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왜 하필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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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왜 하필 지금이야
2022.12.12.
민우는 정량보다 더 많은 두통약을 먹어도 여전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약으로도 해소가 안 되니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두통은 여전했다.
‘하……. 진짜 머리가 깨질 듯 아프네. 도대체 뭘 해야 머리가 개운해질는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하지만 민우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건 숙취 때문만은 아니란걸.
오전 회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거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전 내내 정신이 없었다.
강지현과의 일이 신경 쓰여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강지현이 뭐라고 했더라…….’
***
“가……강지현 대리. 어째서 거기서 나오는 건지……?”
민우의 채근에 지현의 당황한 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게……. 상무님, 어제 많이 취하셔서 제 옷에 구토하셨었거든요. 도저히 입고 갈 상태가 아니었어서 호텔에 세탁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여기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세탁된 옷을 받아서 이제 막 갈아입고 가려고 했습니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상무님.”
“잠깐, 강지현 대리, 강지현…….”
지현은 자신의 말만 다다다 쏟아낸 뒤, 민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의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가 구토해서 옷을 세탁했다고? 그래서 여기서 밤을 보냈다고?”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변명에 민우는 머리를 거칠게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때, 알았다.
강지현의 깜찍한 거짓말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상태를 알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분명 나는 저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냈어.’
샤워기의 물을 틀어 놓고는 멍하니 물줄기만 바라보며 어젯밤을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희미하기만 한 기억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은지연이 나왔던 꿈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하지만,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그게 강지현과 있었던 일들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지현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간 걸 보면 그녀도 없던 일로 하려는 게 분명했다.
자신도 원하는 바였다.
의도하지 않은 인연은 더는 맺지 않아야 했다.
“하아……. 이게 무슨 난리야, 차민우!”
세찬 물줄기 아래에서 소리쳐 보았지만 공허한 울림만 있을 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멍하니 있게 되었다.
아까 출근할 때도 그렇고 조금 전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도 그렇고, 일부러 자리를 피한 건지 강지현을 만나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는 스피커폰을 눌렀다.
이렇게 피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명확하게 마무리를 해야지.
Rrr- Rrr-
“네, 상무님.”
강지현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잠시 들어오시죠.”
“네, 알겠습니다.”
똑똑-
노크한 강지현이 민우의 사무실로 바로 들어왔다.
“앉으세요.”
고개를 끄덕인 지현이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강 대리,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은데…….”
“신경 쓰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저는…… 서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띄게 당황하며 빨개진 얼굴로 지현이 대답했다.
“서로의 실수라, 그래 실수지. 나는 하나도 기억도 안 나는 실수. 강 대리는 도대체 제 방에는 왜 온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제가 분명 먼저 퇴근하라고 했는데 굳이 제 방까지 따라서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묘하게 지현을 채근하는 목소리였다.
마치 ‘내가 시키지도 않은 행동을 해서 왜 이 사달을 만들었냐’라고 채근하는 것처럼 들렸다.
“상무님……. 저는 아무 의도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문 기사님께서 혼자 상무님 모셔가기에는 어려우실 것 같아서 남았던 것뿐이고, 그 이후 일들은 말씀드린 것처럼 우연히 일어난 실수입니다.”
그녀를 노려보는 민우의 눈빛에는 냉정함과 비난만이 묻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지현은 억울함에 울컥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지현이 말했다.
“다시는 주문받지 않은 행동,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은 죄송합니다. 저 이만 가봐도 될까요?”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린 민우가 그녀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지현은 묵례를 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억울하고 수치스러워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강지현이 부디 아무 문제 안 일으켜야 할 텐데…….’
이 와중에 세아가 어젯밤에 보낸 문자를 발견하고는, 환멸감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왜 하필 지금이야 정세아. 왜 하필 지금!
민우는 오늘도 연락이 안 되면 회사로 찾아오겠다는 세아를 만류하고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들어가십시오, 상무님.”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마주친 강지현은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괜스레 신경 쓰였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녀가 아니더라도 신경 쓸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왔어요? 저녁 좀 일찍 먹으면 좋을 것 같아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 좀 하고 있어요.”
향은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였지만, 전날의 과음과 오전의 스트레스로 속이 부대꼈다.
오히려 지금 뭔가를 먹으면 죄다 토해낼 듯한 기분이었다.
“잠깐 멈추고 얘기 좀 해.”
“금방 다 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하아……. 지금 얘기하자고. 지금 음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짜증이 가득 섞인 민우의 외침에 세아가 굳은 표정으로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내가 뭐에 화가 난지는 알아?”
“정확하게 모르겠으니 설명해 줘요. 나도 다 사정이 있었어요. 당신에게 모두 설명하고 싶어요.”
“하! 내가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고?”
“정확하게 말해줘요, 다 설명할게요. 자꾸 뭉뚱그리지 말고요.”
세아는 눈치를 보거나 기가 죽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당당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
“넌, 날 기만하고 나를 만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났어. 그 증거들을 똑똑히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고.”
“당신은 나보다 당신 아버지나 당신과 일면식도 없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렇게 말하네요.”
