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악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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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악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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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악어의 눈물
2023.04.27.
-그게 무슨 말이야? 뭘 눈치챘다는 거야 그 양반이? 갑자기 전화해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야, 진짜!
강주란은 대뜸 전화해서는 짜증을 내는 최도강에게 같이 짜증으로 맞장구쳤다.
“눈치챘다고! 차승조가 눈치를 챘어! 우리 민우, 유전자 검사를 해달라고 했어. 자기 피가 아닐 수도 있다며.”
-뭐, 뭐야?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전화를 받던 주란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 질렀다.
전화 너머로 상상도 못 한 말이 들려오자 순식간에 그녀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고, 입술과 턱이 덜덜 떨렸다.
-아니, 그 인간이 어떻게 알았다는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이러냐고!
“난들 알아?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차승조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호자로 등록된 너한테 연락을 안 하고 나에게 했길래 회사 일이나 판결 일로 부른 거로 생각했는데 대뜸 이 말만 나에게 했단 말이야.”
전화기에 거의 비명을 지르듯 말하는 도강의 모습은 평소 차분하고 단정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게 불안함이 넘실거렸다.
34년을 조심스레 묻어두고 아무도 모르게 지켜왔다.
완벽하다고 자신해왔던 숨겨온 비밀.
하물며 아들 차민우조차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강주란과의 관계는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비밀리에 만나왔었고 최근 몇 년간은 그마저도 조심하며 몇 달에 한 번씩만 만나왔다.
이번 C&C의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모두 틀어지더니, 결국 차승조가 민우의 출생에까지 의심을 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다 만들었던 완벽한 성이,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
35년 전, 최도강은 한창 차승조의 신임을 얻어 가고 있는 패기 넘치는 젊은 비서였다.
부모님이 일찍이 돌아가시어 힘들게 자라온 그였지만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한국에서 손꼽는 명문대를 수석 졸업하며 C&C에 입사하였다.
일도 잘하고 머리도 비상해 어린 나이임에도 파격적인 승진을 하며 가장 가까이서 차승조를 보필하고 있던 그였다.
강주란과는 그녀가 차 회장의 집에 메이드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만나게 되었다.
35년 전의 강주란은 누가 보아도 혹할 정도로 예뻤다.
세련된 미녀는 아니었지만, 앙칼진 고양이 같은 매력이 있던 그녀였다.
그녀는 차승조의 집에 자주 방문하는 최도강을 눈여겨보았고, 사람들 모르게 그를 유혹했다.
공부와 일만 하느라 여자와 만나본 적 없던, 어찌 보면 순진했던 도강은 작정하고 유혹하는 주란에게 사정없이 빠져들었고 곧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혹시라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봐 차승조에게 고용된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도록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그는, 주란과 만나며 마음속으로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부모님이 일찍이 돌아가셔 혼자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며 언제나 갈급했던 가족애.
그 빈틈을 주란과의 사랑이 채워주고 있었고 핑크빛 미래만이 남았다 굳게 믿었던 도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한낱 회사원인 도강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김지원 여사와 차승조가 크게 싸워 서재에서 만취하도록 밤새 술을 마신 그날, 몰래 차승조에게 숨어들었던 그녀는 차승조의 마음을 얻어내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최도강은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래! 우리…… 우리 사랑하는 사이였잖아!”
절규하는 도강을 마주하는 주란의 얼굴에는 한 톨의 죄책감도 없었다.
“무슨 소리야, 도강 씨.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당신이랑 함께 살고 싶다고 한 적 있어? 물론 당신 말대로 우리 좋았지. 당신만큼 뜨거운 사람도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미래를 함께하자는 건 아니었어. 서로의 외로움을 잘 달래줬으면 된 거 아니야?”
그러고 보면, 사랑을 고백하는 도강의 말에 대답이 돌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그의 말에 웃어주기만 했을 뿐.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녀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했던 그녀였고 뜨거움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단 한 번도 자신들이 함께하는 미래를 의심한 적 없었다.
“도강 씨, 우리 순진한 도강 씨가 뭘 잘 모르나 본데……. 뭐든 확답을 받아야 이해관계가 성립되는 거야. 상상만으로 혼자 멀리 나가면 안 되지.”
그 뒤 주란은 연락을 딱 끊었고, 그렇게 그들의 사이도 정리되는 듯싶었다.
죽을 만큼 괴로웠던 도강이었지만, 또…… 살아내야 했다.
어떻게 살아온 삶인데, 여자의 변심 하나에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들 차민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민우가 태어나고 약 한 달쯤 뒤, 차승조의 지시로 그녀의 집에 선물을 배달하러 방문했을 때였다.
그사이 도강은 가능하면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고, 마침 차승조가 주란에게 집을 마련해 준 터라 그녀와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를 안고 그를 맞이한 주란은 도강에게 차를 마시고 가라며, 그냥 가겠다는 그를 끈질기게 붙잡았다.
마치 그를 만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주란을 바라보며 도강은 목에서 쓴 물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도강은 극구 싫다며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그를 향해 내뱉은 그녀의 한마디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들 얼굴, 한 번쯤은 제대로 봐야지, 도강 씨.”
처음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아들 얼굴 안 봐도 되겠어?”
“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보자 주란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안고 있는 아기의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사과 같은 뺨이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커다란 눈을 껌뻑이던 아기가 방긋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도강은 뒷걸음질했다.
“말도 안 돼.”
“나보다 당신을 더 닮은 것 같아.”
“거짓말하지 마.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 같아?”
더는 그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당신 아들이라고, 이 아이가.”
도강의 등에 대고 소리치는 주란의 외침이 확고했다.
