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아빠 빽 믿고 날뛰는 초등학생 (51/85)


51. 아빠 빽 믿고 날뛰는 초등학생
2023.01.23.



 
며칠 전 강현의 방.

이 회사에서 강현이 절대적으로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감사실장 김사헌.

그가 직원 대부분이 퇴근한 저녁 9시, 강현의 방에 앉아 있었다.

전략기획 업무 특성상, 프로젝트 대부분에는 위험성 관리 계획이 함께 나와야 했는데 그 많은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알게 된 인연이었다.

FM 원리원칙 정석대로 하는지라 절대 딴 길로 새지 않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강직한 사람.

실력과 경력으로는 임원 승진이 되고도 남았을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쪽으로는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런 것에 욕심내지 않았기에 오랜 기간 C&C에서 일하고 있었다.

강현이 보기에는 감사실장으로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일부 임원들은 융통성이 없고 너무 깐깐하다고 싫어했지만 강현은 김사헌 실장이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본부장님, 오늘 이 시간에 보시자고 하신 이유는…….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로 이해되는데 맞습니까?”

“역시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실장님.”

강현이 노트북 화면을 큰 스크린으로 연결해 켜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우연히 공유 받은 영업 숫자가 이상합니다. 간단하게 회계팀과 먼저 확인을 해봤는데 적게는 50억, 크게는 150억까지 프로젝트마다 숫자가 틀리더군요. 제가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어서 전문가이신 실장님 조언을 듣고자 만남 요청했습니다.”

강현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이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료를 살펴보았다.


“자료는 모두 따로 저장하셨죠, 본부장님?”

“네, 바로 다운로드해서 몇 곳에 복사본 저장해 뒀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다른 건은 아직 모르겠지만, 특히 제가 새로 맡은 프로젝트인 온유 제약 투자 건은 숫자며 내용이 너무 부실하고 엉망이었습니다. 그냥 내부 자료로 엉망이면 또 모르겠는데, 온유 제약 쪽에 이 숫자들이 공유되고 있었으니 그게 문제입니다.”

“제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본부장님이 찾으신 가장 큰 문제 부분이 무엇이었을까요?”

“온유 제약에서 투자 받은 예산으로 우리 쪽에서 새롭게 투자한 부분들이 실제 숫자를 보면 모두 어마어마한 마이너스인데, 공유 자료에는 약간의 이익이 있는 정도로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올해 수치가 제일 심하네요. 단순하게 예상해보면…… 추가 투자를 노리고 숫자를 만진 것 같습니다.”

“하아……. 왜 또 이러는 건지.”

“또……라니요? 예전에도 이런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나요?”

“워낙 오래전 일이기는 합니다. 아마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거고요. 차승조 회장님이 사장님이셨을 때 한번 크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C&C는 원래 차 회장님 장인 어르신인 김권중 회장님이 세우신 회사입니다. 따님이신 김지원 사장님과 차승조 사장님이 결혼하시고 얼마 안 되어 승계를 차승조 사장님에게 하시었죠.”

잠시 기억을 더듬듯이 생각하던 김사헌이 말을 이었다.


“두 분 결혼하시고 얼마 안 되어 차승조 사장님이 회장님이 되시고 나서 일이 터졌습니다. 회장되시기 이전 사장이실 때 진행하시던 프로젝트 숫자를 조작한 것이 김권중 회장님께 들통난 겁니다. 그 프로젝트는 꽤 규모가 컸었고 성공적이어서 차승조 사장님이 회장직을 승계 받을 때 가장 크게 힘을 실어준 프로젝트였거든요. 물론 그때 그 건은 김권중 회장님의 개인 재산까지 넣어 막아서, 회사 내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외부에 새어나가진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팀과 회계팀 부서장 이상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김 실장은 그때 상황을 설명하다 목이 탄다는 듯, 앞에 놓인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저는 그때 감사팀 팀원이었는데 부서장님이 손이 모자라서 저를 몰래 투입해서 알게 되었죠.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제가 알고 있는 건 다른 분들은 모르셨어요.”

