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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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분노
2023.03.27.
“아아악!”
세아는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가방을 집어던졌다.
함께 손에 들려 있던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이 함께 바닥에 던져졌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감자가 비닐봉지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데 머리에서 흘러내린 달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자 끈적거리는 것들이 머리며 옷에 묻어 흐르고 있었다.
너무 찝찝해서 빨리 씻어내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다들 미친 거야?”
장을 볼 겸 동네에 있는 마트에 갔다 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서 봉변을 당했다.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오는 입구.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보자 뭔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곧 그 수군거림은 세아의 귀에 뚜렷이 들려왔다.
“저 여자가 그 여자라니까. 얼마 전에 미자 엄마가 보내줬던 그 동영상 있었잖아. 거기에서 지랄하면서 연기하던 여자. 내 말이 맞다니까?”
“우리 아파트에 산다고 누가 알려줘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동이었어? 어휴, 징그러워라!”
“아 저 여자야? 자기는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더니 전 남자친구 새 출발 하는데 망쳐놨다던? 미쳤네, 미쳤어.”
“그러기만 하면 다행인데, 전에 같이 살던 남자한테 빌붙어 살면서 그놈 가게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돈도 훔쳤다더라고.”
어느새 커진 목소리는 마치 세아에게 들으라는 듯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아는 알지 못하지만, 이 아파트에서 10년 이상 살며 친하게 지내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었다.
“하이고~ 몹쓸 짓은 다 하고 다녔구먼. 배 속의 애가 불쌍하네.”
“배 속의 애도 다른 남자 애가 아닐까?”
“그럴 수 있지.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던데?”
“그 약혼식 하던 남자가 며칠 전 뉴스에서 잡혀들어가던 씨씨인지 쌔쌔인지 하는 회사의 차 머시기 아니야. 아버지랑 회삿돈 몇백억 날름 훔쳐먹은.”
“하이고~ 그런 거였어? 그런 거 보면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이 딱 맞네.”
“그 남자 전부인 있을 때 저 여우 같은 게 꼬셨다더니만. 아주 불여우네 저 여자.”
“못됐구먼, 못됐어. 에라이~ 천벌 받아라. 남의 집 망쳐놓은 것들은 다 천벌 받아야 해!”
“그렇지, 그렇지, 우리 바깥양반도 젊었을 때 그리 밖으로 나돌더니만 말년에 내가 입에 밥 안 넣어주면 굶어 죽게 생겼잖아. 지은 죄는 결국 다 갚게 돼 있어.”
무시하려고 했지만 들리는 이야기가 너무 괘씸해 세아는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꼬셨다고? 아니거든? 그 여자가 나랑 민우 씨 사이를 방해했었다고. 뭘 좀 제대로 알고 소문을 내던가! 그리고 잘 사는 나에게 차민우가 찾아온 거였거든?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 사이를 훼방 놓은 건 그 여자라고! 우리를 방해한 것도, 또다시 힘들게 한 것도 다 그 여자, 은지연이 그런 거라고!’
더는 참기 힘들어 대놓고 욕을 하는 아주머니 무리에게 한마디 하려고 돌아섰을 때였다.
“에라 못된 X! 어딜 그렇게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다녀? 숨어 다녀도 모자랄 판에!”
거친 말을 내뱉으며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세아의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라 멈춰서 멀뚱히 그 할머니를 쳐다보는 세아를 향해 할머니는 달걀을 던졌고, 그것은 곧 그녀의 어깨에 맞아 박살이 났다.
이것저것 묻어 시커먼 얼굴에, 몇 달은 안 빨아 입은 것 같이 지저분한 옷차림의 할머니는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아이고~ 영희 할미가 또 난리구먼!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집에나 있지 왜 나와서 또 저런대!”
“그런데 이번엔 좀 꼬시네. 저 여자는 당해도 싸지. 영희 할매요, 잘하고 계쇼!”
“영희 할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아주머니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깔깔거리며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할머니를 응원했다.
어이없는 봉변에 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져 험악하게 변했다.
“할머니! 뭐 하시는 거예요! 미쳤어요!”
어깨에서 흐르는 깨진 달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세아가 할머니에게 소리 질렀다.
