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먼지 나도록 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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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먼지 나도록 탈탈
2023.04.06.
며칠 동안 고민을 하던 지연은 결심하고 정세아를 만나기 위해 구치소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중죄였고 지연은 그녀만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배 속의 아기는 죄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약해졌다.
그래서 그녀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정세아를 만나, 지금이라도 그녀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뉘우친다면, 조금이라도 죄를 가볍게 해 줄 방법을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를 언니 지은이 극구 말렸지만, 지연은 고집을 부렸다.
“지연아,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배 속의 아기가 너무 불쌍하지만, 아기가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돼. 그 여자가 아기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미친 짓은 안 저질렀을 거라고. 절대 정세아 만나지 마.”
“언니, 나도 정세아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하나도 없어. 하지만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아 언니. 혹시라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면…….”
“네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연아. 그 여자가 사죄할 생각이었다면 그 마음을 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난 절대 반대야. 네가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지연은 언니 지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세아가 있는 구치소에 면회를 왔다.
강현에게도 말하지 않고.
“너 당장 나 여기서 나가게 해. 그 말 하려고 나온 거야.”
접견실에 오자마자 대뜸 정세아가 역정을 내며 은지연에게 소리쳤다.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정세아의 얼굴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몇 주 사이에 살이 좀 찐 건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통통해져 있었다.
“네가 무슨 수를 쓴 거지? 그렇지? 내 변호사가 아무리 국선 변호사라고 해도 이렇게 나를 위해 아무것도 안 하다니. 분명 네가 뒤에서 돈을 써서 손쓴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럴 리 없어.”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듯이 무시무시하게 지연을 노려보며 세아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국선 변호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다만, 이 사건을 파면 팔수록 그녀의 무죄는커녕 형량을 줄이는 것이 힘들 정도의 명백한 증거들이 나와서 문제인 거였다.
그리고 거짓말로 일관하는 정세아의 태도가 그녀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음을, 정작 정세아 그녀만 모를 뿐이었다.
“도대체 내 죄가 뭐야? 그 차는 급발진이었다고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지도 않고. 난 운전석에 앉아 있었던 것뿐이라고, 알아? 그런데 뭐? 살인 미수? 살인 미수우~? 네 눈에 걸리적거리던 나를, 잡아넣어 치우려고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는데…… 넌 양심도 없어?”
정세아는 격양된 목소리로 끊임없이 울분을 토해냈다.
그런 그녀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연이 입을 열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세아 당신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구나. 반성이라는 마음은 전혀 없어. 아니지, 그걸 바란 내가 오히려 멍청한 걸지도 모르지.”
“반성? 무슨 반성? 뭘 반성해야 하지 내가? 난 너에게 모함을 받아 이렇게 어이없게 이런 곳에 갇혀 있는데 반성을 안 한다고? 하! 미쳤어, 너?”
세아는 지연의 말을 듣더니 눈에 핏줄이 설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빠르게 말했다.
“웃기지 마, 은지연. 반성은 네가 해야지. 다른 여자와 잘 사귀며 미래를 약속한 남자를 집안 앞세워 채간 게 누군데! 네가 그런 짓만 안 했어도 민우 씨와 나는 결혼했을 거고,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너라고! 네가 평생 반성하며 살아야지 어디다 반성 운운해!”
흥분한 나머지 마구 침을 튀겨가며 말하던 세아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곧 둘 사이를 막고 있는 투명한 칸막이를 깨고 은지연에게 뛰어들 기세였다.
그녀가 말하는 불행의 시작은 언제나 은지연이 차민우를 낚아채 갔다는 망상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것을 은지연이 도둑질해 갔다는 듯.
“네가 몰라서 그러겠지만, 결혼 제안을 먼저 한 것도 차 씨 집안이었고 결혼을 서두른 것도 차승조 회장이었어.”
