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어째서 너만 이렇게 행복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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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어째서 너만 이렇게 행복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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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어째서 너만 이렇게 행복한 거야
2022.12.22.
지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티브에게 인사를 하며 스튜디오에 들어선 사람이 정세아라니.
하필이면, 이곳, 이 시간에 저 여자가 어떻게!
눈이 마주친 지연과 세아는 마치 얼어붙은 듯, 몇 초간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연 씨, 이제 이걸 잘라야 하지 않아요?”
옆에서 말을 거는 강현의 물음에 지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세아에게서 차분히 시선을 거둔 뒤 강현의 질문에 답하며 다시 요리에 집중하였다.
“아는 사람이에요?”
예민한 강현이 평소 같지 않은 지연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물어보았다.
“음……. 아니에요. 그냥, 알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신경 안 써도 돼요, 강현 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지연이 얼버무렸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연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강현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요리를 함께 배운다는 것은 예상보다도 더 즐거운 일이었다.
완성된 음식을 아직 맛보지 않았지만, 맛을 떠나서 함께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함께 고민하고 일을 나눠서도 해보고.
과정 자체가 즐거워 지연과 강현, 둘 다 수업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어머, 강현 씨! 강현 씨가 만든 쌈밥이 너무 커요.”
지연이 쌈으로 밥을 감싸다가 강현이 만든 것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우리 지연 씨 배부르게 먹여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그런데 너무 큰가? 음…….”
자신이 만든 성인 남자 주먹만 한 쌈밥을 이리저리 보면서 강현이 의아해했다.
다른 요리는 곧잘 하면서 한식은 어려워하는 강현에게 지연이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지연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와는 달리 세아는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은지연! 네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세아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세아 씨?”
스티브가 세아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연의 자리 뒤쪽 빈자리로 향하였다.
‘저 남자는 뭐지? 드디어 민우 씨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건가? 아…… 몰라. 은지연이 누굴 만나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 정신이 산만해졌다.
‘그나저나 웃기네. 민우 씨를 10년간 좋아했다면서 쉽게도 바뀌는구나. 이렇게 쉽게 마음 바뀔 것을 민우 씨와 내 사이를 알면서 그 난리를 피워?’
지연에 대한 짜증스러운 마음을 지우려고 머리를 흔들던 세아는 스티브 셰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말한 요리법대로 요리를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자신의 자리 앞쪽 테이블에서 요리하는 두 사람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본 중 가장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외모의 남자와 행복한 듯 웃으며 함께 요리하는 모습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저 계집애는 항상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이었던 차민우를 채가더니, 이제는 그보다 더 멋진 남자를 찾다니.
은지연. 너는 무슨 운을 타고난 거니? 세상의 모든 행운은 너에게 다 간 거야?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하면 뭐 해? 얼굴 보고 사귀는 것 같은데……. 얼굴 잘생긴 거 3개월도 못 가. 돈이 최고야. 너도 곧 후회할걸? 그나저나 저렇게 생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만나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지연을 시기하는 마음을 곱씹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민우 씨와 나는 지금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거라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힘들게 한 만큼 너도 힘들고 벌 받아야 해. 너는 절대 행복하면 안 돼. 좀 더 힘들고 비참해져야 하는데…….’
차민우와 자신의 사이에 지연이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쳤다고만 생각하는 세아였다.
그 결혼의 최종 선택은 결국 민우가 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는…….
은지연이 재료를 다듬으면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는 나머지를 요리하거나 정리를 하였고, 때때로 지연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한가득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두 눈에 담은 채.
꼴 보기 싫은 은지연이 눈앞에 있어 짜증 나는 데다, 그녀가 사랑받는 모습을 눈앞에서 라이브로 보게 되자 질투심이 세아의 심장을 새카맣게 물들여갔다.
‘웃지 마, 은지연. 웃지 말라고! 내 눈앞에서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이 웃지 말라고!’
저 남자가 번지르르한 별 볼 일 없는 남자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그저 은지연이 행복하게 웃는 게 너무 싫었다.
세아는 민우에게 저렇게 사랑을 받았던 것이 언제인지 너무 까마득해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작년 겨울, 차민우가 자신을 찾아냈을 때만 해도, 앞으로 남은 건 그의 사랑과 넘쳐나는 돈밖에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때만 해도 민우는 그녀가 하자는 건 다 했었고, 깨질 것 같은 귀한 보석을 대하듯 소중하게 대해줬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삐걱거리더니 이제는 이렇게나 서로를 비난하며 서먹한 사이라니.
그와 내가 남보다도 못한 사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 세아였다.
손으로는 요리 준비를 했지만,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거나 앞쪽의 지연과 강현을 쳐다보느라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그때 강현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지연의 뺨에 살짝 뽀뽀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쳐다보게 되니 알 수 없는 울분이 울컥 끓어올랐다.
‘왜 너만! 어째서 너만 이렇게 행복한 거야!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고! 나도!’
“아얏!”
날카로운 세아의 비명이 스튜디오 안에 울렸다.
온통 다른 곳에 신경을 쓰던 세아는 결국 칼에 손을 베고 말았다.
빨간 피가 도마 위로 톡톡톡 떨어졌다.
