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뻐꾸기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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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뻐꾸기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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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뻐꾸기 새끼
2023.05.01.
도강이 차승조를 병원에서 만나고 이틀 뒤, S 호텔 한식 레스토랑.
이곳은 음식도 맛있었지만, 모든 테이블이 각각의 프라이빗 룸으로 따로 이루어져 있어 중요한 논의를 하기에 좋았다.
2시에 이곳에서 차재우 부사장을 만나기로 한 도강은 초조한 탓에 30분이나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지러운 마음에 거칠어진 손으로 몇 번이고 얼굴에 마른세수만 해댔다.
신경 쓰느라 그새 더욱 마른 얼굴은 푸른빛이 돌 정도로 파리해져 있어 그를 더욱 안쓰럽게 보이게 했다.
‘기회는 많지 않아. 한번, 단 한 번이야.’
아들을 위한 일이었다.
내 아들, 민우.
내 성을 주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
살아 있는 동안에 아비인 것을 밝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강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을 위해 뭐든 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 비서로서 차승조의 곁에서 그의 마음을 얻으며, 차민우를 시기적절하게 노출한 것도, 중요한 정보를 은근히 차민우 쪽으로 흘린 것도 자신이었다.
그렇게 해서 차근차근, 하지만 예상보다 더 빠르게 차민우가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차승조도 그리고 차민우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것만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도리인 것처럼.
어느새 시간이 되었는지 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단 한 번이야……. 단 한 번!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떨지 말고 천연덕스럽게 해야 해.’
“흠흠. 네, 들어오십시오.”
목소리를 가다듬은 도강의 대답에 천천히 문이 열렸다.
의외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도강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충격을 받은 듯 그의 눈빛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김지원이었다.
“기……김지원 사장님. 여긴 어쩐 일이신지.”
“오랜만이에요 최 비서님. 차 회장님 일 터지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맞나요? 회장님 일 때문에 그런가, 그 사이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반갑게 인사하는 지원을 바라보며 도강이 티가 나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도강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왜 이렇게 서 있어요. 앉으세요, 최 비서님.”
지원의 말에 얼음처럼 굳어 있던 도강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원래 오늘은 차재우 부사장님 뵙기로 했는데…….”
“네, 알아요. 통화하다가 재우가 오늘 오랜만에 최 비서님 만난다길래 같이 나오자 얘기했어요. 마침 말씀드릴 것도 있고 해서. 그런데 재우가 급한 일이 생겼지 뭐예요.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네요.”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들어왔다.
“저는 녹차를 마실게요. 최 비서님은?”
하지만 도강은 멍한 시선으로 넋 놓고 있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
“최 비서님?”
다시 한번 부르는 지원의 물음에 깜짝 놀란 도강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지원을 쳐다보았다.
“네?”
“뭐 마시겠냐고 물었어요. 주문해야지요.”
“아……. 저는 그냥 물이면 됩니다.”
지금 뭔가를 마실 정신이 없었다.
빨리 이 시간을 자연스럽게 넘기고 차 부사장과 다시 시간을 잡아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혹시라도 늦어져 차승조가 다른 이를 찾으면 큰일이다.
“그냥 녹차 2잔 주세요.”
지원이 알아서 주문하고는, 직원이 룸에서 나가자 도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실까요, 최 비서님?”
“네?”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어요.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저 때문인가요?”
“그건 아니고……. 아니, 아닙니다.”
“그나저나 차 회장님 일로 꼭 전해줘야 할 일이 있다면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일 때문에 재우 나오라고 하신 거 아니신가요?”
“아, 별것 아닙니다. 제가 나중에 차재우 부사장님 뵈면 이야기 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지원이 피식 웃었다.
“재우에게는 이야기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못하는 이야기라?”
“그게 아닙니다. 사장님께서 굳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될 일이라…….”
“별일 아닌데 부사장에게는 꼭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야기? 더 궁금해지네요.”
웃고는 있지만, 날이 선 듯 날카로운 질문에 도강은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떨궈 테이블만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눈동자만 이쪽저쪽으로 곁눈질하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혹시 이 이야기는 아닌가요?”
