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불씨는 바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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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불씨는 바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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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불씨는 바람을 타고
2023.03.13.
약 두 시간 후, 지연에게 아주 맛있는 저녁을 대접한 강현은 결국 자신의 바람대로 마음껏 은지연 파워 급속 충전을 했다.
오늘은 더는 힘들다며 지연이 그를 밀쳐낼 때까지.
샤워를 끝낸 지연은 커다란 강현의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는 테라스 선베드에 앉아 있는 강현의 무릎 위에 앉았다.
강현에게서 향긋한 화이트 와인의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향이 너무 좋은데요? 새로 발견한 와인이에요?”
“네, 친구가 추천해 줘서 한 번 사봤는데 맛있네요. 지연 씨도 마실래요?”
강현이 한 모금 마시더니 지연에게 물었다.
“저는 맛만 볼래요.”
이렇게 말한 지연이 강현의 입술에 쪽 하고 입 맞췄다.
“아~ 향기롭다.”
지연이 강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이래놓고 나를 밀어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은토끼 씨.’
강현의 불만 아닌 불만을 알지 못하는 지연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자 맑은 밤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강현 씨, 저…… 고민 많이 했는데요.”
“…….”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지연의 말에 강현은 근심 어린 표정을 얼굴에 담았다.
“그렇게 결정한 계기가 있어요?”
지연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붙인 그가 물었다.
“혹시 X튜브 콘텐츠 봤어요? 차민우 약혼식에서 찍힌 거…….”
“그거 회사에서 너무 화젯거리여서 안 볼 수가 없었죠. 며칠간은 어딜 가도 그 얘기뿐이었으니.”
“요즘 그 영상 관련해서 그 여자, 정세아 제보가 엄청난가 봐요.”
“그렇더군요. X튜브 아니어도 SNS에서 아주 유명하던데요, 그분.”
고개를 끄덕이던 지연의 입매가 조금 굳어졌다.
“아직은 아니지만, 네티즌들이 그렇게 정세아나 차민우 신상을 파고, 과거 제보를 하다 보면…… 혹시라도 차민우의 전처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그와의 결혼은 회사에도 안 알렸고 주변 사람들 하나 초대 안 하고 발리에 직계 가족들만 가서 결혼식을 했지만, 사교계에서는 차민우와 저의 결혼이 잘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쪽 사람들이 외부에 소문을 쉽게 내지는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 좀 걱정되네요. 아무래도 문제 되기 전에 퇴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직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는데, 염려로만 그만두면 지연 씨가 억울하지 않겠어요? 지연 씨 지금 하는 일 좋아하잖아요.”
“맞아요. 저는 우리 팀도 너무 좋고 지금 일도 재미있어요. 하지만 사실 차승조 회장의 회사라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불편하기는 했어요. 그래서, 1년은 넘기지 말아야지……하고 들어왔었어요.”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더욱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랬군요. 지연 씨의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요.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되어가고 있어서 업무적으로 전혀 문제 될 건 없을 테니 마음의 부담도 느끼지 말고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내일 출근하면 주연 대리님과 충식이에게 먼저 얘기할게요.”
“그래요. 내가 뭐 도와줘야 하는 거 있으면 알려줘요.”
“고마워요.”
‘이 비디오 사건 아니더라도……. 앞으로 주주총회까지 3주, 그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맞아.’
지연은 강현에게 털어놓자 무척이나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
지연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주연 대리와 충식에게 커피 한잔하자며 둘을 회사 앞 카페로 불렀다.
“무슨 일이야? 은지연 얼굴 표정이 너무 비장한데?”
충식이 놀리듯이 말하자 지연이 피식 웃었다.
“주연 대리님과 너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중대발표인데?”
“나 퇴사할 거야.”
“네?”
“뭐?”
무척이나 놀란 듯, 주연 대리와 충식이 동시에 소리쳤다.
“무슨 일 있으세요 과장님? 요즘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얼굴 한가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담은 주연 대리가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일은 너무 재미있어요. 그리고 우리 팀 너무너무 좋구요. 다만…….”
“다만……?”
“요즘 화제의 그 콘텐츠와 제가 관련이 좀 있거든요.”
“무슨? 아, 그 X튜브 비디오! 차 상무님 관련한 그 콘텐츠요?”
“네, 사실은 제가…….”
