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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새로운 협력자 (54/85)


54. 새로운 협력자
2023.02.02.



 


“과장님, 회의 가신 중에 핸드폰으로 전화 몇 번 왔었어요.”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주연 대리가 알려주었다.


“그랬어요? 시끄러웠겠다. 미안, 대리님.”

“그런 건 아닌데 여러 번 전화 왔었으니 얼른 확인해보셔요.”

깜빡하고 책상 위에 두고 간 핸드폰을 들어 올려 확인하자 의외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보고 지연은 전화를 걸지 말지 잠시 고민되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걸었다.

Rrrr Rrrr-


“안녕하세요, 김지원 여사님.”

고급스러운 호텔의 야외 커피숍에 김지원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지연이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오랜만이구나.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네.”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연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업무 중이었을 텐데 시간 내주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하지만 오래 있기는 어렵고 1시간 안에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합니다.”

한때 자신의 둘째 아들 차재우 짝으로도 생각했던 은지연.

하지만 인연이 되지 않아 주란의 아들에게 보내줬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가끔이지만 네 엄마하고 연락은 하고 있어 너 잘 지내는 건 멀리서 듣고 있었어. 네 엄마와 몇 달 전부터 다시 연락하게 되었거든.”

우아한 미소를 짓던 지원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며 지연을 쳐다보았다.


“그러셨군요. 예전에 어머니께 두 분 친하셨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잘됐네요. 그런데…… 오늘 보시자고 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신 거죠, 여사님?”

차민우와 함께 살 때, 호적상으로는 김지원이 자신의 시어머니였다.

하지만 강주란이 있다 보니 지원에게 ‘어머니’라는 표현은 쓰지 못했고 지원에게는 항상 ‘여사님’이라고 불렀었다.

지연에게 그녀는 그렇게 살갑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었고, 만날 때면 항상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가깝게 지낸 적이나, 따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오늘의 호출은 꽤 의외였다.


“이유라. 물론 있지. 너나 나나 이렇게 따로 볼 정도로 서로에게 잔정 있었던 사이는 아니니까. 하지만 오해는 말아주렴. 난 너를 미워하거나 싫어한 적은 없었단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오히려 적정선에서 대화해 주시고 대해주셔서 사실 제일 마음이 편했던 분이셨어요.”

“그래, 알아주니 고맙구나. 내가 보자고 한 건…….”

잠시 말을 끊고 앞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신 지원이 지연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즘 온유 바이오 사장님인 네 오빠가 C&C 주식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듣는 귀가 많아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 오빠가 따로 C&C 글로벌 주식을 모을 일이 생각이 안 나서 말이지. 혹시 네가 아닐까 생각했다만. 맞니?”

정곡을 찌른 지원의 물음에 지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맞는다고 하기도, 아니라도 말하기도 어려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물론 네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지. 네가 꼭 나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짓는 김지원의 모습에서 그녀의 의도를 찾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가 대략 얼마를 모았을지 모르지만, 그 주식들만으로는 안타깝게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좀…… 못 미칠 거다. 물론 꽤 큰 영향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지연이 김지원의 말을 들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네가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C&C 글로벌은 내 아버지가 일으킨 회사였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C&C 글로벌의 최대 주주는 차승조, 그리고 두 번째 주주가 나 김지원이지.”

C&C 글로벌의 창업주 이야기는 예전에 한두 번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워낙 차승조 회장의 이야기를 많이 했던지라 그 이면의 내력은 잊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나와 손잡아 보는 것은 어떻겠니?”

 

***

김지원은 어려서부터 무척 똑똑했다.

아이비리그 최고의 학교에서 수석 입학과 졸업을 하였고, 아버지 회사에서 경영을 배우려는 의지도 강했다.

하지만 아버지 김권중 회장은 무척이나 보수적인 가장이자 기업인이었고, 회사를 딸에게 물려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지원은 사원으로 입사하여 다양한 업무를 이루어내며 이사까지 빠르게 승승장구했지만, 그 위로 올라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부모님의 소개 하에 결혼 전제로 만나고 있던 차승조.

당시에는 상무였던 그와 함께하던 프로젝트의 훌륭한 성과들을 차승조의 업적으로 몰아주고는 그를 사장으로 승진시켰을 때는. 절망에 가까운 상실감을 느꼈었다.

회장 김권중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이 되어주던 차승조를 절대적으로 믿던 김 회장은 차승조를 김지원과 결혼시켰고, 바로 뒤 차승조를 차기 회장으로 밀어주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김권중 회장의 임종 직전,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주식을 차승조가 아닌 딸 김지원에게 양도하였다.

평소의 김권중 회장이었다면 차승조에게 양도했을 주식들.

김지원과 차승조가 결혼한 지 5년째 되는 해였고, 둘 사이에는 아들 둘과 딸 하나의 자식들이 있었다.


“이 주식들은 절대 넘기면 안 된다. 이 아비가 회사에 눈이 멀어 모든 일을, 네 인생을 망쳐놓았어. 미안하다. 하지만 꼭……. 꼭 지켜다오. 이 회사는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회사야.”

김지원만 따로 불러서 했던 말들.

전후 사정도 없는 그의 말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지원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차승조와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 김권중 회장이 돌아가시고부터, 지원은 하나둘 알게 되었다.

차승조에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자관계들, 그리고 강주란과 차민우.

그 뒤 차승조는 다양한 방법으로 김지원이 가진 주식들을 뺏으려고 했지만, 지원은 주식만은 절대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경영에서도 자신의 병으로 잠시 손을 놓았을 때 빼고는, 계열사 경영으로 꾸준히 참여했다.

