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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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
2023.01.26.
미팅에서 나온 뒤 전략기획 TF팀은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지연은 알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이 미팅에서 발생한 상황들을 어딘가에 전달하거나, 퍼트려서 강현을 곤란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걸.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맞닥트린 강현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사무실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 잠시 뒤, 충식이 지연에게 따로 이야기하자고 회사 내 카페테리아로 불러냈다.
충식은 본인이 더 놀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연아, 미안해. 누나가 정말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어. 권지수 진짜 왜 이러는 건지,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충식의 얼굴을 보자, 오히려 그런 그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지연은 손을 뻗어 충식의 등을 툭툭 쳤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
“네가 왜 미안해. 넌 그럴 필요 없어.”
“이렇게 일 벌여놓고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원. 내가 꼭 찾아내서 일도 시키고 너와 본부장님에게 사과시킬게.”
“난 괜찮아. 작가님이 내게 사과할 필요 없지. 날 음해하거나 내게 피해 준 것도 아니고 본인 SNS 사용해서 추억 팔이 한 건데. 하지만 본부장님은 아닐 것 같아. 본부장님 동의 없이 과거 사진을 그렇게 올렸으니…… 아무리 둘이 과거에 사귀었어도 모두 지난 일이잖아. 그러면 안 됐어.”
자신은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강현에게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일에 TF도 구성되어서 일하고 있고, 예산 투자도 많이 된 만큼 일 마무리 잘 해내야 하니, 작가님 꼭 찾아와줘. 부탁할게, 충식아.”
“알았어. 내가 누나 빨리 찾아볼게.”
충식을 통해 권지수가 연락을 해 온 것은 이틀 뒤였다.
회사 근처 커피숍, 눈앞에 권지수가 고개를 창가로 돌리고 앉아 있었다.
지연은 권지수의 앞에 앉았다.
하지만 지연이 왔는데도 지수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자 했지만, 계속되는 침묵과 외면에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결국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랑은 할 말 많지 않으실 테니 전할 얘기만 하고 빨리 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2주면 작가님과의 작업이 끝나니, 마무리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둘 다 잘 알고 있듯이, 이건 개인사가 아니고 계약, 돈, 그리고 서로의 업무들이 걸려 있는 공적인 문제이니 마지막까지 잘 조절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2주간의 일정은 권충식 과장님이 끌고 가실 예정입니다. 그러면 전 할 말 다 했으니 일어나 볼게요.”
하려는 말을 짧게 끝내고는 자리를 일어서 나가려는데 권지수가 지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비집고 나온 흐느낌에 그녀가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했다.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그냥 제 마음이 쉽게 접히지 않았고, 자꾸 생각나는데…… 그날은 저녁에 와인 몇 잔 마시니 자꾸 센티해져서 가지고 있던 사진 하나를 그냥 올린 거였어요. 이런 파장을 일으키려고 올린 건 아니에요. 올리고 나서 저도 잊고 있었고…….”
결국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어깨를 떨었고, 지연을 잡은 손을 통해 그 떨림이 전해졌다.
하지만 지연은 그녀의 슬픔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봐주시길 원한 거잖아요. 사실은.”
“…….”
“강현 씨가 작가님 포스트를 보고 안쓰러워하기를…… 조금이라도 옛 기억이 떠올라서 마음이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세요?”
바르르 떨며 미약하게 고개를 젓던 권지수는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전,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에요. 과거나 추억 곱씹으며 SNS에 포스트,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누군가를 연상하게 하는 게 아닌 짧은 글 정도였다면 전혀 문제없었겠죠.”
그녀의 말에 권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사진은 다르죠. 거기다 몇 년 전에 헤어진 사람의 사진은. 노출된 곳에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미 헤어진 누군가의 얼굴을 드러내고, 거기다 오해할 수 있는 뉘앙스의 글을 함께 올리면, 본인에게는 잠깐의 추억이지만 상대방에게는 큰 피해를 줄 수 있어요. 게다가 작가님은 유명인이잖아요. 이런 파장…… 생각 안 해본 거 아니실 텐데요.”
“흑…… 강현이에게 사과하고 싶어요. 정말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그때가 그립고 생각나고. 이 사진을 보면 그도 그때의 생각이 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한잔하니 문득 들어서,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요. 흑흑.”
눈물을 줄줄 흘리는 지수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요. 그런데…… 연락해도 대답도 없고 사과할 방법이 없어요. 한 번만…… 그냥 한 번만 만나서 사과하고 싶은데.”
권지수가 지연을 간절하게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작가님.”
“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시면, 그의 거절도 받아들이세요.”
“…….”
“미안한 마음이 진심이시면…… 그 마음을 받고 싶지 않아 하는 강현 씨의 마음도 받아들이시라고요. 꼭 그를 만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상대방이 원치 않는다면. 상대방은 원치 않는데 꼭 만나서 사과하려는 그 과정 역시, 사과하는 사람의……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방편일 뿐이거든요.”
“흑…….”
“제가 생각할 때, 지금 작가님이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법은 남은 일정에 최선을 다해 그의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 이강현 본부장님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거든요.”
사실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면,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해서 강현을 위로해 줄 수 있다면.
“말뿐인 사과보다는 다른 방법도 고려해 보세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언젠가 서로가 서로에게 편해지는 시기가 오면. 그때 사과의 말을 전할 수도 있겠죠. 물론, 그때도 상대방이 원한다면요.”
“…….”
권지수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여러 가지 힘들었지만, 작가님 작품들 참 좋아했기 때문에 이번 작업 무척 기대됩니다. 그러니 부디 남은 일정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전달할 사항은 권충식 과장님 통하거나 메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지연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지연은 몇 시간 업무에 집중하다 잠시 쉴 겸 옥상 정원으로 향하였다.