말을 마친 김사헌이 또 하나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더 했다.


“그 일 있고 얼마 안 돼서 해당 건을 공식적으로 담당하였던 감사팀, 회계팀 부서장들은 모두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자발적 퇴사는 아니었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부서장 퇴직에는 차승조 회장의 압력이 있었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 건도 어쩌면 차승조 회장까지 연루되어 있을 것 같은데…….”

“차민우 상무님은 이 프로젝트들을 이끌었으니 당연히 알고 계실 내용이고, 수에 밝은 차 회장님께서 이 내용을 모르실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겠군요.”

“판도라의 상자라. 이미 열었다면 파 봐야죠, 본부장님. 몇천도 아니고 몇백억이라면 언젠가는 터질 고름입니다. 자세히 봐야겠지만요.”

“이 의문의 상자를 함께 열어 볼 믿을만한 인력 있으실까요? 실장님?”

“네, 몇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은 좀 더 자세한 숫자 파일, 즉 직접 숫자를 만진 파일을 찾아야 하는데……. 이 프로젝트 리더가 차민우 상무였으니, 그분이 자료를 가지고 계실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우선 자료 검토부터 해주시고, 필요하다면 내부에서 관련해서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파일은 회사 메일 말고, 꼭 저에게 직접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회사 이메일은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자료를 자세하게 살펴보려면 대략 일주일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전에라도 검토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본부장님.”

“감사합니다, 실장님. 다음에는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뵙도록 하죠.”

“네.”

감사 실장은 강현이 전해준 USB를 들고 방에서 나갔다.

***

김사헌 감사 실장과의 미팅 이후 처음 만나는 차민우는 여전히 거만했다.

뭘 믿고 그러는 건지.

강현의 발표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지연의 발표와 권지수의 발표도 대충 듣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으며 시종일관 강현을 쳐다보았다.

전략기획 TF팀의 발표가 모두 끝났다.


“영업팀, 오늘 발표 관련해서 질문 없으십니까?”

미팅에 참석해 있는 영업팀 팀장과 부서장들 5인은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강현은 그들을 한심한 듯 잠시 쳐다보다가 차민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민우 상무님? 상무님은 질문 없으십니까? 아니면 공유 주실 자료는 있으신가요?”

실실 웃고 있던 차민우가 강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본부장님. 그런데 제가 한 가지 의문이 있어서 오늘 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저 작가님, SOO라는 이름을 쓰시는 권지수 작가님을 이 프로젝트에 쓰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차민우가 원론적인 부분을 다시 물어보았다.


“상무님, 몇 번의 미팅을 통해 그 부분은 이미 다 말씀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과는 제품 디자인 협업을 먼저 시작으로 광고까지 이어진 경우고, 제품 협업 때는 전략기획실뿐만 아니라 제품 개발팀까지 포함해서 함께 결정해서 작가님을 섭외하였습니다. 기억 안 나시나요?”

“아하! 그러셨군요.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달라서 물어봤습니다.”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제가 참 재미있는 걸 봐서 꼭 함께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오늘 자리가 딱 좋네요. 이야기 나누기에는.”

그렇게 말하던 차민우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지금 본부장님 메일로 재미있는 사진 하나 보냈는데 함께 볼 수 있도록 열어봐 주시겠습니까?”

강현이 노트북을 스크린에 연결한 채로 방금 도착한 차민우의 메일을 열었다.

JPG 사진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어 파일을 열자 거기에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은 사진이 있었다.


“제가 권지수 작가님 SNS에 들어가 보았더니 이런 재미있는 사진이 있던데…….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며칠 전 업데이트된 SNS 포스트를 찍은 사진에는 어려 보이는 강현과 권지수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었고, 여러 개의 해시태그가 쓰여 있었다.

