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버려진 패 vs 버려질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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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버려진 패 vs 버려질 패
2023.04.03.
[3000억 원대 배임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C&C 글로벌 차승조 회장과 차민우 상무의 첫 공판 도중 차승조 회장이 쓰러져 급히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C&C 글로벌의 변론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는 도중 벌어진 일이라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차승조 전 회장은 위독한 상태로 알려졌습니다. KNN 뉴스, 장하리였습니다.]
차승조 회장이 1심 재판 도중 쓰러졌다.
대중들은 차승조 회장의 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쇼가 아니었다.
그의 병명은 급성 뇌출혈이었고, 대형 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으나 의사들은 이구동성 예후가 좋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주란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그가 쓰러지고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정신없는 상황에 차승조는 도착한 119에 실려 나갔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놀란 사람들에 밀려 허둥지둥할 뿐이었다.
어느 병원으로 이송되었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어 재판정에 있던 사람들을 죄다 붙잡고 물어물어 겨우 찾아왔다.
“여보!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여보 눈 떠봐요. 응? 내가 왔다니까.”
그녀는 간호사들이 막아섰지만, 상관없다는 듯 의식 없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 있는 차승조의 몸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이게 무슨 난리야! 왜 당신이……. 당신이 이렇게 여기 누워 있어! 난 어떡하라고! 난 어떡하냔 말이야!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결국, 주란은 주저앉아 악을 써대며 울었다.
“보호자님, 지금 회장님께는 안정이 우선입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주란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요! 여보, 여보오!”
결국, 의사의 지시로 주란은 병실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인 건지, 그녀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재판에서 자신들을 대변해야 했던 변호사가 오히려 차승조의 새로운 비리 자료들과 함께 방대한 증거물들을 들이댔다.
거기다 차민우가 차승조의 비리 자료에 대한 증인으로 나와 그의 비리에 대해 상세히 증언하였다.
아들 차민우가 아버지 차승조를 내친 것이다.
“차민우 씨, 이 모든 증언에 거짓이 없음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증거는 제가 아버지의 지시로 만든 자료들입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지요? 분명히 이 자료들은 차민우 씨 본인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텐데요.”
민우와 이미 말을 맞춘 변호사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민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증거들이 제게도 좋지 않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저를 설득하신 윤민호 변호사님의 조언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밝혀진 이상 더는 숨길 수도 없고, 이 이상 나아간다면 분명 저도 회사도 자멸할 것입니다. 여기서 멈출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지시였지만 주주들을 속였던 일들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거역하기 힘든 회장님의 지시였지만, 그 지시를 따랐던 것은 제 의지였기에, 제 죄도 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회사를 믿고 투자하신 많은 주주께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민우는 검찰에서도 찾지 못한 꼭꼭 숨겨진 자료들을 더 내놓았다.
언뜻 보면 차민우에게 좋을 것이 없어 보이는 자료였으나, 깊게 살펴보면 누구보다 차승조의 비리에 큰 무게를 더할 엄청난 자료들이었다.
차민우는 자료들을 변호사를 통해 내놓으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했다.
이 또한 변호사 윤민호와 함께 계획한 연극이었다.
“네가 감히! 차민우 네가 감히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 자료들을 들이밀어 발뺌하려는 것이야! 이건 다 거짓이야! 이건 다 저 자식이 나를 죽이고 빠져나가려는 심산이라고!”
차승조가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주변인들이 그를 막아섰다.
“피고! 조용히 하세요! 한 번 더 이러시면 법정 소란죄로 구속하겠습니다.”
“너나 조용히 하라고! 판사면 다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증거랍시고 채택하고 나를 옭아매려고 하다니! 차민우 너 이 자식, 내가 널 어떻게 키워 여기까지 올려줬는데……. 네가! 네가! 어……억!”
재판정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난동을 부리던 차승조는 갑자기 ‘억’소리를 내며 주저앉듯이 쓰러졌고 곧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지연 씨와 좀 더 근사한 곳으로 데이트 가야 하는데.”
“전 이렇게 보는 것도 너무 좋은걸요?”
강현이 너무 바빠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 C&C 글로벌 사무실 앞으로 지연이 찾아왔다.
사무실 근처였지만 강현이 신경 쓰지 않고 지연의 손을 잡고는 걸었다.
지나가던 몇몇 직원들이 강현을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번 재판 참석하셨었죠?”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해 식사를 마친 후, 지연이 슬쩍 물었다.
“증인으로 참석했는데, 차 회장이 쓰러지면서 재판이 중단되었어요.”
“뉴스를 보니 차 회장, 뇌출혈인 것 같더라고요.”
“차민우가 모든 걸 뒤집어쓸 것 같으니 차 회장을 내친 것으로 보였어요. 우리도 몰랐던 새로운 자료들을 변호사 통해서 제출했더군요. 그간 차 회장이 모든 비리를 진두지휘한 정황과 근거자료들……. 따로 가지고 있던 핸드폰의 통화, 메시지 내용도요.”