“이 요망한 것이 어디다 화풀이여! 남의 남자 꾀는 것들 다 벌을 받을 거야!”
그렇게 말하던 할머니는 달걀 두세 개를 더 세아에게 던졌고 그중 하나가 세아의 머리에 맞았다.
“이 할머니가 돌았나, 뭐 하는 거야!”
발악하듯 소리를 내질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보는 눈들도 많아 할머니에게 달려들 수도 없었다.
“아아악!”
사람들은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지르는 세아와 달걀을 집어던지는 할머니를 쳐다만 볼 뿐, 그 누구도 둘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서 수군거리고 웃어대며 지켜볼 뿐이었다.
씩씩거리던 세아는 몇 번의 발악을 더해 보았지만, 결국 뭘 어쩔 수 없어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머리에 온통 엉겨 붙은 달걀은 미끈거려 잘 씻기지도 않았다.
“다들 미쳤어! 미쳤다고!”
씻는 내내 열불이 터져 미칠 것만 같았다.
SNS에서는 정세아와 관련된 쇼킹 얼라이브의 다양한 콘텐츠가 계속 퍼 날라지고 있었고, 많은 개인적인 정보들이 노출되어 공공연하게 알려지고 있었다.
거기다 누가 올렸는지 지금 사는 이 집의 아파트 이름까지 알려져 버렸다.
‘저 아줌마들이랑 할머니들이 알 정도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쇼킹 얼라이브 내용을 봤다는 거야?’
정세아는 몰랐지만, 그녀의 스토리는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다.
특히, 화가 난 주부들이 각종 맘 카페에 그녀의 콘텐츠와 많은 정보를 공유하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어, 더욱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맘 카페나 커뮤니티들에 배우자의 바람으로 이혼을 하거나 파혼을 한 경우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이런 사람들은 정세아의 콘텐츠에 자신을 대입하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을 대입하는 대상은 정세아가 아닌, 차민우의 전부인 혹은 새로운 약혼녀였기에 차민우와 정세아는 세기의 나쁜 X들이 되어 있었다.
씻고 나서도 정세아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게 왜 자신의 탓이고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피해자인데!
‘그 약혼식 자리도, 사실 은지연이 안 알려 줬으면 난 알지도 못했을 테고 난 그런 콘텐츠도 못 만들었을 텐데.’
정세아의 일그러진 분노는 어딘가로 터트려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를 이용해서 이 사달을 낸 건 다 그 못된 은지연이라고! 내 탓이 아니야! 은지연이 나를 이용한 거야. 초대장도 분명 은지연이 보낸 것이 분명해. 나를 이 꼴로 만들려고……. 어쩌면 쇼킹 얼라이브와 손잡고 나를 물 먹이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길 잃은 분노가 향한 곳은 어이없게도 지연이었다.
‘은지연은 부잣집 딸이니까 그럴 수 있잖아? 가만 안 둬 은지연. 너 내가 가만 안 둬!’
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한 세아는 눈에 불을 켜고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
-오늘도 뛰는 거예요?
“네, 오늘도 혼자 안 뛰고 러닝 크루(Running Crew) 들과 함께 뛰려고요. 마침 오늘 공지에 뜬 아침 러닝 코스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요.”
-지난주부터 매일 뛰네요. 크루들과는 며칠 전에도 함께 뛰더니 좋았나 봐요.
“모두 활력이 넘치더라고요. 저도 함께 뛰면 에너지가 함께 오르는 것 같아 좋고, 모두 친절해서 종종 참여하려고요.”
-뛸 때는 힘들지만 다 뛰고 나면 상쾌해서 좋죠. 다음에는 저도 함께 뛰고 싶네요. 하지만 지연 씨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그럴게요. 강현 씨는 오늘도 많이 바빠요?”
-오늘은 그래도 좀 나아요. 평소보다는 일찍 끝날 것 같은데 이따 상황 봐서 전화할게요. 시간 괜찮으면 같이 규식 선배 식당 가요.
“좋아요. 오늘도 좋은 하루 돼요. 보고 싶어요, 강현 씨.”
-나도 보고 싶어요.
스마트폰 화면을 향해 지연이 쪽~하고 입술을 부딪치자 강현의 기분 좋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끝낸 지연은 잠시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며 통화의 여운을 느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쉬려했던 지연을 지은이 가만두지 않았다.
