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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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023.03.06.
“오늘 참석해 주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이제 차민우 군과 박민경 양의 약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정확히 2시가 되자 사회자가 약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방송을 들은 세아가 크리스털 룸 앞으로 가자 이미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자 그가 세아의 귀에 나직하게 말했다.
“식장 바로 앞에서는 저지당할 수 있어서 5분 전에 파우더룸에서 오프닝 코멘트 하고 나왔습니다. 들어가면서 바로 라이브하면 되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세아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어렸다.
“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맡아드릴까요?”
호텔 직원이 세아 일행이 들고 있는 커다란 가방들을 보더니 친절하게 질문했다.
“아닙니다. 이건 저희가 들고 있어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없으면 안 되는 장비들이었다.
세아와 일행을 위해 호텔 직원이 크리스털 룸의 커다란 문을 열어주자, 차민우와 박민경이 한눈에 보였다.
그 둘에게만 조명이 비치고 있어 다른 곳은 어두웠고, 오직 두 사람만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두 사람.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 둘을 보는 세아에게 물밀듯 다양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가장 큰 감정은 역시나 분노였다.
‘저기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그 자리, 그 빛나는 웃음 모두 내 것이었다고!’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은 그들이었기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제…… 시작해주세요.”
세아가 작게 속삭이자 함께 왔던 이들이 옆에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 안에서 카메라를 꺼내었고, 바로 안쪽을 촬영하며 방송을 시작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중들의 궁금증을 해소하여 드리는 쇼킹 얼라이브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리 예고해드린 대로, 유명 대기업 자제이자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차모 씨가 임신한 여자친구를 버리고 약혼식을 하는 현장을 급습하였습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라이브 방송에 약혼식장 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차모 씨의 여자친구인 정모 양은 현재 임신 중으로, 차모 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임신 사실을 수차례 알리고 함께 병원도 가서 임신 사실을 확인하였지만, 차 씨와 그의 가족들은 이 약혼식을 강행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만을 비추고 있는 강한 조명 때문인지 처음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눈치채지 못했던 차민우와 박민경이었지만 곧 뒤쪽에서 방송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오늘 오전에 올린 영상 모두 보셨겠죠? 정모 씨가 차모 씨와 주고받은 메시지, 병원 기록 그리고 일부 녹취록에서 확인하셨듯이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사랑만을 원하던 정모 씨를 쓰레기 버리듯 버려버렸습니다. 차모 씨는 유명 대기업 C&C의 막내아들로 현재 상무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그의 얼굴을 보여드리죠.”
그렇게 말하며 카메라를 차민우 쪽으로 돌리자, 그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홀 양옆으로 흩어지며 카메라를 피했다.
대부분 사람은 이 방송이 어떤 방송인지 알았기에 얼굴이 노출되기를 극구 꺼렸다.
정세아가 불러들인 이들은 X튜브에서 정·재계, 연예인들의 확인되지 않은 가십들을 노출하는 방송으로 인기가 많은 ‘쇼킹 얼라이브’ 팀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 채널은 현장을 급습하거나, 거물들도 건드려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구독자와 각 콘텐츠 뷰 수가 어마어마했다.
유명 대기업의 자제, 거기에 사랑과 배신이라는 3박자가 딱딱 맞는 이 소재를 이들이 놓칠 리 없었다.
대기업을 건드릴 때는 여러 위험이 있음을 이들도 알았지만, 그런데도 이들은 정세아와 한배를 타겠다고 했다.
실시간 반응을 본다면, 결론적으로 실보다 득이 많은 사건이었다.
“차민우! 어떻게 나에게 이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3년 전에 네가 날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내가 물러나 줬잖아. 그런데도 기어이 나를 찾아내서는 꾀어내서 함께 살자고 데려오더니, 이제는 아기까지 생겼는데 나를 이렇게 버려 버린다니……. 이게 말이 돼? 우리 아기잖아. 당신도 어머님도 그렇게 원하던 우리 아기잖아! 흑흑.”
정세아가 오열하며 소리치자 쇼킹 얼라이브 팀은 그녀를 화면 가득 담았다.
처절하면서도 애처로운. 아름답지만 아기를 가져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가 방송 안에서 보였다.
“다른 거 바라는 거 없어 민우 씨. 아기……, 우리 아기! 나는 버려도 좋으니 우리 아기만은 받아줘, 제발! 우리의 사랑으로 생겨난 아기잖아. 아기가 무슨 죄야!”
이렇게 말하던 정세아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쇼킹 얼라이브 팀은 카메라를 들고 차민우에게 다가갔다.
“뭐 해! 당장 치우지 못해! 야! 너희들 뭘 그렇게 멀뚱히 보고만 있어! 막아!”
차승조 회장의 화가 난 목소리가 약혼식장 안에 쩌렁쩌렁 울렸고, 이 목소리마저 라이브로 방송되어 흘러나갔다.
호텔 관계자들이 쇼킹 얼라이브 팀들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에게 밀릴 쇼킹 얼라이브 팀이 아니었다.
2명은 호텔 관계자들을 막고, 한 명은 계속 방송을 지속했다.
“차 상무님,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리고 옆에 계신 약혼녀분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약혼을 감행하신 건가요? 차 상무님의 정리되지 않은 과거를 모두 안고 가신다는 결심이셨던 겁니까?”
카메라가 박민경에게 향하자 놀라서 이 사태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가렸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알면 이런 약혼 어떻게 해요! 전 모르는 일이에요. 저도 이 남자에게 속은 거라고요!”
민경이 소리를 지르며 단상에서 내려와 자신의 부모에게 달려갔다.
그때 박민경의 어머니 최효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상에 올라오더니 차민우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
“이 미친놈이 어디서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내 딸을 탐내!”