퍼뜩 고개를 든 도강이 지원을 쳐다보았다.
“차민우가 차 회장 피가 아니라든가……. 뭐 그런 얘기?”
“네? 지금 무슨!”
하지만 그때 알 수 있었다.
‘이 여자였구나! 차 회장에게 이야기를 전한 것이!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도대체 언제? 어떻게? 김지원, 너 어디까지 아는 거야?’
아무 말도 없이 꼼짝 않고 있었지만, 도강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물음이 뒤죽박죽 뒤엉켰다.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세요, 최 비서님.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친절한 지원의 물음에 도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이었다.
“아니면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너무 놀랐나? 민우 아버님?”
***
지원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지연이 아직 민우와 살고 있을 때였다.
집안 행사로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주요 임원들이 차승조의 집에 모여 있던 날이었다.
행사에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어 각 임원의 비서실장들이 행사를 도와주고 있었다.
지원은 안주인으로서 여러 가지를 챙기다가 주란이 도착하자 그녀가 꼴 보기 싫어 멀리 떨어져 행사를 관망하고 있었다.
어차피 행사 계획은 잘 짜여 있었고, 참석한 사람들과 인사도 어느 정도 다 한지라 이제 자신하나 빠진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거기다 얼굴에 철판을 깐 주란이 민우 옆에 찰싹 붙어 안주인처럼 행동할 터라.
멀리서 꼴 보기 싫은 주란과 민우가 대화하고 있는데 차 회장의 비서실장인 최도강이 칵테일을 들고 둘에게 다가가 민우에게 전해주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민우와 도강이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김지원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차민우의 웃는 모습이 최도강과 판박이로 닮아 있었다.
마치, 최도강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체격은 차민우가 훨씬 컸지만, 저 얼굴. 웃는 모습.
영락없는 젊은 날의 최도강이었다.
한 번도 이 둘을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본 적이 없었던지라 몇십 년간 몰랐었는데, 이날 지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한번 이게 신경 쓰이자 도강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자 보이는, 최도강의 놓쳐지지 않는 시선의 끈.
민우가 움직이면 도강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민우는 모르게 그 주변을 서성였고, 잠시 틈이 생기면 거기에 끼어들어 대화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 마주쳐 얽혀지는 도강과 주란의 시선.
찰나지만 티 나지 않는 은밀한 스킨십.
평소라면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 어이가 없네. 최 비서와 강주란, 그런 거였어?”
상상도 못 한 조합의 관계에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
사람의 감이란, 어떨 때는 그 어떤 증거보다도 정확할 때가 있었다.
아쉽게도 그 감은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더욱 예민하게 오고는 했다.
차승조와 강주란의 사이를 알았을 때처럼.
“그래. 어디 한번 파 볼까, 강주란?”
그 뒤는 너무도 흔한 이야기였다.
주란과 도강의 뒤를 캐자 자주는 아니어도 드문드문 남들 눈을 피해 만났다……라든가.
차민우와 차승조의 유전자 검사를 하자 매칭이 안 되었다든가.
그리고 차민우와 최도강으로 검사를 하자 99.9%로 친자로 결과가 나왔다든가 하는.
그렇고 그런, 아침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
***
“민우는 아직 모르는 거죠? 최 비서님이 아버지라는 거?”
“사모님, 아니 김지원 사장님.”
“네, 최 비서님.”
대답하는 지원의 얼굴에는 재미있는 쇼를 볼 때나 나올만한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잘못 아신 겁니다. 절대,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풍비박산 나기 일보 직전인 C&C에 왜 또 문제를 일으키려 하시는 겁니까. 이 회사는 차승조 회장님뿐만 아니라 사장님의 회사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왜 차 상무를 음해해서 그를, 그리고 회사를 더 망가트리려 하시는 건가요!”