지원은 항상 느끼고 있었다.

주식에서도, 경영에서도 손을 뗀다면 시커먼 구렁이 같은 차승조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삼켜 버릴 것이란 걸.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자식 셋 모두 임원으로 C&C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차기 후계자 논의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될지 아무도 모를 상황이었다.

이미 회사에는 차승조의 친인척 몇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C&C 글로벌의 근간인 김권중, 김지원과 단 한 방울도 피가 섞이지 않은 차승조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 차민우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차승조는 차민우를 자신의 입맛대로 마구 주무르며 빠르게 성장시켜 주고 있었다.

그렇게도 차민우 본인이 원치 않는 은지연과의 결혼까지 시켜가며.

이대로라면 모든 것이 집어 삼켜져 버릴 것이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이미 알아보셨다고 하시니, 거짓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C&C의 주식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너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모으고 있는 주식만으로는 차민우에게 어떤 큰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밀하게 잡은 것은 아니었거든요.”

“앞으로 두 달이 채 안 남았지. C&C 글로벌 주주총회.”

“주주총회…….”

사실 지연은 그것까지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고 있지는 않았었다.


“네가 나와 손잡는다면, 나는 한번 일을 벌여보고 싶구나.”

“무엇을요?”

“판을 뒤엎어 보고 싶어. 차승조로 돌아가는 이 C&C의 판을.”

지연은 김지원과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민이 많을 테니, 당장 답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2주 안에 주면 좋겠지. 잘 생각해보고 알려다오.”

차민우와 함께 살 때도 항상 생각했었다.

김지원 여사님은 왜 차승조 회장과 함께 살고 있을까?

함께 사는 집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품었던 사람을.

그리고 뻔뻔하게 그의 자식을 데리고 오고, 죄책감 없이 주란과 본가를 넘나들며 사는 사람을 무슨 마음으로 보며 살고 있을까…… 하고.

분명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 테지.

하지만 분명 쉽게 그 자리를 포기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겠지.

승승장구하는 차민우의 앞날에 뭔가 제동을 걸기 위해 모으게 된 C&C 글로벌의 주식.

하지만 생각해보면, 차승조를 그대로 두어서는 차민우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김지원의 말만 듣고 단번에 결정할 만한 사안은 아닌지라 지연은 고민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



“차민우 상무님, 한 가지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또다시 프라이빗 바에서 만나게 된 차민우.

강지현은 오늘은 꼭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과 나, 무슨 사이인지. 정상적인 만남인지……. 아니면 당신의 심심풀이 땅콩 같은 관계인지.

차민우는 강지현의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앞에 놓인 채워진 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강지현, 우리 사이가 무슨 정의해서 만나야 하는 사이였던가?”

‘어이가 없군, 강지현. 네가 좋다고 해서 만나줬더니 어디서 내 뭐라도 되는 듯이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가뜩이나 머리도 아프구만.’

민우는 며칠 전 PP 제과 막내딸과의 만남 이후,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사랑 따위, 만나보고 살아보니 별거 없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 예쁘게만,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살아보니 별거 없었고, 오히려 서로의 추한 면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은지연?

뒷배경도 좋고 나 좋다고 다 해줘서 편리했지만.

이제 지나고 보니 그런 사람이야 널린 게 이 세상이었다.

아버지가 대기업 회장이었고, 나 역시 그 대기업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상무 아닌가.

이제 내가 갈 노선을 잡아야 할 때였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 내가 네 남자친구냐고? 아니면 결혼을 생각하냐고?”

떨고 있는 강지현을 앞에 두고, 민우가 냉기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모르겠어? 내가 언제 네게 좋아한다고, 내 사람이 되라고 한 번이라도 말한 적이 있던가?”

차민우의 비수 같은 말들이 지현의 심장을 쥐어뜯었다.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던 지현의 두 눈에 고통스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헛똑똑이였네. 우리 비서님이. 서로 잠깐씩 만나서 기분 좋은 시간 함께 한 거면 된 거 아니야? 뭘 더 바랐어? 돈?”

마치 돈을 노리고 차민우에게 접근한 사람처럼 몰아가는 그의 말에 강지현은 망연자실해졌다.


‘그래……. 그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감정을, 미래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지. 그저 이 사람이 필요할 때,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곳에서 나를 불렀을 뿐.’

그리고 그 자리에 좋다고 행복해하며 찾아간 것은 자신이었다.


“필요하면 얘기해, 돈. 원하는 게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웬만큼 챙겨 줄 수 있어. 알잖아? 나 돈 많은 거?”

그렇게 말하던 차민우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 그녀의 앞으로 던지듯 밀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비워진 자신의 잔을 다시 채우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오늘은 이대로 돌아갈 건가? 강지현 비서님?”

느른하게 웃던 민우가 팔을 뻗어 지현의 팔을 쓸어내렸다.

강지현은 말문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억지로 쥐어 짜낸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셨네요. 그리고 제 오해였다면, 이제 마음 접겠습니다.”

떨리는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가 지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꾸벅 숙여 묵례하고는 그의 앞에서 돌아 밖으로 향했다.


“그런 마음으로 일 잘할 수 있겠어요, 강지현 비서님? 한번 잘 고민해 봐.”

그녀의 뒤에 대고 말하는 차민우의 비웃는 듯한 말이 작게 들려왔다.

꾹 참았던 눈물이 지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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