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어머님과 (구)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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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어머님과 (구)어머님
2023.04.17.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함께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결국 집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로 한 강현과 지연은 널찍한 소파에 기대어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강현 씨. 어머님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품에 폭 안겨 꼬물대던 지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내려 그녀의 눈을 쳐다보자 궁금증이 한가득 담긴 두 눈이 보였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 것인지.’
지연이 캐러멜 팝콘을 집어 강현의 입에 넣어주자 그는 지연의 손까지 ‘앙’하고 무는 척을 하였고, 지연이 곧 꺄르르 웃었다.
“우리 어머니요?”
“네, 어머님과 친해지고 싶어요. 그런데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조언 좀 해주세요. 제가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하거든요.”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곧 뭔가 생각난 듯했다.
“어머니는 꽃과 예술을 좋아하세요. 틈틈이 전시회도 보러 가시고, 취미로 유화를 그리기도 하시죠. 또 예전에는 도자기 만드는 것을 너무 좋아하셔서 한동안 엄청나게 만드셨어요. 본가에서 사용하는 그릇 대부분이 어머니께서 만드신 그릇들이에요, 선물도 많이 하셨고요.”
“예술 쪽에 정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네, 음악도 무척 좋아하시는데, 옛날 음악 요즘 음악 가리지 않고 좋아하세요. 친구분들과 좋아하는 가수 연말 콘서트 보러도 가시고요. 아, 무척 좋아하시는 뮤지컬 배우도 있으세요. 그 배우 뮤지컬은 빼놓지 않고 보시는 것 같아요. 저도 어머니 손에 끌려 한번 같이 보러 갔었네요.”
“어머, 저와 취향이 정말 비슷하신데요?”
“그래요? 이런……. 그렇다면 내가 지연 씨 취향을 아직 제대로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는 건데. 미안한데요?”
“미안하긴요. 다음에 뮤지컬 같이 보러 가요. 이런 건 저희 엄마 닮았나 봐요. 저희 엄마가 어렸을 때 연극부였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뮤지컬이나 연극 보러 가시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저 데리고 많이 다니셨거든요.”
“저희 어머니도 고등학교 때 연극 하셨다고 하셨어요. 지연 씨 어머님도, 저희 어머니도 두 분 모두 소녀 같으시고 감성이 풍부하신 걸 보면 닮으신 것 같네요.”
“그런가 봐요. 아무튼, 어머님과 통하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네요.”
“우리 어머니까지 신경 써주다니, 고마워요.”
“고맙긴요. 제가 고마운걸요.”
“저도 잘할게요. 지연 씨와 지연 씨 가족에게.”
그렇게 말하던 강현이 지연의 목에 자잘한 키스를 했다.
“역시 내 여자에게서 내 향기가 나는 건…… 언제나 치명적이에요.”
더욱 세게 지연을 품에 안던 강현의 두 손이 지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치명적인데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안으며 묻자 강현이 지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입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밤새 잠을 못 자게 할 정도로 치명적이랄까? 오늘도 나랑 우리 토끼 씨는 밤새 못 자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강현의 눈동자 안에 지연이 한가득 맺혀 있었다.
***
Rrrr-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지연이에요.”
-지연 양!
“어머님, 말씀 놓으셔요. 그냥 지연아……하고.”
-그럼 그럴까? 그래 지연아, 어쩐 일이야? 나야 연락 주어 좋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혹시 내일이나 모레 시간 있으실까 여쭤보려고 전화했어요. 괜찮으시면 어머님과 데이트하고 싶어서요.”
-어머머, 나야 지연이 본다면 좋지.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아. 그럼 어디서 만날까?
“어머님 댁에서 멀지 않은 G 백화점에서 만나는 건 어떠셔요? 거기 루프톱 레스토랑에 맛있는 신메뉴들이 나왔거든요. 거기에서 식사하고, H 갤러리에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코스 어떠세요?”
-지연이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걸? 내가 전시회 보러 가는 것 좋아하는 걸 또 어찌 알았지?
