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앙~하고 먹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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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앙~하고 먹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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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앙~하고 먹어야죠
2022.12.29.
“과장님. 방금 뭐라고 하신…….”
권지수는 지연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흔들리더니 곧 고통스러움이 가득 담겼다.
“그……럴 리 없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생길 리가 없는데. 믿을 수가 없어요.”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지수가 다시 지연을 마주 보며 말했다.
“과장님, 거짓말이죠? 제가 강현이 귀찮게 할까 봐 그러시는 거죠? 그렇죠?”
“아니요. 저는 사실을 말씀드렸어요. 제가 이강현 씨 여자친구예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작가님에게.”
진실을 확인하듯 지연의 눈을 바라보는 지수는 참담했다.
지연의 눈동자는, 한밤의 바다처럼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개인적인 부분이라 오픈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말씀드리지 않으면 저희의 일에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말씀드렸어요.”
지수의 초점을 잃은 불안한 눈빛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의 떨리는 두 손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연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와 더한 말을 나누는 것은 무리일 터.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제 대답이, 저희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작가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지수를 남겨둔 채, 천천히 스튜디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 지연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사무실로 다시 돌아간 지연은 쌓여 있는 메일들과 업무들을 쳐내기 바빴다.
잠깐이라도 외근을 하면 이동시간이 소비되는지라 업무가 더욱 바빠졌다.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9시.
“과장님, 저녁 드실 거예요? 저 간단하게라도 저녁 먹으러 나가는데 과장님 저녁거리 뭐 좀 사 올까요?”
주연 대리가 지갑을 들고 나가려다 물었다.
“저는 좀 더 있다 먹을게요. 메일 하나 급하게 보내야 하는 게 있어서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대리님.”
“별말씀을요. 충식 과장님은요?”
주연 대리가 충식을 향해 물었다.
“아……. 저도 그냥 안 먹고…….”
“충식 과장님, 그러지 말고 주연 대리님이랑 같이 간단하게라도 식사하고 오세요. 과장님 배고픈 거 못 참잖아요.”
중학교 때 야간자율학습 시간이면 항상 배고프다며 울부짖던 충식이 기억나 지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과장님. 저랑 같이 나가서 라면이랑 김밥 먹고 와요. 네?”
주연이 충식의 팔을 끌어 일으켰다.
“충식 과장님, 주연 대리님 혼자 가게 하지 말고 같이 가줘요. 혼자 밥 먹는 거 얼마나 맛없는데.”
충식은 지연이 안 간다니까 자신도 자리에 남으려다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과장님, 대리님. 이왕 나가는 거, 맛있는 거 먹어요. 요 앞에 샌드위치 맛있는 데 생겼더라고요.”
지연이 둘에게 말하고는 다시 메일 쓰는 데 집중했다.
약 15분쯤 지나, 급했던 메일을 보내고 나서 지연이 기지개를 쭉 폈다.
“아이고, 허리야. 나도 뭘 좀 먹어야 하나? 좀 더 있음 배고플 것 같기는 한데.”
해결하지 못한 저녁식사를 잠시 고민하는 그때 메신저 마크가 깜빡였다.
강현이었다.
[저녁 먹었어요?]
메시지만 보았는데도 웃음이 지어지는 걸 보면 연애라는 건 참 신기했다.
[아직이요. 본부장님은요?]
[저도요. 잠깐 제 방으로 올라올 수 있어요?]
[네, 그럴게요.]
지연은 메시지를 남기고는 바로 강현의 방이 있는 17층으로 향했다.
강현의 비서는 먼저 퇴근했는지 없었기에 바로 강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잠시 기다렸다 방문을 열자 전화 통화를 하는 강현이 보였다.
지연이 머뭇거리며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강현이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입 모양으로 ‘여기 앉아요.’라고 말했다. 그를 보며 지연이 피식 웃었다.
그가 가리킨 소파 쪽으로 가자, 소파 앞 테이블에 호화찬란한 초밥들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지연이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테이블 옆에 서 있자 곧 통화를 끝낸 강현이 다가오더니 지연을 꼭 안았다.
“하아……. 드디어 채웠다, 우리 은지연 에너지!”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지연을 품에 안은 강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강현 씨…….”
“오늘 하루, 꽤나 힘들었거든요. 나 1분만 이렇게 하고 있어도 돼요?”
강현이 얼굴을 들지 않고 지연의 목에 얼굴을 댄 채로 물었다.
지연은 가만히 강현을 마주 안고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떨어지자 강현이 미소 짓더니 지연의 손을 끌고 소파에 앉혔다.
“저녁 안 먹었죠? 간단하게 이것 좀 먹어요.”
“간단하게 먹기엔 너무 호화찬란한데요? 오……. 장어도 있다! 너무 좋아요!”
신이 난 지연을 보는 강현의 눈에 즐거움이 서렸다.
이 여자는 모든 순간에서 행복의 요소를 찾는 것 같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언제 어디서나 좋은 점, 행복한 부분을 찾아내는 지연.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자신에게도 그런 행복함이 물들어 같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지연이 나무젓가락을 딱 뜯어내더니 초밥 하나를 집어 강현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강현 씨, 아~.”
지연의 말에 잠시 당황한 강현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앙~하고 먹어야죠.”
지연이 초밥을 입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앙~.”
지연이 하라는 대로 ‘앙’소리를 내고 초밥을 받아먹자 지연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곧 몸을 떨 정도로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아 어떡해, 너무 배 아파. 강현 씨 누가 뭐 먹여준 적 없어요?”
강현이 초밥을 오물오물 씹어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지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계속 묻어나왔다.
이제 강현을 좀 더 알게 되어 이 사람이 얼마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서늘한 눈빛을 가진 차가운 임원일 텐데.
