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김칫국 한 사발 (53/85)


53. 김칫국 한 사발
2023.01.30.



 
얼굴을 잔뜩 찌푸린 민우는 강주란과 함께 S 호텔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에 앉아있었다.

원래 2주 전으로 예정되어 있던 자리.

강주란이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중요하다는 자리였다.

하지만 오늘 자리에 함께 오기로 했던 차승조 회장은 함께하지 않았다.

온유 제약 투자 건이 이강현에게 넘어간 뒤 차승조 회장은 민우가 꼴 보기 싫다면서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였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2주 뒤로 일정이 잡힌 것이 오늘이었다.

자리에는 강주란과 김 마담이라고 불리는 주란의 지인 김옥자.

그리고 앳돼 보이는 여자와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진은 이미 보셨겠지만, 여기는 C&C 글로벌 차민우 상무님이세요. 올해 서른넷 되셨어요. 엄청 훤칠하시고 멋지시죠? 내가 보기엔 배우 해도 빠지지 않을 것 같네요.”

김 마담이 민우를 가리키며 호호 웃더니 소개를 했다.


“임원 승진도 참 빠르게 하셨죠. 아시죠? C&C 같은 글로벌 회사는 아무리 총수 가족이어도 능력 없으면 가차 없는 건? 능력이 좋으신 건 다 아버님이신 차승조 회장님 닮아서 그런가 봐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 차민우였지만, 주먹을 말아 쥐며 꾹 참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며칠 전 주란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뭐라고요? 선이요? 어머니…….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세요. 한번 실패했으면 이제 됐잖아요, 인제 그만 좀 하세요.”


“한번 실패했으니 이번엔 더 잘해야지! 지연이는 이제 떠나간 배야. 걔는 포기해야지. 그렇다고 정세아? 걔가 말이 되니? 그 애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하아…….”


“너, 더 올라갈 생각이 없는 게야? 여기서 머물러 있을 거냐고! 네가 가진 그 자리…… 너 혼자 힘으로 되기 어려웠던 거 너도 잘 알지 않니! 가뜩이나 지연이 일로 지금 회장님 눈 밖에 나고 있는데……. 그 자리 보존하려면 잘 생각해야지. 너도 이제 해봤으니 알 거 아니냐. 사랑? 그거 얼마 안 가는 거, 이제 알 때도 됐잖아! 마음 같은 거 다 떠나고 너에게 남는 게 무엇일 것 같니? 결국, 네 자리밖에 남을 것이 없어.”


“세아 임신했어요, 어머니. 세아가 제 애를 가졌다고요.”


“알아!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 자리를 만들었겠어? 애는 내가 알아서 잘 키울 테니 넌 다른 거는 하나도 신경 쓰지 말아. 다 이 엄마가 알아서 하마. 이번에 만나면 잘해야 해. 큰일 하는 사람들에게 안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니. 이번에 잘해서 회장님에게 다시 잘 보여야지.”


“여기는 PP 제과 막내 따님이신 박민경 씨. 지금 Y대 3학년이에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민경입니다.”

“민경 씨가 공부도 잘했지만, 여러모로 참 뛰어나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신부수업 받고 계셔요. 특기가 플루트 연주와 요리라고 하니, 누가 남편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좋으실 것 같아요. 아내가 음식도 잘하는데, 예술적으로도 뛰어나니 얼마나 좋아요. 호호호.”

여자를 소개하던 김옥자는 경박스럽게 크게 웃었고, 소개를 받은 박민경이라는 어린 여자는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원래 오늘은 첫 만남이라 당사자 두 분만 만나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두 분 사모님들이 이 자리에 관심이 참 많으시고 얼굴 좀 보고 가시겠다고 그렇게 성화이셔서 함께들 나오셨네요. 반갑습니다. 강주란 사모님, 최효진 사모님.”

소개받은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우아하게 인사했다.

주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두 분 사모님, 간단하게 하실 말씀들 있으시면 전하시고, 오늘은 두 사람 편하게 만나도록 저희는 빠져주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데 이렇게 계속 함께 있으면 두 사람 어색해서 얘기도 잘하지 못할 수 있으니.”