“사실 강현 씨가 팁을 살짝 주었는데 저도 전시회 보러 가는 걸 너무 좋아해요, 어머님. H 갤러리에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가 어제부터 시작하였어요. 너무 보고 싶었는데 어머님과 가게 된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나야 언제나 좋지. 그럼 내일 점심에 만나자꾸나. 12시 어떠니?
“네, 어머님! 12시 좋아요! 그럼 내일 뵐게요.”
지수원 여사와 전화 통화를 끝낸 지연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얼굴 가득 걸렸다.
지수원 여사와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 때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따뜻한 반응이라니.
스스럼없이 대해주시는 모습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얼른 지수원 여사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커진 지연이었다.
***
보라색 작은 꽃다발을 옆에 둔 지연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 그녀는 G 백화점 루프톱 레스토랑에서 지수원 여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의 만남은 강현이 없어서 더욱 긴장되었지만, 반면에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수원 여사가 자신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희망도 있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남자친구 어머니의 관심, 혹은 남편 어머니의 사랑.
전 남편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는데 그의 어머니에게 사랑을 바라는 게 더 웃긴 거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지수원 여사의 모습이 곧 보였다.
“어머님!”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연을 알아본 지수원 여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지연 양, 아니 지연아! 일찍 왔나 봐.”
“아니에요. 조금 전에 막 도착했어요, 어머님. 아, 여기 꽃다발이요.”
“어머, 이 예쁜 꽃다발 나 주는 거야? 너무 예쁜데?”
“오늘 어머님과 첫 데이트라서 준비해 봤어요. 맘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너무 맘에 들지. 고마워. 꽃이 우리 지연이 닮아서 참 예쁘네.”
지수원 여사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느껴져 지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꽃다발이 정말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꽃향기를 계속 맡으며 흐뭇해했다.
“어머님, 어떤 메뉴 시킬까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난 다 좋아. 여기는 내가 처음이니까 지연이가 시켜줘.”
둘은 맛있는 요리들을 먹으며 다양한 대화를 이어갔다.
정말 예술 쪽으로 관심이 많았던 지수원 여사의 지식은 상당하였고, 많은 부분 지연과 관심 분야가 겹쳐 대화가 잘 통했다.
굳이 힘들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둘의 대화는 술술 이어졌고, 시간 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어머, 시간이 벌써 2시간이나 지났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오랜만에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니까 시간 가는지도 모르게 대화를 하게 되었어.”
즐거움이 물씬 담긴 지수원 여사의 말에 지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어머님. 정말 어쩜 저랑 이렇게 취향이 비슷하셔요. 대화 내내 너무 즐거웠어요.”
“나도 너무 좋네.”
웃으며 지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지수원 여사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아니, 아니라니까!”
잔잔한 보사노바 선율이 흐르는 루프톱 레스토랑 안이 울리도록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났다.
지연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네다섯 테이블 정도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고진아! 네가 어찌 이렇게 쉽게 나한테 등을 돌려!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데! 에메랄드 클럽에 안착하게 된 게 다 내 덕인 걸 네가 잊었어?”
“주란 언니, 목소리 큰 건 여전하네.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신경 쓰지 않으려던 지연의 귀에 ‘주란’이라는 이름이 꽂혔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소리를 지른 것은 강주란이었다.
그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앞쪽에 앉아 있는 일행을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하…… 진짜. 창피하니까 빨리 앉아요.”
강주란과 함께 있는 것은 M 전자 김 회장의 원래 부인을 몰아내고 둘째 사모님이 된 고진아였다.
에메랄드 클럽에서 주란의 단짝과 같던 존재.
주란은 고진아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고 있던 참이었다.
차승조의 비리 판결 이후 주란이 머물고 있던 집과 값어치 나가는 대부분이 압수되거나 경매로 넘어갔다.
당장 있는 현금과 숨겨두었던 보석들로 급하게 방을 구했지만, 도저히 그대로 살 수가 없었다.
‘우리 집 부엌보다 작고 구질구질한 그 방에서 계속 어떻게 살아. 최소한 숨은 쉴 수 있어야지.’