이 TF 프로젝트는 앞으로 짧으면 한 달, 길어도 한 달 반 정도면 끝날 듯싶었다.
앞으로 2주 정도 영상 마무리며 광고 문구 만들고.
나머지 2, 3주간은 최종 영상 정리한 뒤 미디어에 노출하고 피드백 점검하면…… 원래 업무로 돌아가겠지.
영업팀과 미팅했던 날도, 그다음 날도.
강현도 지연도 너무 바빠 서로를 만날 시간이 없어 메시지와 짧은 전화만 주고받고 있는지라 그를 만난 지 며칠이 되었다.
“보고 싶다 이강현. 보고 싶다고!”
아무도 없긴 했지만, 혹시라도 누가 있을까 혼잣말을 하며 강현을 떠올렸다.
“그렇게 작게 부르면 안 들리는데. 좀 더 크게 불러야 내가 듣죠.”
지연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강현이 커피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본부장님! 어디에 계셨어요?”
“나도 여기 올라오고 있었어요. 아까 지연 씨 앞서가는 거 뒤에서 보면서 왔죠.”
강현이 씩 웃으며 지연의 머리를 헝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지연 씨.”
참 별거 아닌데.
보고 싶었다는 말 하나에 왜 이리 마음이 떨리는지.
그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 왜 내게도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지.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장난에도 왜 그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지.
지연이 찰나의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며 강현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느끼는 이런 감정들이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누구를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된 마음이 너무 좋았다.
“고마워요, 본부장님.”
“뭐가요?”
“음…… 비밀인데, 아무튼 고마워요.”
“알았어요. 내가 뭔가 잘한 거니까 칭찬해 준 거죠? 그럼…… 뭔지 모르겠지만 상 좀 받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더니 강현이 지연의 입술에 쪽- 하고 버드키스를 하였다.
지연이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상 받으니 좋네요.”
강현이 눈부시게 웃으며 지연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네요. 좋네요.”
지연도 강현을 보며 따라 웃었다.
“요즘 여러 프로젝트로 아주 바쁘시죠?”
“네, 갑자기 맡게 되어 정신이 없네요. 준비 기간도 너무 짧아서 꽤 힘들었어요, 자료 정리하고 업데이트하는데.”
“실행일이 빡빡하게 정해져 있는 프로젝트인가 봐요?”
“네 처음에는 받은 일정이 한 달이었던 투자 연장 건이었어요. 다행히 상대편 회사에 초반 업데이트를 하고 양해를 얻어 기간을 연장하기는 했지만. 투자 연장 계약 기간 자체가 얼마 안 남아서 마음이 급하네요.”
“한 달. 너무한데요? 프로젝트 하나 시작하려면 최소 한 분기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지.”
“차민우 상무가 이미 하고 있던 프로젝트였는데 제가 급하게 넘겨받게 된 거예요.”
“차민우요?”
“네, 온유 제약 투자 건이에요. 투자 만기가 한 분기가 채 남지 않은 상태에서 투자 중단을 요청해 왔거든요.”
“온유 제약 투자 건이요? 그 건 투자 중단 요청이 왔어요?”
지연이 너무 놀라 하며 되묻자 강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연을 쳐다보았다.
“지연 씨가 아는 프로젝트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지연 씨 입사하기 전에 진행된 거라.”
“하아…….”
지연은 생각해보니 자신의 집이 온유 제약이란 걸 딱히 말한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 냈다.
차민우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그냥 집안끼리의 결혼으로 묶여 있었다고만 했었으니.
‘알 리가 없지. 아무리 내 성이 흔한 성은 아니더라도…… 누가 성 비슷하다고 대기업에 그냥 척척 붙여서 생각하겠어.’
지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강현을 마주 보았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없었네요. 저도 딱히 얘기할 필요를 못 느껴서…….”
“…….”
“저희 아버지가 온유 제약 회장님이세요. 은 주훈 회장님.”
“아! 그럼 은 지은 본부장님이 언니?”
강현이 무척 놀란 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지연이 온유 제약 오너 일가라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사람의 동생이라는 것에 놀라는 듯했다.
“네, 맞아요. 언니도 만나셨나 보네요.”
“지금, 이 투자 건 관련해서 온유 제약 리더가 은 지은 본부장님이셔서 만나 뵀습니다. 은 본부장님이 아주 똑 부러지시고 멋지시던데요.”
“그렇죠? 제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우리 언니예요.”
“지연 씨에게 매번 꼬맹이라고 부르시는 분.”
“맞아요, 맞아요.”
“언젠가 일 말고 개인적으로 지연 씨와 함께 은 지은 본부장님께 인사 가고 싶네요.”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지연이 말을 잃고 강현을 쳐다보았다.
“곧, 기회가 되겠죠?”
싱그러운 미소를 가득 담은 강현의 얼굴이 지연을 마주 보며 물어보았다.
“네…… 곧…….”
“바쁜 일들 좀 끝나면 저도 제 가족 소개할게요. 아, 그 전에 제 친한 친구들 먼저 보여줄게요. 지연 씨 너무 보고 싶어 해요.”
“제 얘기…… 친구 분들에게 하신 거예요?”
“그럼요. 지연 씨 때문에 고민할 때 상담도 했는데, 이 녀석들 본인들 앞가림도 못하는 놈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저에게 연애 기술 전해준다고 한참 난리였어요. 지금도 지연 씨 언제 소개해 주냐고 툭하면 연락 와서 조르고 있죠.”
친구들 생각이 났는지 강현이 작게 웃었다.
지연은 차민우의 친한 친구들을 한 번도 따로 소개받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매우 생소하면서도 괜스레 기대되었다.
남자친구의 친한 친구들과 만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
“저도, 빨리 만나보고 싶어요. 강현 씨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