세아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민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과 헤어져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을 안 만났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만나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건 잘못된 정보예요. 난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기간이 겹치는 사람은 당신과 만나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그 사람이 매달렸던 것뿐이고요.”
너무 당당하게 말을 하니 그녀의 말이 마치 진실인 듯 들렸다.
하지만 이제 민우는 그녀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차승조 회장의 조사 내용을 보면서, 예전에 모친 강주란이 그 앞에 가져왔던 사진들과 정보들도 퍼뜩 떠올랐다.
세아를 싫어하는 차 회장과 강주란이 가져온 그 정보들이 모두 100%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됐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차민우 역시 돈과 권력이 있는데, 그 앞에 엉터리 정보만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난 이제 네 말을 못 믿겠어, 정세아. 믿음이 안 간다고.”
“좋아요. 믿지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당신 앞에 펼쳐 보일 수도 없고. 혹여나 펼쳐 보인다고 해도 당신은 믿어주지도 않을 거고.”
세아가 눈도 깜빡거리지 않으며 강렬한 시선으로 민우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비난할 수 없어요.”
“뭐?”
“당신은 나를 비난할 수 없다고요.”
“왜지? 넌 나를 기만했는데 왜 내가 너를 비난할 수 없어?”
“하! 왜냐고요? 당신은 날 만나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한걸요.”
비명에 가까운 세아의 외침에 민우가 멈칫하였다.
“너무 사랑해서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당신은 나에게 1년만 참아달라고, 그 여자와 1년간 결혼하고 돌아오겠다고 나를 설득했었어요. 기억 안 나요? 내가 왜 사라졌었는데……. 어떻게 그걸 잊고 나를 비난할 수 있지,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했는지 모두 잊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당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다행이지.”
그녀의 말에 민우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나를 한 번도 잊지 못 했다면서도 그 3년간 그녀와 밤을 보냈잖아요. 안 그랬어요?”
비수같이 민우의 가슴을 후벼 파는 그녀의 말에 민우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말하고 나니 진짜 웃기지도 않네. 사귀던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1년간 그 꼴을 보고 있으라고 하더니, 막상 결혼하니 너무 좋았나 보지? 1년도 아니고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3년이나 함께 살다니. 하! 그러면서 그 여자가 끔찍했다고?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어요.”
세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를 자꾸 그 여자와 비교하면서 나를 비난하고, 비하했잖아요. 그러고는 이제는 조작된 나의 과거를 그대로 믿으면서 그 과거 때문에 나랑 살기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흥분한 세아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되었고, 화난 얼굴이 일그러져갔다.
“이제는 나를 다시 버리고 싶어요? 그래요. 마음대로 해요. 그 대신, 당신과 똑같이 태어난, 환영받지 못한 당신의 자식이 당신을 평생 비난하고 경멸하며 살 거예요.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온 세상에 다 퍼트릴 거야. 차민우가 어떻게 나를 버렸는지!”
결국 세아는 거의 소리 지르듯 말을 하더니 격하게 숨을 내쉬며 헉헉대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기, 자신과 세아의 아기가 생겼다고 했다.
하필 이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이 바닥을 치고 있는 이 시기에.
그녀의 외침을 듣고는 민우는 괴로움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나를 버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난 무섭지 않아! 우리 아기와 단둘이서 살아가면 되니까! 아니지, 지금이라도 당장 나갈까요?”
그렇게 말한 세아가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벽장 안에 있던 여행 캐리어를 꺼내더니 그 안에 옷을 던져 넣기 시작했다.
“정세아!”
민우가 따라와 세아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요즘 당신 나를 짜증 난다는 듯, 경멸하듯 보고 있었잖아요? 은지연은 다 했는데 너는 왜 못하냐면서?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러더니 이제는 아버님의 거짓말만 믿으면서 나를 못 믿겠다고 하는데 내가 왜 당신과 살아야 해? 이러려고 나를 찾았어요? 그냥 두지 그랬어! 그냥 나를 놔뒀으면 나도 당신 잊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왜 찾아내서 나를 이렇게 절망스럽게 하냐고!”
세아가 주저앉아 엉엉 울며 외쳤다.
세아에게 화가 났고, 이제는 사랑하는 마음보다 짜증이 더 앞서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이 다 틀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버렸었고, 또한 자신이 그녀를 다시 찾아왔다.
다른 누가 등을 떠밀거나, 강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었기에 더욱 숨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진정해. 그렇게 흥분하면 배 속의 아기에게 안 좋아.”
“지금 그게 중요해?”
“잠시, 우리 시간을 갖자. 나도 혼란스러워서 그래. 잠시만…… 내게 시간을 줘.”
양심을 푹푹 찌르는 정세아의 말에, 아까의 그 기세는 사라지고 급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방에서 나왔다.
정신적으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듯, 순식간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금은,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다 잊고 잠시 쉬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전날 밤 꿈에서의 은지연이 생각났다.
그 꿈에서 그녀는 그를 위로해 주고 모든 것을 받아줬었는데.
그때 모친 강주란에게 메시지가 왔다.
[다음 주 주말에 회장님과 함께 식사 좀 하자꾸나. 그날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회장님께도 중요한 자리니까 꼭 참석해야 하니 일정 잊지 않게 조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