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름다운 밤
(48/85)
48. 아름다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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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아름다운 밤
2023.01.12.
비꼬는 말을 건넨 것은 차민우였다.
취했는지 존대도 하지 않고 말하는 그를 보며 강현은 아무런 대꾸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요즘 아주 잘나가, 우리 이강현 전무. 핵심 사업 깡그리 가져가고, 주요 프로젝트에는 문어처럼 모두 발 걸치고 있고 말이야.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는가 보지? 옆 팀 프로젝트도 날름 먹어치우는 걸 보면 말이야. 알고 보니 이 전무는 다 먹어버리는 완전 잡식성이네, 잡식성이야.”
킬킬대며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민우는 취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아무 말이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기에 피해야 했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곱게 들어가서 쉬시죠, 차민우 상무님.”
강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민우를 무시하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민우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야! 이강현! 너 지금 나를 무시하냐? 엉? 그런 거야? 네가 뭔데 날 무시해! 네가 그렇게 잘났어?”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로 소리 지르듯 말하는 민우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허우적대며 우악스럽게 강현의 팔을 잡았지만, 곧 내쳐졌고 중심을 못 잡은 민우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쓰러진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는지 민우의 셔츠 일부가 지저분하게 젖어버렸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십시오, 차민우 상무님. 이렇게 잡히는 거, 기분 더럽습니다.”
꽉 다문 잇새 사이로 분노를 삭이는 강현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였고, 낮은 그의 목소리는 살얼음이 언 듯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다시 무시하고 돌아서 가려는데 차민우가 비척비척 일어나 강현에게 덮치듯 달려들더니 이번에는 그의 셔츠를 움켜잡았다.
“하아…….”
더는 참기 힘들 정도로 짜증이 솟구쳤지만 우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민우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차민우가 기괴하게 웃어대며 더 세게 강현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강현과 시선을 맞추려는 그의 안광이 번뜩인다.
“이강현, 너 은지연이랑 만나지? 엉? 너희 팀에 들어간 걔 말이야, 하얗고 맨날 벌벌 떠는 애.”
“…….”
“은지연이 한번 갔다 온 건 알고 있냐? 결혼했었던 거 알고 있었냐고? 몰랐지? 엉? 엉? 크크크 네가 그걸 알 리 없지. 바보 같은 자식.”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기에 강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의 침묵이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한 민우는 신이 나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몰랐겠지만 내가 은지연 남편이었거든! 내가 말이야. 이 차민우가 은지연 전 남편이었다고! 신기하지 않냐? 회사 동료가 새로 생긴 여자친구 전 남자친구도 아니고 전 남편이라니! 세상이 참 좁아? 그치?”
쉴 새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차민우를 바라보는 강현의 눈빛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네가 꼬셨어? 아니면 은지연이 꼬리 쳤나? 걔가 아닌 척, 순진한 척하며 너한테 다가간 걸 텐데, 너 걔한테 다 속고 있는 거라고. 넌 걔가 결혼했던 거 몰랐을 텐데, 어쩌냐? 그걸 보는 나야 재미있지만.”
차민우의 정신 나간 소리를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어 온 힘을 다해 그를 내쳤다.
민우가 볼품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두 팔을 허우적대며 바닥에서 꿈틀대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볼썽사나웠다.
“아~야야야……. 야 이 자식 나를 밀어? 에이 씨. 네가 그 여자의 처음을 알아? 너는 평생 모를 거다, 그 순간을 말이야.”
취해서 붉어진 얼굴로 차민우가 징그럽게 말해댔다.
“은지연의 처음은 다 나랑 함께였어. 결혼식이며, 첫 키스, 첫 밤. 모든 첫 번째를 내가 가졌다고! 어쩌냐 넌? 그런 거 하나도 몰라서.”
뒤이어 들려오는 차민우의 킬킬대는 웃음소리.
강현은 더러운 그의 이야기에 귀가 썩는 것만 같았다.
“차민우…….”
“이제야 열이 받는구만? 그래 너 속은 거라고. 은지연이 하얗고 겁먹은 것 같은 순진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너에게 거짓말을 한 거라고, 걔가.”
강현이 자기 말에 반응한 듯 보이자, 차민우는 더욱 흥분했다.
흥분해 눈을 부라리며 더러운 말들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흡사 야차 같기도 했다.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귀신.
강현은 굳어진 표정으로 차민우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바닥에 흉하게 쓰러져 여전히 횡설수설해대는 그의 손 위로 발을 올리고는 천천히 무게를 실었다.
“아! 야! 내 손! 야! 이강현! 발 떼! 아악!”
밟힌 손의 통증에 민우가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고, 강현은 그런 그를 차갑게 내려보며 발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내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나는 그녀의 지금을 가졌는데.”
피식 웃는 강현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그것들 다 지나간 건데, 내가 그걸 알아서 뭐 해.”
민우가 그의 발밑에 깔린 손을 빼려고 허우적댔다
“너는 지금처럼 구역질 나는 똥통에서 허우적대면서 그렇게 과거나 회상하면서 살아. 나는 그녀와 현재를 살면서 찬란한 미래를 꿈꿀 테니까. 다시는 남의 여자한테 찝쩍대지 말고.”
“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오는 민우의 외침을 듣고서야 강현이 그의 손에서 발을 떼었다.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던 강현이 잠시 멈춰 섰다.
“아! 그리고 차민우 상무. 결혼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바라던 첫사랑이랑 함께 산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인간이라면 거기에나 좀 집중해. 발정이 난 개처럼 비서에게 껄떡대지나 말고.”
아픔에 괴로운 듯,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밟혔던 손을 살피던 차민우가 번쩍 얼굴을 들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핏기가 가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회사 곳곳에서 그렇게나 티를 내고 있는데, 모를 수가 있나.”
