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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갖기에는 싫고, 남 주기엔 아깝고 (50/85)


49. 갖기에는 싫고, 남 주기엔 아깝고
2023.01.16.



 
오늘 지연은 촬영 감독과 함께 권지수의 작업실에서 촬영하는 일정이었다.

얼마 전 그녀와 강현이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어 좀 껄끄러웠지만 일에서는 티 나지 않게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어제 다시 한번 일정을 점검했을 때도 지수는 단답형이지만 답변을 주었다.

권지수의 작업실에 도착하자 무척이나 초췌한 얼굴의 그녀가 지연을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들어오세요.”

무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지수는 한눈에 보아도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늘 충식 과장님은 오시지 않고, 촬영 감독님과 스태프 두 분만 30분 정도 후에 오실 거예요. 그런데…… 컨디션 괜찮으세요?”

지연이 걱정스럽게 물어보자 지수는 지연을 노려보듯 빤히 쳐다보았다.


“강현이에게 다 들으셨을 텐데 뭘 물어보세요?”

“만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럼 제가 아프다는 얘기도 들으셨겠네요.”

“그런 얘기는 나누지 않았어요. 그저 두 분이 만나셨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뭐라고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지금 강현이가 꼭 필요한 상태예요. 그래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또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일이나 감정이 섞이면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님. 우선 이런 얘기는 지금 하지 않았으면 해요. 필요하시다면 이따 촬영 끝나고 따로 이야기 나누시죠. 지금은 우리 모두 일에 집중하고요.”

지연은 권지수가 자꾸 감정적으로 자신을 대하려고 하자 말을 끊어내고 화제를 바꾸었다.

촬영 감독과 스태프들이 좀 더 일찍 도착하여 바로 일정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촬영 내내 한 번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권지수였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단답형 대답뿐이고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분위기가 계속되자, 나중에는 촬영 감독과 스태프들이 지연과 권지수 둘 사이의 껄끄러운 기류를 눈치채고 어색해하기 시작했다.

지연은 당장 권지수의 참여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부분 먼저 촬영을 진행하기로 하고 촬영팀에 내용을 전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들과 스케치들을 먼저 찍었다.


“감독님, 지금 촬영은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 뒤에는 작가님이 스케치 그리는 영상 찍을 겁니다.”

“그럼 괜찮으시다면 저와 작가님 잠시 자리 비워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이미 가이드도 받았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스튜디오 근처에 있을 테니 혹시 필요하시다면 전화 주세요. 바로 돌아올게요.”

“알겠습니다.”

지연은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돌려 권지수에게 다가섰다.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 하자 지수가 놀란 듯 저항했다.


“뭐……뭐예요?”

“저와 얘기 좀 하시죠. 작가님.”

“이거 놔요!”

“1시간 안에 놔드리겠습니다.”

지연은 놓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고는 끌었다.

그녀를 데리고 향한 곳은 스튜디오 근처 작은 커피숍이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어 조용하여 이야기하기 좋았다.


“작가님 캐모마일 맞죠? 따뜻한 캐모마일 차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지연은 지수의 손목을 잡은 채로 주문을 마치고는 그녀를 근처 자리에 앉혔다.


“권지수 작가님.”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에요, 은지연 과장님!”

지수가 화난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지연을 노려보았다.


“제 행동이 무례하다고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먼저 무례하고 프로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계신 건 작가님입니다.”

“뭐라고요? 제가요? 뭘요?”

“너무 잘 아시겠지만, 저는 작가님 스튜디오에 놀러 온 게 아니에요. 저희 회사의 광고 관련한 작업을 하기 위해 왔어요. 그리고 이 작업은 작가님도 함께 하셔야 하고요. 작가님에게 회사에서 얼마의 투자를 하고 있는지 알려드려야 지금, 이 순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까요?”

침착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말하면서 점점 더 흥분하였는지 지연의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도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까 말까인데 지금과 같이 비협조적이라면 저는 작가님과 작가님의 에이전시에 심각하게 컴플레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작업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일정이 밀린다면 그에 대한 일정, 비용 및 부대 비용도 청구할 수밖에 없어요.”

“하…….”

“이강현 씨와의 일은 개인적인 일이니 접어두시고, 일에 집중해 주셔야죠.”

“은지연 씨, 가진 자의 여유인가요?”

“작가님, 전 지금 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지연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강현 씨는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제 것도 작가님 것도 아니에요. 강현 씨 본인 의지를 충분히 말씀드린 거로 알고 있는데 그 의사를 거부만 하시고 그가 필요하니 물러나지 않겠다는 말씀하시는 거. 그거 무한 이기주의예요. 거기다 일하는 곳에서 이렇게 티를 내시며 업무를 방해하시다니요.”

“…….”

“아프시다고 하셨죠? 그럼 가족에게 의지하고 고민하셔야죠. 5년 만에 나타나서 옛 남자친구를 아직도 자기 것인 것처럼 휘두르려고 하다니,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아프시지 않았으면 안 그러셨을 거예요. 그냥 자기 인생 사셨을 거라고요. 작가님에게 이강현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필요하면 만나고 필요 없으면 버려두는, 쓰다만 인형 같은 사람인가요?”

“아니에요! 난 강현이를 사랑했어요!”

“사랑했다라……. 그거 더는 사랑 아니에요. 상대방의 말은 안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해대는 거. 싫다는데 자꾸 들러붙는 거, 그거 스토커예요. 작가님 그런 사람이세요?”

“아니, 나는…….”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던 지수가 갑자기 펑펑 눈물을 흘렸다.


“내 인생에 강현이만큼 나를 알고 나를 맞춰 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내가 무슨 일로 떠났어도 돌아오면 언제나 웃으며 맞아주었단 말이에요. 그는 언제나 기다려줬어요.”

