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흔하디흔한, 그러나 내게는 새로운 (58/85)


58. 흔하디흔한, 그러나 내게는 새로운
2023.02.16.



 


‘갑자기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주란의 연락에 세아는 괜스레 불안했다.


‘혹시나 차민우 약혼에 관한 얘기일까?’

그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커진 세아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진짜 이 집안은 모두가 미친 게 틀림없어. 어떻게 자기네 손주를 가졌다는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와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하는 거지?”

배 속의 아이는 C&C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절대 이 자리를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지키지? 그러다 무일푼으로 쫓겨나면? 당장 힘없는 것은 난데?’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뒤엉켜 세아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었다.

딩동-


“오셨어요, 어머님.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밖에 꽤 덥죠?”

머리 아픈 생각은 잠시 넣어두고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주란을 맞이했다.


“무슨 마음에도 없는 안부 인사를 묻니. 그냥 하던 대로 해.”

주란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세아의 말을 자르고는 거실에 앉았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어떤 얘기를 하시려고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셔요, 어머님?”

주란은 평소에도 세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넌 도대체 어쩔 셈이야?”

“뭘요, 어머님?”

“너랑 네 배 속의 애! 네 애 말이야!”

“제 애요? 이 아이는 민우 씨와 저의 아이예요, 저만의 아기가 아니고.”

“그건 낳아봐야 알 테고!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네가 설마 우리 집안에 들어와 민우와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애 아빠가 아기와 아기 엄마를 책임져야죠.”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말이 되는 말을 하렴.”

“왜요……. 민우 씨 다른 기업 여자와 결혼이라도 시키시려고요?”

순식간에 표독스럽게 변한 세아의 표정을 보던 주란이 흠칫하였다.


“모른척하지 마세요. 민우 씨 다른 기업 딸내미와 선보게 하신 거.”

“네가 그걸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겠구나. 그래, 뭐 이왕 알았으니 내 말하마. 우리 민우 곧 결혼할 거다. 이번에는 민우도 아주 적극적이고 둘이 이미 가까운 사이가 됐어. 한마디로, 민우가 원하는 결혼이야.”

“하! 차민우가 그 여자와의 결혼을 원한다고요? 자기 아기를 가진 저를 두고요?”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세아도 느끼고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질 대로 멀어졌다는 것을.

특히나 차승조 회장과 만남 이후에는 벌레 보듯이 자신을 보던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완전히 떠난 듯 보이기도 했다.

마음도 몸도 모두 떠난 그를 잡아서 뭘 얻을 수 있을까?


‘영리하게 생각해야 손해를 안 볼 텐데…….’

짧은 순간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뭐가 자신에게 제일 좋을지 고민하는 세아를 더는 기다리지 못한 주란이 말을 꺼냈다.


“세아, 너 돈 좋아하잖니. 그냥 떨어지라는 것 아니야.”

그녀의 말에 세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역시, 반응을 보이는군. 그래……. 쟤는 돈이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액수를 밝혔다.

몇 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커진 액수.


“너 돈 필요할 텐데. 10억, 주마.”

하지만 의외로 이 말에 세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란은 이 미끼를 덥석 잡지 않는 세아의 모습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너…… 민우 결혼생활을 깬 장본인이고, 그렇다고 민우와 현재 좋은 사이도 아니잖니. 혼인신고를 한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쉽게 말하면 둘이 좋아서 잠깐 살았을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부부도 아닌 보통 남녀 사이에 많은 흔한 사이였던 거야.”

세아를 홀려야 하는 주란은 더욱 빠르게 말을 해갔다.


“만약 네가 이번 민우 결혼을 망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을 거다. 너보다는 우리가 가진 게 많거든.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렴. 그냥 내쳐질래?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돈이라도 받고 헤어질래?”

“아기는요?”

“아기?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게 제일 좋지.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아이는 나중에 우리가 키워도 되고.”

‘하! 그러니까 이 말은, 푼돈 쥐여주고 내치고는 아이는 데려가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 상황에 세아의 입꼬리가 굳어져갔다.