지연과 강현을 포함한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세아를 쳐다보았고, 옆쪽 커플에게 설명하던 스티브가 깜짝 놀라 세아에게 뛰어왔다.
“제가 회원님 도와줄 테니, 다른 분들은 조리하는 데 집중하세요!”
그는 곧 뒤쪽에 있던 구급상자를 가져와 세아의 손을 소독해 주고는 피가 배어 나오지 않게 처치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세아의 귀에 속삭였다.
“크게 베어서 물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이만하도록 해요. 오늘 수업은 따로 알려줄 테니 우선 위층 내 집에 가 있어요. 비밀번호 알죠?”
세아의 눈빛이 불안한 듯 잠시 흔들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서둘러 짐을 챙겨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연이 냉기를 담은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으음…… 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쇳소리가 날 것처럼 깔깔한 목 상태를 느끼며 눈을 뜬 민우는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프로젝트를 강현에게 넘겨버린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이른 저녁부터 바(Bar)에서 보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그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눈앞에서 그걸 강현에게 넘기다니.
아무리 자신이 조금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걸 도와주지 않고 냉큼 뺏어 남에게 돌려버린 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분명 차근우나 차재우, 김지원 여사의 자식들이 같은 상황에 빠졌었다면 이처럼 즉각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겠지.
‘어떻게 아버지가 나에게 이래.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강현에게 그걸 넘겨!’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더는 제정신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회의가 끝난 이른 저녁, 곧바로 바(Bar)로 와서는 식사도 하지 않고 혼자 들이부었다.
모든 상황에 화가 났고, 이 상황들을 잠시라도 잊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멀뚱히 천장을 쳐다보던 민우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생생히 기억이 나는 차민우였다.
***
프라이빗 바에서 혼자 들이붓다가 갑자기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어디론가 전화를 하였다.
Rrrr- Rrrr-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거나 착신이 금지된 전화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은지연의 핸드폰 번호로 자신도 모르게 몇 번이나 전화해댔다.
이미 번호를 바꿔버린 건 알고 있었는데, 제정신이 아니니 그것조차 상관없이 계속 예전 번호로 전화를 하였다.
Rrrr- Rrrr-
해지한 번호에 전화가 걸릴 리 없었다.
“왜 이렇게 빨라 은지연. 뭐가 이렇게 쉬워. 10년이라며! 10년이나 날 좋아했다며! 그럼 못해도 몇 년은 좀 힘들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소리 지르듯 혼잣말을 했다.
대상도 없는데 화를 내며 앞에 놓인 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때 차민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왔다.
[상무님, 제가 개인 사정으로 월요일에 연차를 내려고 합니다. 월요일 지원 업무는 김이영 과장님이 도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상무님 스케줄에 큰 회의는 없으셔서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급한 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오늘 얼굴을 못 뵈어서 메시지로 말씀드리는 점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서 강지현이었다.
이미 몽롱한 상태라 내용을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문자를 보낸 사람이 강지현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지현.
‘어쩌면 강지현은 나를 이해해 줄지 몰라. 그리고 나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네겠지. 은지연처럼 나를 모른 척하거나, 정세아처럼 거짓말을 해대거나, 아버지처럼 나를 버리지 않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내 실수는 정말 작은 것이라고 말해 줄 거야.’
이성을 잃어버린 차민우의 뇌는 결국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만들어 내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그녀라면 그럴 거야.’
차민우는 바로 강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연결음이 얼마 울리지 않았는데 전화를 바로 받았다.
“강지현?”
“네, 상무님. 강지현입니다. 말씀하십시오.”
“할 말이 있으니 지금 좀 나와.”
“네? 지금이요? 하지만…….”
“싫어?”
“아, 아닙니다. 위치 말씀해 주십시오.”
강지현은 차민우의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전에 일어났던 일 이후 그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아직 가슴속에 상처로 남아 있었지만, 결국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완곡하게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통화하고 30분이 안 되어 지현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민우가 말한 곳은 이전 상사의 업무 보좌 때문에 위치를 알고 있는 VVIP들이나 드나드는 프라이빗 바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들어가자 차민우가 고개를 위로 들고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차민우 상무님.”
“왔군. 내 고민 들어 줄 사람.”
그사이에 정신을 조금 차린 차민우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쳐서 앉으라고 했다.
“뭘 마시지? 칵테일? 아니면…….”
“그냥 물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부르셨나요?”
강지현의 말투에는 조금은 냉랭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어쩐 일? 흠…….”
크게 한숨을 내쉰 민우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그때 생각난 게 강지현이야.”
“네?”
“내가 저번에 심한 말한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강지현이 생각났어. 내가 왜 이럴까?”
그의 대답에 혼란스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분명히 이 사람은 자신과의 관계를 냉정히 끊어내려 했었는데……. 그런데 인제 와서 왜?
갑자기 민우가 손을 뻗더니 강지현의 손가락 하나를 톡톡 건드렸다.
깜짝 놀라 지현이 쳐다보니, 그의 눈이 느른한 표정으로 강지현을 마주 보았다.
“지금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내 얘기를 좀 들어줄 수 있어, 강지현?”
그의 말에 지현은 몇 초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천천히 끄덕여지는 그녀의 얼굴.
이 상황에서는,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