해서 가장 먼저 생각나 찾은 것이 고진아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에메랄드 클럽이며 다양한 사교계 선배로서 많은 도움을 준 터라, 분명 도움을 구하면 당장 도와줄 터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만나보니, 생각과는 영 딴판의 대답이 돌아왔다.
“언니, 돈 빌려달라고요? 5억? 5억이 누구 애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내놓으라는 듯한 태도는 뭐람.”
“뭐……뭐야? 내가 언제? 그리고 네가 나한테 받은 게 있는데……!”
“까놓고 말해서 언니한테 내가 뭘 받았는데요? 도대체 뭘 해줬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맡겨놓은 돈 달라는 듯 얘기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언니랑 어울려 다녔다고 사람들이 나까지 오해하고 있어서 내가 지금 얼마나 난감한데 말이야.”
불편해하는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고진아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언니는 처지가 바뀌었으면 그거에 맞춰서 살 방도를 찾아야지, 방이 좁네, 구질구질하네, 어쩌고저쩌고하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거 어떻게 하면 여기서 더 잃지 않을지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다다 거침없는 말들이 고진아의 입에서 쏟아졌다.
이미 잿빛으로 변해 있던 주란의 얼굴이 생채기를 내는 듯 날카로운 고진아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네, 네가 감히…….”
“언니네 회장님과 아들 모두 지금 감옥행인데, 털면 더 나오는 거 아닌지 몰라요. 결국, 범죄를 저지른 거잖아요? 아무튼, 우리 회장님도 언니랑 내가 종종 어울렸다고 하니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몰라요. 혹시라도 뭔가 엮였을까 봐. 지금 내가 언니 때문에 얼마나 몸 사리고 있는 줄 알아요? 오늘도 만난 거 알면 난리 나지, 난리 나.”
“아니, 아니라니까! 범죄라니 무슨 말이야!”
결국, 참지 못한 주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지르듯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루프톱 레스토랑에 쩌렁쩌렁 울리다시피 했다.
고진아는 주란이 요청한 5억을 빌려주기를 거부했고, 결국 흥분한 주란이 앞에 놓여 있던 물컵의 물을 그녀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음 지은 고진아가 옆에 있던 냅킨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는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딴 식으로 하신다. 그래요. 나도 강주란 당신 얼굴 더 볼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잘 됐지 뭐.”
순식간에 미소를 지운 싸늘한 표정이 고진아의 얼굴에 걸렸다.
“오늘은 당신이 만나자고 했으니 당신이 밥값 내도록 해. 당신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밥이며 옷이며 이것저것 내 지갑에서 돈 나가게 했으니 이 정도 밥값이야 내는 게 뭐 대수겠어? 안 그래 강주란 씨?”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서 등을 돌린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바로 나가버렸다.
주란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레스토랑 매니저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소리를 좀 낮춰주시겠어요? 지금 너무 소란스러워 다른 손님들에게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어서요.”
매니저의 말에 주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는지 깨닫고 나니 순식간에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고개를 숙인 주란은 바로 일어서서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12만 5천 원입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고진아 이 계집애를 내 가만두나 봐라.’
다시 생각해도 분한 마음이 올라와 빨리 어디라도 가서 화풀이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찰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사용 정지라고 나오는데요. 혹시 다른 카드는 없으신가요?”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해봐요! 그거 우리 아들 블랙카드라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는데 사용 정지라고 나옵니다.”
난감해하는 직원의 말에, 피가 싹 빠져나가듯 주란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카드라고는 민우가 쓰라고 주었던 이 카드 하나였고, 현금도 아까 택시비로 낸지라 몇천 원 남은 것이 전부였다.
“분명 며칠 전까지 내가 이 카드를 썼다고! 내……내가 지금 다른 카드가 없는데.”
허둥지둥하며 가방을 뒤지는 시늉을 했지만, 그런다고 없던 카드나 돈이 나올 리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스토랑 직원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전화기를 들어 백화점 보안팀에 전화를 걸었다.
“이 카드로 이분 드신 거 계산해 주세요.”
이 말에 가방을 뒤지던 주란이 퍼뜩 고개를 들었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주하자 흉할 정도로 얼굴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