“그래서 좋으셨죠?”

“…….”

“그럼 그 순간 강현 씨는 어땠을까요? 작가님처럼 좋았을까요? 작가님 방금 그러셨잖아요. 맞춰 주고, 떠났다가 돌아와도 언제나 기다려줘서 이강현 씨 좋아한다고요. 그럼 이강현 씨는 어땠을까요? 권지수씨가 갑자기 떠났을 때, 제멋대로 굴 때……. 그도 좋았을까요?”

“…….”

“상대방의 사랑을 알고서 그걸 약점으로 쓰는 것, 애정을 볼모로 한 협박. 그거 모두 감정 폭력이에요. 작가님.”

지연이 권지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지 않을까요? 그가 희망 고문을 당하며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혼자 기다리고 감내하고, 외로웠을지?”

지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며 눈물만 흘렸다.

그녀도 알 것이었다.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았고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일 뿐!


“아직 어머님께 아프시다는 얘기 안 하셨죠? 바로 연락하세요. 그리고 치료받으세요.”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30분 정도 후에도 감정 정리가 안 된다면 말씀 주세요. 오늘 하루는, 작가님의 프로답지 않은 모습 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만입니다.”

아침 스튜디오에 오는 길, 충식에게 전화가 왔었다.


“충식 과장님! 오늘 촬영 걱정되어서 전화한 거야?”

“권지수에게 가는 길이야?”

“응, 지금 가는 길이야. 차가 좀 막혀서 30분 정도 더 걸릴듯해.”

“지연아, 오늘 누나가 분명 이상할 거야. 사실은…….”

충식은 지수가 아프다는 것, 아직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강현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누나 설득해 보고, 만약 이번 주에도 어머니에게 말 안 하면 내가 말하려고.”

“그래.”

“미안해, 내가 갔어야 했는데…….”

“아니야. 내가 오는 게 맞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

“누나가 워낙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혹시 통제 불능이거나 힘들면 꼭 알려줘. 바로 갈 테니까.”

“무슨 소리야. 너는 협력사 미팅해야지. 바쁜데 걱정하지 말고.”

충식을 안심시키며 전화를 끊었었다.

지연은 권지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권지수도, 차민우도. 가지고 있을 때는 함부로 하더니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니 아쉬워서 찾는 것일 뿐이다.

다만, 그녀가 지금 병으로 정신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차민우와는 다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일과 개인사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지연 역시 가만있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스튜디오로 향했다.

촬영이 거의 끝나갈 즈음 권지수가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오늘 스케치 영상은 제 얼굴 안 나오도록 해주세요. 다음 주 촬영 때 전신 나오는 것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수가 목멘 소리로 촬영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요청했다.

지연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

강현은 자신이 보고 있는 화면 속의 자료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온유 제약 투자 건을 제안하기 위해 사방에서 모은 자료들이 엉망이었다.

특히 영업, 차민우 상무팀의 자료들이 그랬다.

내용의 일관성도 없고, 숫자들은 전혀 맞춰져 있지 않았다.

특히 최근 3년간의 숫자들이 매 자료에서 차이가 났다.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이지?’

전략기획 쪽에서 기존 전달받았던 자료들과 비교하면, 더욱 차이가 났다.

이 말은 어딘가의 자료가 잘못 기재되었거나, 혹은 일부러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항상 차민우 쪽을 통해서 받아오던 영업 자료.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투자 자료를 만들기 위해 부사장에게서 데이터를 전달받았고, 두 자료의 숫자는 많은 차이가 났다.

도대체 어느 자료가 맞는 숫자인지.

Rrrr Rrrr-


“네, 재무팀 강현종 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전략기획실 이강현입니다. 문의드릴 것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오늘 미팅할 수 있으신 시간이 있으십니까?”

“안녕하세요 전무님. 네, 1시간 후 가능합니다.”

“그럼 1시간 후에 제 방에서 잠시 뵙겠습니다. 함께 검토하고 부장님 의견을 듣고 싶은 자료가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전무님.”

전화를 끊고 강현이 컴퓨터를 노려봤다.

부디, 자신의 감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이강현 전무님, 이 자료는 저희가 가지고 있는 자료와 숫자가 많이 틀립니다. 게다가 파일 안에서의 숫자들도 이상하고요.”

강현의 방으로 온 재무팀 부장과 강현은 1시간 정도 파일들을 함께 살펴보았고, 재무부장은 파일 중간중간을 짚어가며 대답했다.


“여기 보시면, 이 A 파일에서는 최근 2년간의 D 주식회사에 대한 투자 매출 750억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저희 쪽 자료에는 600억이 조금 안 됩니다. 약 150억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B 파일에서도 50억 정도 차이가 있고요. 혹시 이 자료들을 어디에서 받은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 아마 제가 중간 자료를 잘못 받은 것 같습니다. 우선 자료 공유 팀에 최종 파일인지 재확인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확인하신 후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자료가 맞는다면 저희 재무팀에도 큰 문제입니다. 더 시간을 들여서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만약 지금 보여주신 자료가 맞는다면 전체 숫자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빠뜨린 건 없는지, 제대로 된 자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재무부장이 방에서 나가자, 강현은 다시 자료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자료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실수로 넘긴 것인지는 몰라도 잘못된 자료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신중한 체크가 필요했다.


“좀 더 파 봐야겠군.”

강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잘 저장한 뒤, 복사본까지 따로 저장해 두고는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Rrrr Rrrr-


“실장님, 이강현입니다. 내일 시간 좀 내주시죠. 직원들 퇴근한 6시 이후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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