그러자 그걸 보던 강주란이 소리 지르며 최효진에게 달려들었고, 곧 그녀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네가 뭔데 우리 아들을 때려! 쟤는 우리와 상관없는 애라고! 잘 알지도 못하고선 어디서 손을 올려 올리기를!”
강주란과 최효진은 곱게 입은 한복 차림이 무색하게 서로의 머리를 휘어잡고는 놓지 않았다.
“나가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호텔의 관계자 몇 명이 더 오더니 ‘쇼킹 얼라이브’ 팀을 강하게 밀어냈고 약혼식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혹시라도 카메라에 찍힐세라 소리를 지르며 홀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와중에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던 정세아가 목소리를 쥐어짜며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민우 씨! 제발 우리 아이만은…… 아이만은!”
결국, 세아는 이 말을 끝으로 그 자리에서 혼절하듯 쓰러졌고, 이 모습은 모두 X튜브 라이브로 그대로 방송되었다.
단상 위에서는 아직도 강주란과 최효진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고 차승조는 화를 내며 약혼식장에서 나가고 있었다.
차민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서 있던 자리에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흔들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출동한 119 대원들이 쓰러진 정세아를 들것에 싣고 있었고 라이브 방송팀은 쫓겨나면서도 이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차민우의 가족석에 앉아서 이 모든 사태를 관망하던 김지원은 앞에 놓인 클러치 백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래서 정세아 양을 좋아한다니까. 뭐든 열심히 하겠다더니, 잘하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혼잣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날 방송은 ‘쇼킹 얼라이브’ 방송 중 가장 높은 뷰 수를 기록, 이날 하루 라이브만 20만 뷰, 5천여 개의 댓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영향인지, 다음 날 월요일 C&C 글로벌의 주가가 하루 만에 10% 이상 크게 떨어졌다.
이렇게 극적인 주가 하락은, C&C 글로벌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본가, 차승조의 방.
“이게, 이게 무슨 난리야!”
사자처럼 포효하는 차승조 회장의 목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약혼식장, 그 아비규환 같던 곳을 빠져나와 바로 이곳으로 모였고, 차승조가 강주란과 차민우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정세아 그 영악한 것을 제대로 처리하라고, 미리 손을 떼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더니만 결국 이 사달을 내! 민우 네가 제정신이야? 민우, 네 개떡 같은 선택에 회사가 얼마나 피해를 볼지……. 네가 상상이나 하겠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차승조의 눈과 입에서 시뻘건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세아, 그것이 민우 아이를 가졌다는 게 확실해졌으면 나에게 바로 언질을 줬어야지! 어떻게 처리를 했길래 저것이 이렇게나 미쳐서 날뛰는 게야!”
야차처럼 분노로 벌게진 차승조의 얼굴이 강주란을 향하였다.
웬만해서는 기죽지 않는 강주란이었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서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저 살 집도 얻어주고 생활비도 매달 200만 원씩 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세아 그것이…… 그걸로는 만족을 못 한 건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에게 먼저 상의를 하고 진행했어야지! 민우에게 빌붙어 펑펑 돈을 써대던 애가 그걸 주면 ‘황송합니다, 감사히 잘 쓸게요.’ 하며 만족해했겠어? 어후, 내가 관여를 안 하니 이렇게 엉망으로 일이 돌아가! 엉망으로!”
머리끝까지 난 화를 삭이지 못해 숨을 거칠게 쉬던 차승조는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조각상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고급스러운 조각상이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였다.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문을 열고 김지원이 들어왔다.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쟁반에는 향긋한 차를 가지고서…….
강주란은 방으로 들어온 김지원을 가자미눈을 하며 노려보았다.
차민우 역시 이 순간에 들어온 김지원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평안한 상황도 아니고 최악으로 치닫는 이 상황, 거기다 차승조에게 불호령을 받는 타이밍에 왜 굳이 들어오는 건지.
“모두 차 한잔하면서 머리 좀 식히시죠.”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음을 지은 지원은 테이블에 차를 올려놓았다.
“몸속을 정화해 준다는 차니까 마셔봐요. 복잡해진 머리를 맑게 해줄 거예요.”
하지만 그대로 서서는 방에서 나가지 않는 그녀를 모두가 쳐다보았다.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지원이 입을 열었다.
“이미 벌어진 일로 화를 내고 탓을 한들 바뀌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렇게 소리 지르면 생각나던 것도 다 잊겠어요. 게다가 민우 쟤도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닐 텐데, 그만 좀 구박하시고요.”
웬일로 김지원이 차민우의 편을 들어주자 주란이 얼굴을 씰룩이며 노려보던 눈빛을 아래로 내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게 무슨 소리야?”
날카롭게 묻는 차승조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정세아라는 애가 미디어를 활용해 이렇게 민우나 C&C 이미지에 심한 손상을 주었으니, 이쪽에서도 똑같이 미디어로 대응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당신 그 애 관련해서 조사해 둔 자료들 많다면서요? 저번에도 그 애 불러서 그 자료들 보여주며 혼쭐낸 거 아니었어요?”
김지원의 말에 차승조, 차민우 그리고 강주란의 눈이 동시에 크게 떠졌다.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군. 내게 꽤 많은 자료가 있지.”
“물론 똑같은 방법을 쓰면 같이 똥물에서 뒹구는 격이니, 조금은 우아하게 잘 포장해서 노출하면……. 뭐 나쁘지 않겠죠. 저도 자세한 방법은 모르겠으니 세 분이 잘 생각해 보세요.”
말을 마친 지원이 천천히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많이 알고, 하나라도 더 많이 봐야지. 저자들이 똥물에서 허우적대는 상황을…….’
방에서 나가는 지원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