“어머님, 아드님과 손주의 가치를 너무 낮추셨네요. 10억이 뭡니까. 최소 50억은 주셔야 얘기가 되죠. 그리고 아이는 제가 키울 거니까 꿈도 꾸지 마시고요. 남의 손에 우리 애 키우게 하지 않을 거예요.”

민우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아이가 있어야 나중에라도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스멀스멀 세아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들이 퍼지고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자신을 부정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났다.

짧게 몇 개월을 사귀던 연인 사이에도 헤어질 때는 예의로라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지금 자신의 어머니를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 있었다.

굳이 만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나를 이렇게 길가 휴지조각보다 못하게 취급하려는 거야? 이 억울한 마음을 어떻게 메꾸지? 응? 차민우. 나 너무 억울한데?’

 

***



[토요일 오전 괜찮으실까요?]

[그래, 괜찮을 것 같구나.]

[그럼 시간은 오전 10시, 장소는 메시지로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다. 좋은 대답 듣기를 기대하마.]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김지원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연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복잡한 지연의 마음과는 다르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다.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의 옥상 정원은 한두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르러 나와 있는 것을 빼고는 한가로워 보였다.

권지수 작가와의 협업도 끝났고, 광고 제작도 완료되었다.

이제 완성된 광고들과 콘텐츠들을 미디어에 노출하는 일정만 남아 프로젝트 TF로서의 업무도 대략 2주가 남지 않았다.

시간 나는 틈틈이 차승조 차민우 부자의 뒤를 캐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어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쁜 사이사이에도 강현과의 데이트도 조금씩 즐기고 있었다.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강현의 친구들을 만났었다.


“강현 씨, 나 너무 떨려요.”

목적지로 향하는 강현의 차 안, 지연이 너무 긴장했는지 두 손을 꼭 잡고 꼬물거리고 있었다.

손에 한가득 땀이 찬지도 모른 채.


“지연 씨 왜 이렇게 떨어요? 그냥 친구들 소개받는다 생각해요. 긴장할 것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그래요. 남자친구의 친구들 처음 만나는 날인데…….”

“제 친구들 모두, 아주 많이 웃긴 녀석들이에요. 그리고 좋은 녀석들이구요. 제가 지연 씨 이야기 자주 해서 그 녀석들은 지연 씨를 이미 자기들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요. 너무 친한 척해도 이해 좀 해줘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강현이 쿡쿡 웃었다.


“제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무슨 얘기 했는데요?”

“음……. 무척 예쁘고 똑똑한데, 가끔 허당이라 너무 귀엽다?”

“그게 뭐예요! 왠지 대화의 포인트가 허당이었다……일 것 같은데. 또 무슨 얘기 했는데요?”

당황하던 지연이 다시 강현을 채근했다.


“그 이상은 비밀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좋은 얘기만 했으니까.”

“치……. 아닌 것 같은데.”

지연은 괜히 삐진 척을 해보았지만, 속으로는 기쁜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남자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눴다는 게 너무나 기쁜 지연이었다.


“강현이 이 녀석, 자기가 찔리니까 비밀이라고 했겠네요.”

껄껄 크게 웃으며 강현의 친구 이장우가 말을 이었다.


“지연 씨에게 관심 있다고 처음 우리에게 말했을 때, 강현이 저 자식이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몇 년 사이 연애 세포가 다 죽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지연 씨와 만날 횟수를 늘릴 수 있겠냐. 같은 회사 사람이라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어쩌냐 등등!”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맞아, 맞아.’라고 말하며 장우의 이야기에 동조했다.


“만나거나 통화하면 매번 지연 씨 얘기였다니까요. 귀여운 녀석!”

“그만해라.”

새삼 쑥스러운지 강현이 친구들을 말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한눈에 반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맨날 자신은 상대방의 지성과 성격을 볼 거라며, 첫눈에 반할 일은 없을 거라고 큰소리치던 놈인데……. 게다가 볼수록, 만날수록 매번 더 좋아진다고 하소연까지 했었어요. 저희에게는 참 신선한 경험이었네요. 강현이한테 그런 말까지 듣고. 지연 씨가 저 녀석을 확 바꿔놓으셨어요.”

자신은 별생각 없이 지나왔던 시간을 고민하던 강현.