눈도 깜빡거리지 않으며 민우를 쳐다보는 강현의 얼굴에 설핏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사라졌다.
하지만 돌아서서 안으로 돌아가는 강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런 미친놈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거야, 은지연.”
강현은 지연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지금, 당장.
[지연 씨, 오늘은 몇 시쯤 자요?]
[음……. 강현 씨 얼굴 본 다음이요?]
강현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지연의 얼굴 가득하게 미소가 걸렸다.
[당장 보고 싶네요.]
[회식 끝나고 올래요?]
지연은 오늘 강현이 회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오라고는 할 수 없었다.
[갈게요. 기다려줘요.]
[기다릴게요. 서두르지 말고 와요. 저 오늘 늦게 잘 거예요.]
강현이 온다는 말에 지연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답장을 보내고는 집 안을 휙 둘러보았다.
“회식에서 먹고 오겠지만, 뭘 좀 준비해야 할까? 해장국? 아니면 다른 거?”
고민하며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아~ 빨리 보고 싶다, 강현 씨.”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강현이 지연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회식에서 많이 마시지는 않았는지 멀쩡한 모습이었다.
셔츠가 구겨져 있기는 했지만, 언제나처럼 말끔하고 완벽한 모습.
마치 바로 전까지 사무실에서 회의하다 온 것처럼.
“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요? 그런데 셔츠가 왜 이렇게 구겨졌어요?”
“내일 중요한 일 있다고 먼저 나왔어요. 그나저나…….”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강현이 다급하다는 듯 지연을 꽉 안았다.
아직 신발도 채 벗지 않은 현관문 앞이었다.
지연은 가만히 안긴 채 그를 마주 안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강현 씨?”
“하아……. 아니요, 그냥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지연은 직감적으로 그에게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을 눈치채고, 그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나도요. 나도 강현 씨 많이 보고 싶었어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저녁은 먹은 거예요? 배는 안 고프죠?”
“이것저것 간단하게 먹었어요. 지연 씨는요?”
“저도 먹었죠. 음……. 그럼 어쩌지? 시간이 10시가 넘어서 커피도 그렇고. 뭐 대접할 게 없네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제가 얼른 만들어줄게요.”
“뭐 안 먹어도 돼요. 그냥 지연 씨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친구의 얼굴을 한 강현이 지연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려 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고마워요. 바쁜데도 이렇게 와 줘서.”
“아니면…….”
“아니면?”
“달콤한 거 먹고 싶어요. 케이크라던가?”
“케이크? 케이크는 없는……데……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눈치를 못 챘던 지연이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채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현을 쳐다보았다.
강현이 커다란 두 손으로 지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지금 나에겐 달콤한 것이 필요해요. 케이크는 없지만, 여기에 케이크보다 더 달콤한 지연 씨가 있어서요.”
잠시간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얼굴을 감싼 강현의 두 손이 살짝 떨려오는 것을 지연은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지연이 두 팔을 올려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러게요, 여기에 케이크보다 더 달콤한 강현 씨도 있네요.”
마주 보던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를 빨아당길 듯이 깊어졌다.
마치 홀린 듯, 강현이 얼굴을 내려 지연의 입술을 덮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지연의 입술 위를 잠시 배회하던 그는 살짝 깨물어진 입술에 지연이 작게 소리를 내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 왔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호흡이 끝없이 뒤섞이고 흐트러진다.
둘의 호흡이 점점 달아올라 숨을 쉬기가 어려워질 때까지 그는 지연을 몰아붙였고, 어느새 강현의 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닿은 푹신한 침구 위로 지연의 긴 머리칼이 흐트러져 펼쳐졌다.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 듯 힘을 빼고 누워 있는 그녀가 오늘따라 여려 보였다.
하지만 미세하게 긴장한 듯, 작은 손으로 새하얀 침구를 그러쥔 지연의 손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린 강현이 지연의 손바닥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지연 씨가 좋은 것만 할 테니……. 싫으면 알려줘요.”
여유는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강현의 두 눈이 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긴장되었지만,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연은 지금, 강현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싫지 않아요. 난……. 당신이라면 다 좋아요.”
이른 아침, 간단한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며 지연과 강현이 마주 앉았다.
밤새 거의 잠을 못 잤지만 둘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는 생기가 넘쳤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풋- 그걸 걱정하기에는 강현 씨가 절 엄청나게 괴롭힌 건 기억나죠?”
지연이 장난스럽게 그에게 말하자 강현의 얼굴이 풀 죽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미안해요. 내가 그러면 안 됐는데.”
“농담이에요. 하나도 안 피곤하고, 아픈 곳도 전혀 없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강현 씨. 그냥…… 다 좋았어요.”
지연이 강현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강현이 그 손을 입가에 가져가 그녀의 손바닥에 입 맞추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알겠어요. 그나저나 강현 씨 아침에 회의 있지 않아요? 얼른 먹고 집에 가서 준비하고 가야죠.”
“하아……. 더 함께 있고 싶은데.”
“자, 어서요.”
강현은 아쉬워했지만, 회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10분 정도 후 자신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가 떠난 후 지연은 잠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며 어젯밤을 생각했다.
갑작스러웠지만, 아름다웠던 밤이었다.
강현은 끊임없이 지연에게 달콤한 말들을 속삭여주었고 소중하게 대해줬다.
지난번의 일도 있었던지라 지연이 혹시라도 겁먹고 힘들어할까 걱정하며 그녀를 배려해 주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는 걸 지연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참지 못하고 폭주하였지만.
지연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알고 보니 전혀 새로운 감정들.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 함께 하는 감정의 교류와 행위들이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고 충만하다는 걸 처음 느끼게 되었다.
“고마워요, 강현 씨.”
지연은 혼잣말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