“이제 더 미루지 말고 회사 나와 은지연. 아버지도 지후도 너 언제 출근시킬 거냐고 나를 아주 들들 볶고 있다. 한 2~3주 쉬다 나오는 건 어때? 너에게 다른 선택이란 없어. 시기만 정해! 네가 하고 싶은 일로 연결해 줄 거니까.”
언니 지은의 통보였다.
혼자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에 온유가 아닌 다른 회사 인턴십부터 그다음 직장들까지 혼자 힘으로 지원, 입사하였고 업무들도 진행해 보았다.
C&C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지만, 거기서도 연차에 맞게 들어가 최선을 다해 일했기 때문에 특혜를 받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집안에서 운영하는 기업에서 꼭 일해야 할까?’
언제나 지연의 머릿속을 부유하던 이 생각에 일부러라도 온유 제약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 하영과의 대화는 지연을 고민하게 했고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
하영과는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그간 서로 바빠 영상통화나 메시지만 오가다 드디어 날짜를 잡았다.
몇 시간 동안의 담소와 적당한 알코올들이 대화를 좀 더 느슨하게 만들어 준 순간 하영이 지연에게 질문했다.
“지연아, 너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
“음……. 아직 없어. 그저 예전부터 막연하게, 나중에 내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간다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
“응,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다만 최근에 좀 더 관심이 생긴 분야가 생겼어. 유기견 보호 센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안락사 없고, 유기견을 보호하고 보살펴서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는 거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중에서 가능성 있는 강아지들은 테라피 독(Therapy Dog)으로 훈련도 해서 마음이 아프거나 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도 주고 싶어. 물론 강아지들이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네. 마침 온유 제약 계열 병원도 있으니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좋겠다.”
“언젠가 해볼 수 있다면 좋겠어.”
“언젠가? 지금 시도할 생각은 없어? 왜?”
“지금?”
“그래 지금. 넌 네 능력도 있고, 가족들의 지원도 가능하잖아.”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라…….”
“시작해 봐야 뭘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되지.”
“그……런가?”
“내가 너라면 난 지금 당장 시작할 거야. 확실한 비전이 있고, 능력도 있고 거기에 가족의 지원까지 기대할 수 있잖아. 당연히 처음이니까 여러 가지 힘들 거고, 실패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워나가고 더 나아져.”
“…….”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네가 말한 그런 비전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너도 치열하게 고민해보고 일해봐서 알잖아. 단번에 이뤄낼 수 있는 건 없다는 거. 그리고, 나중이란 건 어쩌면 뜬구름 같다는걸.”
직설적이지만 지연을 아끼는 그녀의 말이었기에 지연은 고맙기만 했다.
“네가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싶어 하는 독립심. 나도 너무 잘 알아. 하지만 거기에만 빠져 생각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네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하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연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부모님의 지원? 똥 멍청이 차민우처럼 거기에만 빠져서 목매달지 않으면 돼. 네가 잘할 수 있는 것에 가능성이 있고 거기에 가능하다면 부모님의 지원을 받는 것이 흠은 아니잖아? 거기다 너희 가족. 사업이나 이런 쪽은 냉정하게 판단하시는 분들이잖아. 이번 기회에 조언을 들어보면 좋지 않겠어?”
지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지은 언니와 지후 오빠도 온유 제약과 계열사 일을 하지만, 그분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것 너도 알고 있잖아.”
“네 말이 맞네.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가 없이, 언니와 오빠를 보면 됐었어. 그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그 둘을.”
언제나 존경했던 부모님, 그리고 언니와 오빠.
모두 집안의 힘만 믿고 쉽게 가려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서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그 모습을 제대로 못 본 것만 같아 미안했다.
‘그래,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내게는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 그저 부모님 회사라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해보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을 계획해서 그걸 가지고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여러 날 고민하던 지연은 결국 자신이 동경하고 꿈에 그리던 것들을 좀 더 명확하게 시각화하기 시작했고, 정리가 완료된 시점에 언니에게 연락했다.
“지은 언니, 나 언니에게 공유하고 조언을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아직 멀었지만, 꿈에 첫발을 내디딘 지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