한숨을 폭 내쉰 지연이 결심한 듯 짧게 자신과 차민우 사이를 밝혔다.
거기에 헤어지게 된 계기도 살짝.
지연의 이야기를 듣던 주연 대리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두 분이야 제가 굳게 믿기 때문에 말씀드려요. 제가 거론될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알려지면 팀에게 폐만 끼칠 거예요.”
지연이 손을 뻗어 주연 대리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퇴사하게 되어서 너무 서운하기는 해요. 대리님과 충식 과장님 함께해서 너무 좋았거든요. 두 분 덕분에 제가 회사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었어요.”
“과장님, 저나 회사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마시고, 과장님 걱정만 하셔요. 저도 혹시라도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요. 저는 이런 것도 모르고 좋다고 그 영상을 보여드렸네요. 너무 미안해요, 과장님.”
“주연 대리님이 뭐가 미안해요. 오히려 대리님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전 그런 영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고 대비도 못 했을 거예요. 오히려 감사해요.”
지연이 걱정하는 주연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지연아, 내가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몰라. 알잖아, 나 컴퓨터 좀 다루는 거. 너 퇴사하는 거와는 별개로 이거 관련해서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하자.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대비는 해둬서 나쁠 거 없으니까.”
“충식아. 네 말 들으니 너무너무 든든하다. 요즘 네티즌들…… 거의 탐정급 수사대라며. 좀 무섭더라고.”
어색하게 미소 짓는 지연을 보며 두 사람은 안쓰럽게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사람들이랑 이제 관련도 없는데 이런 걱정을 왜 해야 하나 몰라. 차민우 그 자식은 아주 끝까지 나에게 민폐를 끼친다.”
***
‘쇼킹 얼라이브’에 새로운 영상이 올라온 것은 일요일 그 사건 며칠 뒤였다.
“일요일 라이브로 보여드렸던 사건, 모두 기억하실 텐데요. 그 뒤로 냉혈한 재벌 2세에게 버려진 비련의 주인공 정모 씨에 대한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댓글에서도 그녀의 과거가 지속해서 올라왔는데요. 저희에게 정모 씨 과거에 대한 자료라고 그제 저녁 의문의 시청자분이 인터뷰 오디오 클립을 제보하셨습니다. 저희가 들어보니 꽤나 충격적이었는데요. 마침 저희가 알아본 다른 사실과 더하여 청순하고 가련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양면성을 보게 됐다고나 할까요? 자 함께하실까요?”
‘쇼킹 얼라이브’ 진행자들이 들려준 녹음 내용은, 차승조 회장이 정세아 앞에서 들려주었던 그 음성 파일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모자이크와 음성변조를 덧씌운 인터뷰 하나가 더해져 있었다.
그건 차승조 회장 쪽에서 보낸 자료가 아닌 ‘쇼킹 얼라이브’에서 새롭게 준비한 자료였다.
“제가 차모 씨 모친의 집에서 몇 달 전까지 한 1년 정도 일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본 차모 씨는 몇 달 전까지 결혼 상태였습니다. 작년 말인가 올해 초인가, 정모 양이 갑자기 나타나서 차 씨와 바람이 난 모양이더라고요. 차 씨 모친이 그것 때문에 앓아누웠었어요. 아들 잡아먹을 귀신이 나타났다면서요. 아마 이혼도 안 한 상태로 둘이서 따로 나가 산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이혼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약혼식을 했겠죠? 아무튼 전 부인만 불쌍하지 뭐. 차 씨 모친 성격도 유별나서 시집살이도 엄청나게 했을 텐데. 그 집에 차 씨 전부인 올 때마다 얼마나 구박을 해댔는데요.”
또다시 ‘쇼킹 얼라이브’ 방송 댓글 창이 들끓었다.
***
[C&C 글로벌 세일즈 1팀 상무 차민우_ 대기발령.]
회사에 출근하자 C&C 글로벌 및 계열사 인트라넷에 가장 먼저 뜬 뉴스는 차민우의 대기발령 건이었다.
C&C 전 직원들은 이 뉴스에 술렁였다.
[결국, 그 사건으로 대기 발령된 거야.]
[개인사인데 그걸로 대기 발령됐다고?]