이렇게 귀엽게 ‘앙~’소리를 내며 넣어준 초밥을 먹다니.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귀여운 점을 알려주고도 싶고, 또 다른 마음으로는 이런 그의 모습을 혼자만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나만 아는 강현 씨의 귀여움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나만 알아야지!”
강현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가 자신도 지연이 좋아할 것 같은 장어 초밥을 집어서는 지연의 입 앞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지연 씨도 아~해요.”
지연이 웃으며 입을 열고는 ‘앙~’소리를 내며 강현이 준 초밥을 한입에 받아먹었다.
초밥 먹는 것이 뭐가 그리 즐거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둘은 서로에게 초밥을 먹여주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듯 웃었다.
밥을 다 먹자 강현이 따뜻한 코코아를 타 왔다.
“자요, 밤에는 차나 커피보다 이게 나을 거예요.”
달콤하고 따뜻한 코코아 향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오늘 권지수 작가님 임시 스튜디오에 갔다 왔어요. 한남동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후에 메신저에서 안 보였군요?”
“네, 원래 지난주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이번 주로 이동 원하셨거든요. 아무래도 콘셉트를 잡아야 다음 작업을 하시기 쉬우니까. 연락 왔길래 빨리 가봤죠.”
“그래서 미팅은 잘했어요?”
“네, 미팅은 잘했는데……. 다만…….”
“다만?”
“작가님이 강현 씨 연락처를 다시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리고 꼭 만나고 싶어 하셔서……. 제가 저희 둘의 관계를 말했어요. 안 그러면 다시 부탁하실 것 같기도 했고, 일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요.”
“잘했어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강현이 곧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충격받으신 것 같아 걱정이에요, 작가님이.”
“그건 지연 씨가 걱정할 일 아니에요. 5년 전 사라져서는 여태까지 연락 없이 살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옛 남자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충격받는 게 이상한 거예요.”
“음……. 아무튼 마음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시간에 나에게 좀 더 신경 써요.”
고개를 끄덕인 지연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알겠어요. 그럴게요.”
잠시 후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그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가뜩이나 바쁜 그에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졌다니…….
오늘도 그는 거의 밤을 새우겠지?
“이만 가볼게요, 강현 씨. 더 일해야 하는 거죠?”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50밖에 못 채워 줬으니까…….”
지연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더니 끌어당겨 쪽-하고 입 맞추더니 떨어졌다.
“100을 더 채워야죠.”
귀엽게 눈웃음 짓는 지연을 보자, 강현의 머리에서 뭔가 뚝-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강현은 지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입술을 맞대었다.
“당신은 매 순간 나를 시험에 들게 하네요.”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고든 그의 더운 숨이 순식간에 더욱 깊숙이 밀려들었다.
지연의 허리를 감싼 강현의 팔에 힘이 들어가 둘은 더욱 가깝게 맞닿았고, 어느새 그의 목 뒤로 지연의 두 팔이 매달리듯 감겨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핸드폰 진동소리가 더운 숨소리만 가득했던 방 안에 울렸다.
그 소리에 둘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부여잡아 엉망으로 구겨진 강현의 셔츠를 보고는 지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미안해요, 강현 씨. 나 때문에 시간을 너무 뺏겼죠…….”
지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강현이 흐트러진 지연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무슨 소리예요, 지연 씨. 덕분에 풀파워 되어서 오늘 안 자고 밤새 일할 수도 있겠는데.”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이 누르러졌다.
“저 정말 가볼게요. 얼른 전화 받아봐요.”
“그래요. 지연 씨는 더 일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네, 그럴게요.”
지연은 강현의 방에서 나오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달콤한 입맞춤에 집중하여 둘 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지라 옷이 구겨지는지도 몰랐었다.
자리로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사람은 차민우와 그의 비서였다.
17층에 이사실과 상무실, 전무실이 모여 있어서 그를 만난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회사였기 때문에 예의를 차리기 위해 지연이 묵례하자 차민우도 고개를 까딱했다.
“은지연 과장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그의 비서에게 시선을 주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차민우 상무님 비서실 강지현입니다. 메일은 몇 번 주고받았는데 실물 뵙고는 처음 인사드리네요. 반갑습니다.”
차민우와 은지연 사이의 어색한 기류를 느꼈지만, 강지현은 모르는 척 말을 걸었다.
최근 차민우와 많은 협력을 하는 팀의 직원 얼굴들은 이미 인트라넷에서 조사해 두어 은지연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아, 네. 반갑습니다.”
“그러잖아도 영업팀과 기획실 다음 회의 일정 때문에 메일 드리려고 했어요. 내일 오전에 일정 옵션 몇 가지 드릴 테니 검토하시고 알려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지연은 그의 비서인 강지현에게는 아무 마음이 없었지만, 차민우 앞에서 굳이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아 짧게 말을 끊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와중에도 지연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분명 차민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은지연 과장님은 이 늦은 시간에 이강현 본부장님에게 보고할 게 있으셨나 보네요.”
갑자기 차민우가 지연에게 뜬금없이 질문하였다.
“네.”
아무런 반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옆에 그의 비서가 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늦게까지 대~단하시네요.”
차민우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가 이죽거리는 것을 눈치챌 것이었다.
“네, 대단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연은 그의 이죽거림에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셋은 함께 탔다.
이상하게 숨 막히는 공기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층에 도착하자 지연이 고개를 돌려 까딱하고 인사를 하고는 내려버렸다.
“은지연…….”
차민우가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 강지현의 머릿속에 번득 스쳐 지나가는 그 말들.
“지연아. 내가 미친놈 같겠지만, 너를 보낸 거 너무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