“차 회장도 아들인데 그걸 다 차민우에게 덮어씌우려고 한 것도 무서운데, 그걸 안 차민우가 아버지를 내치기 위해 증거 자료들 제출해 증인으로 나서다니. 두 사람은 가족이라기보다 먹고 먹히는 정글의 짐승 같아 보여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떤 지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정한 가족이라면, 그런 더러운 짓을 시키지도, 그리고 시킨다고 곧이곧대로 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 누구도 말리지 않고 더한 늪으로 빠지고만 있었으니 어쩌면 이런 결과는 예정된 걸 수도 있어요.”
강현이 씁쓸한 듯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지연을 손을 잡아끌어 입술로 가져가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우리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다음 데이트를 어디에서 할지 즐겁게 고민해 볼까요?”
“좋아요.”
지연도 맞잡은 손을 다시 당겨 강현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
또각또각-
명쾌한 구두 소리에 병실 근처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여배우처럼 우아한 이미지의 중년 여성이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차승조 회장님을 잠시 뵈러 왔습니다.”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지금은 가족 외에는 면회가 불가한 시간이라서요.”
“그 사람, 부인입니다.”
부인이라는 말에 간호사의 두 눈이 잠시 크게 떠졌다.
아까만 해도 병실에는 차 회장의 부인이라 불리는 다른 여자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원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간호사는 며칠 전 뉴스에 나온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동료 간호사들과 한참이나 이야기했던 ‘5천억, 사상 초유의 위자료 요청.’이라는 인터넷 기사에 차 회장과 김지원 두 사람의 얼굴이 크게 나와 있었기에 선명히 기억이 났다.
“알겠습니다. 여기에 인적 사항 적어주시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간호사의 대답에 지원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차승조 환자분 상태가 좋지 않아 길게 면회는 어렵습니다. 대화도 어려우시고요. 면회는 10분 내외로 끝내주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원이 이해했다는 듯이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걱정돼서 상태 좀 살펴보러 온 거라 10분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금방 나올게요.”
웬만한 레지던스 호텔처럼 넓고 깔끔한 병실 안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환자의 바이털 사인을 표시하는 기계음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침대 위의 차승조는 각종 기계장치에 둘러싸인 채로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 있었다.
지원은 병실 입구에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가깝게 다가갔다.
그간 신경을 써서 그런지 살도 많이 빠져 있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의사의 말로는 급성 뇌출혈이라고 했다.
잠들어 있는 건지, 아니면 깨어 있지만, 눈을 못 뜨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다니 예상외네요, 차승조 회장님.”
지원이 말을 건네자 차승조에게 연결된 바이털 사인 체크 기기의 심장박동 사인이 좀 더 빠른 소리를 내었다.
“내가 살아서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가 봐요.”
지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우리가 함께했던 40년을 이렇게 마무리하게 되어서,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꽤 씁쓸하답니다. 이왕이면 한창 혈기왕성하고 건강할 때 벌을 받았어야 당신이 더욱 화가 나고 힘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손을 뻗은 지원이 차승조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로 생각했죠?”
“…….”
대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지원은 물음을 던졌다.
“아니요. 당신은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로 생각했겠지만, 당신의 모든 여자관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요? 고민은 많이 했었죠. 다만, 자리를 잡아가는 내 자식들을 보며 엄마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어 아무 말도 못 했을 뿐. 화가 나지 않은 게 아니었어요. 저도 사람인데요. 너무 화가 났고, 비참했고, 슬펐어요. 매일 울면서 술로 밤을 보낸 시간도 꽤 길었던걸요.”
차승조가 보지 못하지만, 지원은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40년이에요.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속이고, 나도 속이고, 내 자식들도 속이고 산 세월이요. 나야 당신과 피가 안 섞여서 그렇다지만, 당신 자식들까지 장기 말처럼 쓰고 버리려고 하다니요. 내가 그 자료들을 찾아내고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런데 차라리 잘 됐다 싶어요. 그런 게 있었으니, 나도 결심하게 되었거든요.”
지원의 손에 잡힌 차승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러더니 잠시 후부터 바이털 사인 체크 기계에서는 좀 더 빠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검찰에 넘어가지 않은 자료들이 몇 남아 있어요. 밝혀진 것들보다 더 큰 것 같은데……. 터트려 봐야 그 규모를 알 수 있겠죠. 그건 시기적절하게 제가 잘 넘길게요. 당신이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지원은 자신의 손으로 잡고 있던 차승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름진 손.
이 손으로 내 아버지를 배반하고, 나를 배반했었지.
잡았던 그의 손을 천천히 놓아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오늘 온 김에 다 말하고 가야겠어요. 우리가 다시 멀쩡하게 마주 볼 일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허리를 숙인 지원이 그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가져가더니 나른하게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그거 알아요? 차민우, 당신 막내아들. 당신 피가 아닌 거? 놀랍죠? 나도 이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답니다.”
지원이 허리를 펴는 동안 방 안을 울리던 바이털 사인이 급격하게 움직이며 빠른 소리를 내었다.
“잘 들리기는 하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혹시라도 당신이 하나도 못 알아들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차승조에게서 등을 돌렸다.
“농담이라도 그동안 좋았다거나 고마웠다는 말은 안 나오네요.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아요. 이게 내 진심이니까. 헤어지는 순간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건강하게 쾌유하도록 빌어줄게요, 차승조 씨. 벌은 이렇게 편하게 병실에서 받는 게 아니고 감옥에서 받아야 하니까.”
이 말을 끝으로 병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잠시 후, 차승조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