김 마담이 이렇게 말하고는 두 사모님을 쳐다보았다.

주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회사가 크고 우리 차 상무가 능력이 많다 보니 회사 일로 참 바빠요. 이렇게 바쁠 때일수록 안사람 손길이 참 절실히 필요할 텐데, 그러지를 못해서 옆에서 어미로서 참 안타까웠네요. 민경 양, 착하고 배려심도 깊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 차 상무와 좋은 인연이 되면 참 좋겠다…… 생각 많이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니 그 생각이 더해지네요.”

어울리지 않는 온화한 미소를 얼굴 가득 품고는 주란이 말을 이었다.


“제가 우리 민우 하나라,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며느리 생기면 딸처럼 예뻐하고 아껴줘야지……하고 항상 생각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예쁜 민경 양 실제로 보니 우리 집안과 인연이 생긴다면 너무 좋겠다는 느낌이 확 오네요.”

고개를 돌려 박민경을 향해 말하자, 여자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좋으니? 우리 민우가, 네가 봐도 참 잘생겼지?’

근사한 외모의 민우에게 박민경이 반했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라 주란은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희가 다 고맙죠. 민경이 얘가 평소 꿈꾸던 이상형이 능력남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차 상무님이 아주 딱 맞네요. 능력 좋아서 빠르게 임원 승진하시고, 외모도 이렇게 근사하시고. 거기다 어머님 품성이 이렇게 어질고 온화하시니……. 이 자리 마련해준 우리 김옥자 여사에게 참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서로 좋은 말만 오고 가며 대화를 하던 두 사모님은 김옥자가 자리를 피해주자며 얘기를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따로 나가서 이야기 이어가고, 오늘은 젊은이들끼리 이야기 나누게 해드리죠.”

차민우는 이 상황이 짜증은 났지만, 머리를 가득 채운 주란의 말에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음 같은 거 다 떠나고 너에게 남는 게 무엇일 것 같니? 결국, 네 자리밖에 남을 것이 없어.”

이미 떠나간 은지연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세아, 강지현의 얼굴들이 머릿속 한편에 떠올랐지만, 당장 방법도 없고 오늘만은 잠시 잊어 두기로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민우입니다. 우선 배고프실 것 같은데 뭘 좀 시킬까요?”

얼굴에 어색한 억지 미소를 걸고 이야기를 했지만, 상대방은 그런 것 따위 모른 채 눈을 반짝이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한편, 세아는 요즘 입덧이 온 건지 자꾸 빵이 먹고 싶어, 크림빵이 유명하다는 S 호텔 1층 제과점에 와 있었다.

이제는 빵도 동네 빵은 못 먹겠다며 호텔 제과점을 고수하는 세아였다.


‘남들은 임신하면 남편들이 먹을 것 다 사다 주고 보살펴 준다는데 난 이게 뭐람. 후…….’

먹고 싶은 빵을 이것저것 고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임신 소식을 알리고 나서도 민우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주말 정도만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도 방은 따로 사용하였다.

주말 식사할 때 가끔 서로 안부만 묻는 상태인지라, 남보다도 서먹한 상황.

요리를 배우기 위해 매주 한두 번 방문하던 스티브 셰프의 스튜디오도, 지연과 마주친 클래스를 마지막으로 더는 가지 않고 있었다.

세아가 임신한 것을 안 스티브가 더 이상의 만남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외로웠다.

하지만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못 찾고 있었다.


“결국, 아무도 내 편이 없어. 차민우도, 스티브도.”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하며 빵을 계산하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아는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온 김에 여기 라운지에서 차나 한잔하고 가요. 여기 빙수도 맛있다는데 그걸 먹든가.”

“좋지요, 좋지요. 저도 강주란 여사님과 이렇게 이야기가 잘 통할 줄 몰랐네요. 그나저나 우리 딸애가 차 상무와 긴장하지 않고 얘기 잘했으면 하는데 애가 워낙 숫기가 없어서 걱정이에요.”