이런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지만, 그녀의 망상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 결혼을 선택한 것은 나야. 하지만 동시에 그 결혼에 동의하고, 결혼식장에 들어서고, 나와 한 집에 살아갔던 거? 그거 다 차민우의 선택이었어. 당신이 그렇게 소중했다면 당신 놔두고 결혼식장에서 맹세의 말 따위 안 했겠지. 안 그래?”
지연의 말에 두 손으로 앞에 놓여 있는 종이를 구기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세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 너에게 결혼한다고, 기다려달라며 널 설득하지 않았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봐 정세아. 그 어떤 사람이……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결혼하는데 그걸 지켜보며 기다려줘.’라는 말을 내뱉어, 미치지 않고서야.”
지연 역시 흥분했는지 빠르게 말을 하며 정세아를 몰아붙였다.
“내가 왜 당신 앞에서 이런 말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차민우가 과거에 어쨌든, 지금의 나와는 하나도 상관없는데. 지나간 일들이야 어쨌건, 너는 현재 고의적으로 나를 차로 치려는 계획을 가졌던 살인 미수 범죄자이고, 나는 피해자야.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다쳤지.”
“야, 은지연! 누구더러 범죄자래!”
“너, 정세아.”
“너 내가 나가면 가만 안 둘 거야! 너 내가 다 무너뜨릴 거야! 내가 나가면 이번엔 실수 안 할 거라고!”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래……. 나오면 그렇게 해. 밖의 세상에서 당신 만날 날을 웃으며 기다리고 있도록 할게. 하지만 언제나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해. 네 말대로 빵빵한 집안도 있고 돈도 있는 내가 너에게 가만히 당하며 있을 것 같아?”
차가운 미소를 띠던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순간이라도 너의 배 속 아기를 가여워하며 너까지 가여워한 내가 바보였던 것 같아. 넌 절대로 바뀌지 않을 텐데.”
“은지연!”
“네가 오히려 여우같이 머리 굴려서 내 앞에서만이라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며 연기했다면, 난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넌 머리도 나쁘니 어쩔 수 없네.”
둘 사이를 막고 있는 투명한 칸막이 앞쪽으로 지연이 얼굴을 가져가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이제 내가 가진 모든 걸 활용해서, 총력을 다해 너를 응징할 거야 정세아. 기대해도 좋아. 난 이제 남는 게 시간이고 많은 게 돈이라 너와 네가 벌인 일들에 초 집중할 수 있게 되었거든.”
정세아는 은지연의 이야기를 듣자 미칠 듯이 화가 나면서도 퍼뜩 현실을 깨달았다.
맞아, 저 여자는 집안도 좋고 돈도 많았다.
거기다 영악하니 자신 하나 세상에서 없애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잠시 순진한 자신이 그걸 잊고 살살 약 올린 저 여자 말에 흥분해서 잘못 행동한 것 같았다.
“아니야, 내가 잠깐 흥분해서 말이 잘못 나갔어, 은지연.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의도도 없었고 차 결함이지만 이렇게 돼서 미안해. 잠깐만 앉아봐. 내가, 내가 잘못했어.”
지연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세아를 보았다.
“정세아. 끝까지 변하지 않아서 고마워. 우리 법정에서 만나자구.”
지연은 뒤를 돌아 나왔다.
“은지연! 은지연! 거기 서 봐!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정세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지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
“안 돼! 절대 안 돼! 누구더러 나가라는 거야! 이 집에서 내가 몇십 년을 살았는데!”
주란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고, 집으로 쳐들어온 사람들 앞을 두 팔 벌려 막아섰다.
주란이 차민우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차승조가 마련해 준 이 집, 34년간 살았던 이 집에 사람들이 들이닥친 건 차승조 전 회장의 1심 패소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1심 공판 중 쓰러진 차승조 때문에 중단되었던 재판은 몇 주 뒤 또 한 명의 피의자 차민우와 그들의 변호인 참석으로 대신하여 진행되었다.
차민우, 징역 1년에 벌금 5억 구형.
차승조, 징역 5년에 벌금 150억 구형.