“차민우가 최도강 당신 아이라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에 천천히 등을 돌려 경악스럽다는 듯 주란을 쳐다보자,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너……. 미쳤어? 그게 말이 돼?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응, 당신 아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이 아이를 가진 시기가 당신과 밤을 보냈던 날이니까 내가 잘 알지.”
얼어붙은 도강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온 주란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 회장 그 사람, 나와 첫 밤을 보낸 날 민우가 생긴 줄 아는데 그때 그 사람 만취해서 중간에 잠들었거든. 물론 그 사람은 나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기억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내뱉는 강주란을 보며 도강은 소름이 끼쳤다.
“뭐, 그 계기로 그 사람과 깊어졌으니 그게 그거지 뭐.”
도강이 아무 말이 없자 웃음을 머금고 있던 주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나를 도와줘야겠어, 도강 씨. 당신 아이가 C&C의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당신이 나를 도와줘.”
얼굴 가득 야욕을 드러낸 주란의 모습이 끔찍이도 징그럽게 느껴져 도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난 반드시, 김지원 그 여자를 내치고, 차승조 옆자리로 들어가고 말 거야. 그리고 내 아들, 우리 민우를 C&C의 가장 높은 곳에 앉힐 거야.”
갑작스럽게 도강의 한쪽 손을 덥석 잡은 주란이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둘 사이에 낀 아기가 미약하게 칭얼거렸다.
“당신에게 못되게 했던 거 내가 다 갚을게. 그러니까 나를, 아니 당신 아들 불쌍하게 생각하고 우리 좀 도와줘. 응? 나 혼자서는 안 돼. 당신이 있어야 해. 제발 도강 씨.”
어느새 눈물을 흘리는 주란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녀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민우가 제 아들이라는 말에.
그리고 한때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직 그 마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해 여전히 아름다워 보이는 주란의 말에 도강의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주란이 아이를 안은 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제발 나를 도와줘. 나, 다시는 지긋지긋한 가난한 날들로 돌아가기 싫어. 내 아이만큼은 이 세상을 발아래 두고 살게 해주고 싶어. 당신이나 나,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었잖아. 그런데 이제 기회가 왔어. 이 아이가 잘되면, 당신이 아빠라고 밝히고 그때 우리도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아니, 만약 당신이 그걸 원치 않는다면 당신 원하는 거…… 그걸 이뤄줄게!”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뱉어내던 주란이 몸을 들썩이며 거칠게 호흡했다.
“당신 아이를 봐서라도! 우리들의 아이 민우를 봐서라도 제발 우리를 도와줘.”
아직 그녀에게 마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그를, 주란은 잘 알고 있었다.
최도강, 그는 마음이 약했다.
그리고 주란을 참으로 많이 좋아했었다.
그걸 알고 있던 주란은 그의 마음속 약점을 쥐고는 마구 흔들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마음.
둘 사이의 아이.
그리고 허상과도 같은 미래의 약속까지.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거야.”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도강이 절망스러운 대답을 내뱉었다.
‘됐다!’
그 모습을 보며 주란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탄 거야 도강 씨. 나도 그렇고 당신도 이제 서로를 버리면 안 돼. 우리 아이, 민우를 위해서.”
***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응? 최도강! 뭘 어찌해야 하냐고? 유전자 검사하면 다 들킬 것이 뻔한데?
주란은 걱정되는 마음에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넌, 그냥 모르는 척하고 평소처럼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뭘 어쩌려고?
“검사, 해야지. 그리고 결과를 알려 줘야지.”
-뭐……뭐야? 뭘 어떻게 하려고? 그걸 하면 다 들키는데! 다 같이 죽자는 거야 지금?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어. 아무튼, 너는 평소처럼 해. 갑자기 이상하게 행동해서 더 눈치채게 하지 말고.”
-그 사람 나만 보면 발작을 일으킨다고. 이제 말까지 하게 됐으면 고함지르며 난리를 부릴 텐데.
“그런다고 다 포기할 거야? 너 다시 궁상맞게 살고 싶어? 여태껏 숨겨오며 기다려 왔던 것들 다 버릴 거냐고! C&C가 물 건너갔더라도 차승조의 숨겨둔 재산 정도는 받아내야지!”
마음을 다잡은 듯 도강이 독하게 대답했다.
“견뎌! 차승조가 어떻게 나오든 견디라고! 우리 민우가 나오는 1년 뒤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봐야 해.”
-알았어, 그럴게. 그러니까 당신도 방법을 잘 찾아봐. 알았지?
주란이 간절함을 담아 대답했다.
-난 곧 그 사람 병실에 가볼게, 평소 가던 시간 맞춰서. 나중에 다시 통화해.
통화를 마친 도강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머리를 차 핸들에 기대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군가 자신의 목에 밧줄을 칭칭 감아 조이는 듯,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돌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조급하게 마음을 가지면 안 되었다.
“머리를 써야 해, 머리를.”
한동안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한 것은 1시간쯤 뒤였다.
Rrrr Rrrr-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부사장님. 그간 별일 없으셨지요? 다름이 아니오라 차 회장님 일로 만나 뵈어야 할 일이 생겨 연락드렸습니다. 네, 네. 시간은 혹시 언제가 괜찮으실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모레 오후 2시쯤에 찾아뵙겠습니다. 장소는 어디가 편하실까요? 네, 그럼 메시지 주십시오. 알려주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전화를 한 사람은 차승조의 둘째 아들 차재우 C&C 글로벌 부사장이었다.
그 역시 이번 C&C 비리 사태에 역풍을 맞아 검찰이며 여러 곳에 불려 다니며 한동안 정신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