“어휴~ 그게 다 순진하고 착해서 그런 거죠.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느라 남자 만날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런 건 흠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네요. 오히려 우리 차 상무가 좀 무뚝뚝한 구석이 있어서 얘기를 잘 이끌려나 모르겠어요. 미래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 좀 잘해서 점수 좀 따야 하는데. 어머, 내가 너무 앞서나갔나요? 호호호.”

주란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세아에게 생생히 들려왔다.


‘차 상무? 우리 민우 씨 말하는 거잖아? 그런데 미래의 아내? 이게 무슨 소리야?’

세아는 빵 계산을 마친 후, 잠시 기다렸다가 주란과 일행이 자리한 호텔 라운지 자리 근처에 눈에 안 띄게 자리를 잡았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듯 주란은 목청 높여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뭐 이미 아시겠지만, 우리 차 상무가 한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법적으로는 깨끗해요. 들으셨죠, 그건?”

“네, 김 마담 통해서 이미 들었습니다.”

“우리 차 상무가 참 잘했는데, 뭐가 그리 안 맞았는지 그렇게 됐더라고요. 하지만 본인도 그 일 겪으면서 안사람에게 더 잘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있는지라, 우리 예쁜 민경 양에게는 잘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원래 며느리는 시어미가 잘해 줘야 하잖아요. 저는 민경 양 너무 맘에 들어서 우리 민우랑 인연만 되면 딸처럼 잘해줄 것 같은데. 어머, 내가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나요?”

고개를 젖히며 주란이 크게 웃었다.


“저도 차 상무님이 참 마음에 드네요. 듬직하고 훤칠하고, 게다가 일도 그렇게 성공적으로 잘하고. 아드님이 잘나서 참 좋으시겠어요. 기회만 된다면 저도 사위로 불러보고 싶네요. 호호호.”

몇십 분 본 것이 다일 터인데 뭐가 그리 맘에 드는 건지 두 명의 사모님들은 끝없이 칭찬을 이어나갔다.


“그렇죠, 그렇죠. 원래 이런 만남은 첫인상이 중요한 건데, 두 분 사모님이 척척 잘 맞으시니 날 빨리 잡겠다…… 싶은 감이 확 오네요.”

옆에서 김 마담이 추임새를 넣으며 두 사모님의 기분을 맞추었다.


“두 사람, 몇 번 만나게 하고, 길게 잡지 말고 한두 달 있다가 바로 상견례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머,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 저도 마침 같은 생각 하고 있었어요.”

“원래 잘 되려는 일들은 순식간에 진행되고는 하잖아요. 제 생각엔 이번 우리 만남이 그런 것 같아요.”

PP 제과 최효진이 한술 더 떠 이야기했다.

최효진은 이미 차민우에 대해 알아보았다.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차민우의 그 전 부인이 온유 제약 막내딸이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다행히 법적으로 깨끗하다고 하니, 크게 문제 되지도 않았다.

자신만 해도 2번째 결혼 아니었던가.

살아보니 큰 문제 없었다.

게다가 C&C 글로벌이라니!

중견기업 PP 제과도 최근 급상승하고는 있었지만, C&C 글로벌은 급이 다른 회사였다.

게다가 훤칠하고 빠르게 임원 승진까지 한 차민우를 딸애가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이 나이에 무슨 선이냐고 바락바락 대들던 애가, 차민우 사진을 보여주자 바로 태세 전환을 하더니만.

실제로 보니 아주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대학교 들어가더니 학교 선배들이나 동아리 동기들이라며 늦게까지 함께 몰려다니는 남자애들이 걱정되고 꼴 보기도 싫었었는데.

이렇게 괜찮은 자리라니! 제발 차민우와 자신의 딸이 잘 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강주란과 최효진은 죽이 척척 맞아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걸 주변에 있는 정세아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차민우. 내가 네 애를 가졌다는 데도 선을 보러 나왔다고?’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정세아는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내 배 속에 차민우 네 아기가 있는데, 어떻게 이런 때 다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하는 거야!’

분노가 온몸을 채웠다.

이렇게 씹다 버린 껌처럼 버려질 수 없었다.

무슨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난, 이렇게 버려질 수 없어, 차민우. 난, 난 너와 절대 이렇게 끝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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