 맞춰 도착해 강현의 집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와요.”

강현이 웃으며 지연을 맞았다.

다행이었다.


‘낮에 헤어졌을 때처럼 불편한 기색으로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저녁은요?”

“아직이요. 사실 좀 배고파요.”

“그럼 내가 얼른 간단한 거 만들어 줄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고마워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가져왔다.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었더니 조금은 긴장했던 지연의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친구가 만들어 주는 밥이라니……. 매번 먹을 때마다 참 좋다.’

몇 달 전만 해도 민우의 입맛에 맞는 식사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큰 일 중의 하나였던 걸 생각하니 소소한 이 행복이 너무 소중했다.

지연이 식사를 마치자 강현이 바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권지수와는 학생 때 만났어요. 사귀었다가 헤어지기를 몇 번 반복했었죠. 충식도 그녀와 사귈 때 그녀의 동생으로 알게 된 거였고.”

강현이 준비해준 따뜻한 허브차를 천천히 마시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헤어짐의 이유는 항상 그녀의 잠수였어요. 갑자기 사라져서는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씩 사라졌었죠. 나중에 돌아와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며 핑계를 늘어놓았고, 저는 또 그걸 받아주곤 했구요. 저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때는 그녀의 돌아옴이 반갑게 느껴졌었으니, 많이 좋아했었나 봐요.”

“…….”

“권지수, 그 사람은 너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림을 그린다며 갑작스럽게 해외로 떠나기도 했고, 다른 주로 이사를 가기도 했어요. 항상 나보다는 그녀의 작업이 더 우선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죠. 그런데, 난 그런 건 맞지 않았거든요. 사귀는 사람이라면 서로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강현 씨 마음, 충분히 이해돼요.”

“그러다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때가 5년 전이었는데, 그때도 역시나 갑작스럽게 사라졌죠. 사전 연락도, 이야기도 없었어요. 또 며칠 아니면 몇 주 어디를 갔나 보다 했는데……. 연락도 없고 몇 주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릴 마음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어요. 이렇게 서로에게 배려 없는 관계는 이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했었기 때문에, 제 마음은 거기에서 잘라냈습니다.”

무덤덤하게 모든 이야기를 한 강현이 걱정스러운 듯 지연을 쳐다보았다.


“낮에 많이 놀랐을 텐데……. 제 이야기 듣고 더 놀란 건 아니죠?”

“아니에요.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고마워요. 지금의 나에게 권지수는 그냥 남이에요. 미움도, 좋음도 없는. 그냥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 아까는 그녀의 말에 짜증이 난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강현이 지연의 손을 잡고는 손바닥에 입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것도 숨길 생각 없어요. 관계도 없는 남인 사람 때문에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도 않구요.”

“숨기지 않아 고마워요. 그리고 나도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될게요.”

“당신을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관계가 서로를 더 충만하게 만들기를 바라요. 물론 내가 질투심이 많은 걸 이번에 깨달았지만. 이런 격하고 갑작스러운 감정은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어서 나도 놀랐어요. 조심할게요.”

“사귀는 사이에 다른 이성이 끼어들면 질투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강현 씨 얘기 듣고 저도 살짝 질투심이 생겼는걸요?”

“어떤 부분에요?”

“그냥……. 좀 더 이전의 당신을 알고 있는 권지수 씨에게?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괜스레 그런 마음이 드네요. 웃기죠. 그런데, 그만큼 당신을 좋아하게 됐나 봐요. 과거에 질투한 걸 보면.”

“음……. 그건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데. 좀 더 질투해 줘도 좋아요. 과거든, 현재든. 내가 다 풀어줄게요.”

“어떻게요?”

“이렇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지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하하하, 이렇게 풀어주는 거면 더 질투해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지연도 강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사람이 강현 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남자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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