지연과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고 싶어 했던 강현.

언제나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강현이, 친구들에게 그런 말들을 하며 고민했다고 하니 고맙기도, 기쁘기도 그리고 행복하기도 했다.

강현의 친구 이장우의 집에서 모인 모임에는 강현과 지연을 포함해 네 커플이 모였다.

커다란 주택 뒤쪽의 넓은 뜰에는, 야외 BBQ를 할 수 있는 장비들과 테이블 한가득 음식들과 음료들이 차려져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의 절제된 강현의 모습을 주로 보았기에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조금은 목소리를 높이는 그를 지연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강현의 친구들 외에도 그들의 부인, 혹은 여자친구들이 함께 왔는데 다들 오래 본 사이인지 서로서로 친한 듯 보였다.


“너무 반가워요, 지연 씨. 매번 강현 씨 혼자 와서 안타까웠는데.”

이장우의 부인으로 소개받은 사람이 지연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저희 셋은 일찌감치 커플들이 되었던지라 강현 씨 솔로인 걸 5년 넘게 보았었거든요. 항상 모이면 와서 즐겁게 대화하고 어울리지만, 어느 순간 외로워 보였다고나 할까……? 다들 강현 씨 보면서 마음이 짠하곤 했죠.”

그녀가 내미는 칵테일 잔을 받아들자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잔을 부딪혀왔다.


“그래서 소개팅 해준다고 해도 모두 다 마다하더니 이렇게 멋지고 예쁜 여자친구를 결국 모셔왔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함께 자주 만나고, 지연 씨 괜찮으면 따로 만나도 좋고요.”

결혼은 했었지만, 남자친구가 생긴 건 처음인 지연에게 이런 경험들은 모두 생소했고 새로웠다.

원래 이렇게 다들 친절한 건지…… 아니면 강현의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인 건지.


“감사해요. 전 언제든 좋아요. 이따 연락처 드릴게요. 저도 연락처 알려주세요.”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넓은 뜰에서는 잔디 냄새가 퐁퐁 솟아났고, 한가득 차려진 음식들도 모두 맛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며 크게 웃는 강현을 보니 지연도 함께 기분이 좋아졌다.


 


“긴장은 좀 풀렸어요? 제 친구들 다 수다쟁이라 정신 하나도 없죠?”

친구들과 대화하던 강현이 슬며시 지연 옆으로 와 물었다.


“아니요! 너무 즐거워요. 어쩜 다들 이렇게 친절하고 재미있으신지…….”

“즐거운 시간이라니 너무 다행이네요. 친구들이 지연 씨 너무 예쁘고 감각 있다고 엄청나게 칭찬하고 있어요. 만들어온 음식들도 너무 맛있다고 하고요.”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한식 몇 가지를 준비해 왔었다.


“좋아해 주신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뭐가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줘서요. 그리고 이렇게 제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줘서요.”

“제가 고마운걸요.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꼭 다시 만나고 싶어요.”

강현의 친구들은 권지수를 알고 있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비슷한 시기에 미국 유학을 하고 있었고 그중 둘은 강현과 함께 같은 학교에 다녔기에 지수를 잘 알고 있었다.

지수와 사귈 때의 강현은 친구들에게 대부분 고민 상담을 하고는 했었다.

갑자기 사라진 권지수.

그러다 갑자기 뻔뻔하게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사귀자는 권지수.

강현 친구들과 만남을 원하지 않던 그녀.

그러다 보니 강현의 친구들도 권지수와 함께 만나기를 꺼렸고, 강현은 여자친구와 친구들 사이에서 마음 어려워하는 시간이 많았었다.


“강현아, 지연 씨 너무 좋은 분이신데? 네가 반한 이유를 잘 알겠어. 우리 와이프도 지연 씨 사람 너무 괜찮다고 계속 얘기하네. 잘 잡았다, 이눔아.”

항상 강현을 형제처럼 걱정해 주고 챙겨주는 장우가 강현에게 은근슬쩍 지연의 칭찬을 해서 강현은 괜스레 뿌듯해졌었다.

강현에게도 여자친구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며 칭찬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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