음산하게 낮아진 목소리를 내뱉으며 지원을 노려보는 도강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게요, 이 회사, 우리 아버지가 세우셨죠. 그리고 딸보다도 더 믿은 잘난 사위에게 물려주셨는데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요? 그 건실하던 기업이, 그 어느 곳보다 도덕적이고 깨끗하던 이 회사가 말이죠. 이제는 비리의 상징처럼 사람들이 회자하고 있다니. 이 현실을 참 믿을 수가 없네요.”
대답하는 지원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지워졌다.
“음해라……. 음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라도 사실을 밝히는 것인지는 과학과 경찰이 밝혀 주겠죠. 제가 한마디 한다고 손바닥 뒤집듯 뭐가 바뀌겠어요? 과학수사를 해야지? 이미 자료는 넘어갔답니다. 최 비서, 아니 민우 아버님.”
“무슨 말입니까! 넘어가다니, 뭐가 누구에게…….”
“누구긴 누구겠어요? 뻐꾸기를 자기 새끼로 알고 있던 뱁새겠죠.”
생긋 웃으며 지원이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저 이제 가봐도 되겠죠, 최 비서님?”
도강이 아무 말이 없자 지원이 등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하다 잠시 멈췄다.
“강주란에게도 얼른 이야기해줘요. 모르는 척 괜히 병원에 가서 돌봐주다가 날벼락 맞을지 모르니 얼른 피하라고.”
이 말을 끝으로 지원은 룸에서 나갔고, 도강은 얼음처럼 굳은 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룸에서 나온 지원은 의외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강현이었다.
“어머, 이강현 본부장. 여긴 무슨 일이에요?”
“안녕하십니까, 김지원 사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나야 아주 재미있게,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이 본부장은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상견례가 있습니다.”
“어머나! 드디어 지연이와 날 잡는 건가요?”
“네, 그럴 것 같습니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들이 빨리 함께 하는 게 좋지, 축하해요!”
지원은 진심으로 강현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난 뻐꾸기들 좀 처리하느라고 잠깐 왔었는데 이제 가려고요.”
“뻐……꾸기요?”
이해할 수 없는 지원의 말에 강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게 있어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우는. 그럼 오늘 잘 만나도록 해요. 지연이와 고은이에게도 안부 전해주고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손을 흔들며 지원이 레스토랑에서 나가자 강현이 손목의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였다.
“올라올 때가 됐는데…….”
아직 약속 시각 전이었지만, 지연이 주차장에 도착했다며 메시지를 보내왔기에 지연의 가족을 맞이하고자 입구에 나와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지연과 지연의 가족들이 도착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강현이 반갑게 인사하며 지연과 가족들을 룸으로 안내했다.
“아버지, 어머니. 도착하셨어요.”
그러자 안에 앉아 있던 강현의 부모님과 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저는 지연이 아비 되는 은주훈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연이 엄마인…… 어머! 설마……. 지수원 선배?”
깜짝 놀라는 목소리에 모두가 김고은 여사를 쳐다보았다.
“김고은? 맞아? 내가 아는 그 고은이가 맞는 거야?”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하던 지연의 모친 고은이 갑자기 강현 모친의 이름을 부르자 지수원 여사 역시 그녀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너를 여기서 만나고!”
“어머, 어머!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선배를 여기서 만나고! 웬일이야.”
두 손을 맞잡은 둘은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런 지수원과 김고은의 모습에 모두 얼떨떨해 둘을 바라보았다.
“어머, 우리 아무 설명도 안 하고 반가워만 했네. 다들 깜짝 놀랐나 봐요. 수원 선배랑 내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거든. 게다가 친한 연극부 선후배였었어.”
고은의 얼굴에 반가움과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우리 세상에서 가장 파릇파릇할 때 만났었는데, 이렇게 나이 들어 만나니 너무 웃긴다, 고은아. 그런데 넌 나이를 어디로 먹었니. 얼굴이 고등학교 때랑 달라진 게 거의 없어.”
“어휴, 그러는 선배야말로 얼굴이 고등학교 때 그대로라 내가 바로 알아봤잖아요.”
“말이라도 고맙다, 얘!”
마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듯 까르르 웃으며 서로를 반가워하는 두 분의 어머님을 지연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긴장했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