그 외에도 차승조의 개인 재산 중 회사로 환수 조치 될 금액이 2천억에 달하였다.
차민우와 변호인단은 항소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차승조는 김지원이 이혼 소송으로 5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 분할을 요청하였기에, 결과를 보아야겠지만 그의 남은 재산 대부분을 이혼 소송으로 김지원에게 넘겨야 할 상황이 예상되었다.
차승조, 그는 한마디로 먼지 나도록 탈탈 털리고 있었다.
하지만, 구속된 후 쓰러진 그를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그의 네 명의 자식 중 하나는 그를 더한 나락으로 보내고 있었고 셋은 모친 김지원과 함께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만들어 놓은 업보였다.
당장 차승조가 보유한 현금은 10억이 채 되지 않았기에 그가 보유한 주식과 그간 투자로 매수한 부동산 등이 급매물들로 시장에 풀렸다.
또한 벌금 환수를 위해 일부 부동산은 압류 조치에 들어갔다.
그중 하나가 주란이 사는 집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울고불고 해봤자 아무런 힘이 없었고, 결국 주란은 그 집에서 급하게 개인 물품 몇 가지만 가지고 나왔다.
세아에게 줄 뻔한 집안 깊숙이 숨겨놨던 비상금 10억은 압류하러 온 세무 공무원들에게 들켜 몽땅 뺏겨버렸다.
그나마 밖으로 숨겨두었던 보석 일부와 현금 몇천만 원이 있었기에 급하게 방을 구해 들어갔다.
몇십 년간 일부 집안일 정도만 간간이 하며 넓고 아름다운 집에서 호화롭게 살던 주란의 눈에 협소한 원룸이 눈에 찰 리 없었다.
“이게 뭐야. 우리 집 부엌보다 작잖아. 여기서 어떻게 살아. 이건 잘못됐어, 잘못됐다구!”
비좁은 원룸 입구에 주저앉은 주란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1심 공판에서 쓰러진 차승조는 약 한 달 뒤 눈을 떴다.
하지만 후유증이 심했다.
사지마비로 얼굴부터 손, 발, 그리고 오른쪽 부위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부위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특히 얼굴의 마비가 가장 커서 말도 잘하지 못했고 뭔가를 씹어 먹는 것도 힘겨워했다.
그의 곁을 주란이 지키며 돌봐주고 있었는데 차승조가 깨어난 뒤로 주란이 곁에 오면 차승조의 발작이 시작되었다.
“어어어억……. 어어억! 너어어어!”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이 사람이. 여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얌전히 좀 있어야 밥도 먹여주죠!”
힘은 왜 그리 센지 움직이기도 힘든 몸으로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링거 호수며 주삿바늘들이 마구 빠지고 쓰러졌고, 주란이 입에 먹여주는 죽과 음식들은 사방에 튀고 엎어졌다.
그러다 보니 의료진이 급하게 안정제를 투약하거나 주란을 방에서 내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뇌 이상이 온 건가?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안 이러잖아!”
주란은 무너져가는 차승조를 곁에서 보는 것이 점점 더 짜증스러워지고 있었다.
‘저 양반 곁에서 숨죽이며 눈치 보고 산 게 몇십 년인데 남은 게 결국 저 사람 병시중이야? 나한테 남은 게 겨우 그거라고?’
하지만 아들 민우가 밖으로 나오면 다 해결될 것이었다.
주란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때까지는 어찌 될지 모르니 버텨야 했다.
차승조의 형이 판결되었는지라 일부 치료를 마치고는 교도소로 가서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무슨 마음에선지 김지원이 선처를 구하며 병보석을 요청하였다.
병이 위중하여 치료에 집중할 시기만이라도 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김지원이 보석금 10억 원을 지불하였고 차승조는 병원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양반도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아무것도 못 하는 몸으로 강주란이와 아웅다웅하며 살아 보셔야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김지원의 이 말을 들은 것은 지원의 딸 차유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