[그 비디오 콘텐츠로 우리 회사 이미지만 나빠졌잖아, 주가도 떨어지고. 전 부인 있을 때도 같이 나가 살았다며?]
[그런데 또 금방 버리고 다른 여자랑 약혼하려고 했다는데. 이게 무슨 양다리도 아니고 문어 다리야.]
[이러다 또 몇 주나 몇 달 있다 복귀하겠지. 회장 아들인데.]
[근데 그거 알지? 회장 아들딸 중에 차민우 상무만 엄마가 다르대. 차 회장이 밖에서 낳아 데리고 왔다던데?]
[밖도 아니고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작정하고 차 회장님 꾀어서 생긴 거라던데?]
정세아가 터트린 폭죽의 작은 불씨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차민우, 강주란 그리고 차승조 회장이라는 마른 장작에 떨어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차민우에게 향하던 사람들의 비난은 곧 정세아에게 향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강주란에게 그리고 차 회장에게까지 번지고 있었다.
‘쇼킹 얼라이브’는 정세아가 생각했던 그냥 인기 많은 콘텐츠 제작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집요했고, 비열했으며 음흉했다.
인기를 위해서라면 오늘의 제보자를 다음 날의 표적으로 바꾸는 건 손바닥 뒤집듯이 쉬웠다.
거기다 정·재계 그룹 30위 안에 드는 큰 그룹사가 관련된 루머라니.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표적이었다.
혹시라도 거짓말로만 점철된 제보라면 이들에게도 위험이 너무 커서 움직이기 쉽지 않았겠지만, 정세아의 자료들과 제보는 사실에 근거했고 제보자가 콘텐츠를 만들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이들은 신이 나서 콘텐츠를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이 만든 자극적인 떡밥을 채널에 던지면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받아먹은 떡밥을 부풀리고 다시 재생산하여 만들어 퍼트렸다.
진실이건 가짜이건…….
이제는 상관없었다.
어느 곳보다 자극적이기만 하면 되었다.
자신이 표적이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던 정세아였기 때문에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세아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가 남의 약혼식을 망쳐놨다는 건 무슨 소리고 네가 유부남이랑 바람이 났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응?
정세아의 모친이 얼마 안 있어 세아에게 연락을 하였다.
지방에서 작은 과수원을 하시는 세아의 부모님은 TV도 공중파 뉴스나 드라마 정도만 보시는 분들인데 이 콘텐츠의 바람이 거기까지 향한 듯했다.
“엄마, 누가 뭐라 하면 그냥 모르는 일이다……. 이거 우리 딸 아니라고 하고 말아. 그리고 당분간 시내에는 급한 일 아니면 나가지 말고.”
-이거 정말 너 맞아? 옆집 정 씨가 나한테 무슨 비디오를 보내줬는데 아무리 봐도 네가 맞는데……. 아니지? 너랑 그냥 닮은 사람이지?
“나 아냐 엄마. 나랑 비슷한 사람인데 다들 나인 줄 알고 오해하는 거야. 아무튼, 누가 물어보면 그냥 모른다고 해. 내가 얼른 해결해 볼게.”
-그래, 네가 아니지. 하이고, 말도 안 되지. 내 딸이 무슨 임신이며 남의 집 경사를 망가트리겠어. 유부남을 꾀다니……. 아니지, 아니야. 아무튼, 이런 오해 때문에 내 딸 힘들면 얼른 내려와. 엄마는 네 걱정만 되네.
평생 순박하게 사신 부모님, 특히 모친은 언제나 하나뿐인 딸 정세아 걱정이었다.
-엄마는 너 믿어. 우리 딸이 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렇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와, 알았지?
들려오는 모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세아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곳에 내려가는 일은 없을 거야 엄마. 난 여기서 반드시 내 몫을 받아낼 거야.’
정세아의 끝도 없는 욕망은, 이런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정세아는 자신에 대한 공격성 콘텐츠 생산을 멈춰달라고 몇 번이나 ‘쇼킹 얼라이브’에 메시지를 보내고 연락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고 나중에는 그마저도 끊겼다.
[우리는 대중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대답이었다.
무슨 정의에 대한 사명감을 띤 사람들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들의 목표는 정확하게 돈과 인기였다.
이번 콘텐츠는 채널을 개설한 이래 가장 흥행하고 있었기에 ‘쇼킹 얼라이브’는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