#그리운사람#우리의젊은날#아직내가많이사랑해#내가너를잊을수있을까?

그 밑에는 수백 개의 댓글도 달려 있었다.

[누구야? 남자 존잘!]

[작가님 옛 애인인가?]

[대박 잘생김.]

[나 같아도 이런 남자 못 잊겠다.]

[우리 회사 임원이랑 닮았네.]


“이강현 본부장님, 제가 좀 알아보니 두 분이 얼마 전까지 연인 관계셨더라고요? 개인 친분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로 가져오시면 어떡하십니까. 여기에 우리가 지금 얼마를 쏟아붓고 있는데요. 회사 윤리강령도 안 읽으셨나요?”

너무 즐겁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실실 웃는 민우의 얼굴이 비열하게 빛났다.

지연은 사진을 보며 경악했다.


‘차민우! 저 자식이 미쳤어. 드디어 미쳤어!’

당장이라도 컴퓨터를 꺼야 하나 고민하며 강현을 쳐다보자 강현이 손으로 제지했다.


“할 말 없으십니까, 이강현 본부장님? 아니면 권지수 작가님이 한마디 하시겠어요?”

민우의 입에서 권지수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곧 그녀에게로 향했다.

권지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바들바들 떨며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을 굳게 다문 지수 대신 강현이 입을 열었다.


“이 사진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7, 8년 정도 전의 사진인 것 같네요. 이 사진이 왜 작가님의 최근 포스트에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사진이 맞습니다. 예전에 인연이 있었지만, 5년 전에 모두 정리된 인연입니다. 그리고 작가님 계약 전까지는 누가 SOO 작가님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더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강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민우가 책상을 쾅 쳤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누가 봐도 인맥으로 이어져 계약한 거로 보이는데요! 전 이번 이 문제 회사에 문제 제기하겠습니다.”

흥분한 차민우는 거칠게 대답했다.


“하십시오, 차민우 상무님. 그 뒷감당할 준비도 하시고 말이죠. 지금 누가 누구를 이런 거로 질타하는지, 참 어이가 없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강현이 잠시 비웃더니, 얼굴을 굳히고 권지수를 바라보았다.


“권지수 작가님,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버하지 마시고, 당장 사진 지우십시오. 안 좋은 일로 제 변호사를 만나고 싶지 않으시면요.”

강현의 싸늘한 말투에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권지수가 벌떡 일어나 미팅룸을 나가버렸다.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던 전략기획 TF팀과 영업팀 팀장들은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뭐 극비랄 것까지도 없지만, 이 미팅에서의 일은 여기에서 마무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팀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데 영업팀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본인들의 상사가 일에 대한 자료 준비는 없이 남의 뒤를 캔다든가, 이렇게 공식적인 미팅에서 근거 없는 자료로 협력부서 임원을 공격하는 이 행태를 말씀하시려면 이야기 전하시고요.”

강현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짐을 챙겼다.


“확인되지 않은 SNS 포스트 하나로 공격이라……. 진짜 웃기지도 않는군요.”

그 사이 이 싸늘한 기운을 견디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비웠다.

차민우는 강현을 더 잡지 못해 분에 찬 듯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강현이 그 옆을 지나쳐 나오려다 잠시 멈춰 서서 차민우의 귀에만 들리도록 나직이 말했다.


 


“일 좀 하세요, 차민우 상무님. 넘겨받은 프로젝트 파일 보면 기가 찹니다. 제가 과장일 때도 그것보다 더 잘 만들었어요. 상무님 지금 모습 보면, 아빠 빽 믿고 날뛰는 초등학생 같지 않습니까.”

“뭐……뭐야!”

“아, 그리고……. 제가 저번에 그렇게 조언을 해드렸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셔서 안타깝네요. 티 좀 내지 말라니까. 주차장이 뭡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차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지나쳤다.

강현은 미팅룸을 나와 뻣뻣해진 목덜미를 움직였다.

웬만해서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는 강현이었는데.

이번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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