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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행복한 결혼의 정의 (81/85)


81. 행복한 결혼의 정의
2023.05.08.


이른 아침의 공기가 꽤 차가웠다.

하지만 왠지 너무 상쾌해서 지연은 잠시 창문을 열어두고 싶었다.

괜스레 손도 밖으로 빼서 바람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렇게 창문 열어두면 안 추워요?”

“잠시만 열어두고 싶어요. 너무 시원해서요. 아, 혹시 강현 씨 추워요?”

“난 괜찮아요. 지연 씨 좋은 대로 해요.”

차는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강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시간 강현과 함께 강릉으로 향할 줄. 어제저녁 강현과 통화하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간 바빴던 강현의 일정으로 만나기 쉽지 않아 매일 하루에 두세 번 전화나 화상 통화를 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오늘도 많이 늦어요? 금요일인데.”

-음, 오늘은 10시 전에 끝날 것 같아 그나마 양호해요. 불금인데 회사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죠. 물론 지연 씨 만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겠지만.

“10시!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늦네요. 이러다 우리 강현 씨 쓰러지면 안 되는데.”

지연의 목소리에 강현을 걱정하는 마음이 한가득 담겼다.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중간중간 쉬면서 일할게요. 지연 씨는 뭐 하고 있었어요?

“방 정리하다가 나온 사진들이 있어서 좀 보고 있었어요. 10여 년 전 대학교 때 사진이요.”

전화기로 지연의 작게 웃는 소리가 전해졌다.


-다음에 나도 보여줘요. 지연 씨의 10년 전 모습 너무 보고 싶어요. 지금도 귀엽지만, 그때의 지연 씨 정말 너무 귀엽겠네요.

“음, 귀엽다기보다는 무척 촌스러워요. 지금 보는 사진도 친구들이랑 강릉 가서 사진 찍은 건데, 친구들은 다 예쁜데 저만 엄청 촌스럽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 강현에게 보냈다.


“친구들이랑 이때 해돋이 보면서 한 말이, 다음에는 여자친구들이 아닌 꼭 남자친구랑 와야 한다. 남자친구랑 올 때까지는 절대 다시 오지 말자 했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 말대로 되었는지 결국 저는 그 뒤로 강릉을 한 번도 못 가봤지 뭐예요.”

지연이 웃으며 말했지만 조금은 아쉬운 듯 느껴지자 강현이 바로 대답했다.


-우리 강릉 가요. 내일 새벽 출발 어때요?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지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릉이요? 내일 새벽에요? 강현 씨 나 그냥 한 말인데……. 안 그래도 돼요. 내일은 강현 씨 쉬어야죠.”

-지연 씨와 함께 있는 게 쉬는 건데요. 나랑 가요, 강릉. 물론 지연 씨 일정이 괜찮으면요.

“강현 씨 야근하는데 괜찮겠어요? 저야 좋지만…….”

-저도 강릉 가본 지 무척 오래돼서 가고 싶어요. 지연 씨와 어디 여행 가고 싶었는데 딱 좋은데요? 좀 빨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6시 출발 어때요? 가서 주말 보내고 와요, 우리.

 

이렇게 갑자기 결정된 강릉 여행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다행히 차가 별로 없어 3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도착했다.

예약은 또 언제 한 것인지 강현은 연 지 얼마 안 된 멋진 호텔에 주차했다.


“언제 이렇게 예약을 한 거예요? 저도 어제 여기 알아봤는데 방이 없던데.”

“다행히 친구 중에 이 호텔 관련자가 있었어요. 지연 씨와 처음으로 여행 간다고 좋은 숙소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이 호텔 행사로 잡아둔 방이 몇 개 있는데 주말 동안 빼 줄 수 있다고 바로 잡아주더라고요. 알잖아요, 제 친구들. 이강현 장가보내는 데 진심인 거.”

강현의 말에 지연이 크게 웃었다.

진짜 강현의 친구들은 그의 결혼 지원에 진심이었다.

일전 지연 부모님께 보여준 이벤트만 해도 그랬다.


“고마운 녀석들이에요. 제가 더 잘해야죠. 제가 인생을 살면서 잘한 게 있다면 지연 씨에게 고백한 것과 제 친구들을 만난 걸 거예요.”

맞잡은 지연의 손을 더욱 꼭 잡더니 강현이 미소 지었다.

바로 체크인해서 들어간 방은 너무나도 멋진 바다 전망을 하고 있었다.

방뿐만 아니라 욕실과 화장실까지 바다 전망으로 되어 있어 절로 탄성이 나왔다.


“와~ 여기 너무 멋진데요? 온종일 여기에서 바다만 보며 있어도 힐링하겠어요. 주말 동안 물멍해야지!”

“물멍? 그게 뭐예요?”

“왜, 불멍이라고, 캠핑 가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정화되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잖아요. 여기는 바다 전망이 끝내주니까 물멍이죠. 저도 요즘 친구들 자주 만나니 이런 말들도 알게 되었어요.”

“그러네요. 우리 물멍 많이 하고 가요.”

지연이 창가에 붙어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보며 끊임없이 감탄하자 강현은 그런 그녀가 귀여워 미소 지었다.

어느새 그는 지연의 뒤로 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나야 방 안에서 온종일 지연 씨 꼭 껴안고 방콕하고 싶지만, 그래도 강릉까지 왔는데 바다에 발은 담가봐야겠죠? 하……. 그런데 우리 지연 씨 이렇게 안고 있으니 나가기 싫다.”

지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간 강현이 입술을 눌러 키스하자 지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도 강현 씨랑 종일 방콕하고 싶은데, 그래도 모래 한번은 밟아 줘야죠.”

하지만 지연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몸을 돌리더니 강현의 머리를 끌어당겨 그의 입술을 찾았다.

갑자기 찾아든 꽃잎 같은 지연의 입술에 강현이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우리…… 나가야 하는데…….”

몰아쉬던 호흡 사이로 들려오던 지연의 작은 속삭임은 곧 강현의 입술 속으로 삼켜졌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강현과 지연이 호텔과 연결된 호텔 전용 해변으로 나온 것은 결국 1시간 뒤였다.

직접 모래를 밟고 싶어 둘 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다.


“맨발로 모래 밟아본 거 정말 오랜만이네요. 부모님이랑 괌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나?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5년은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됐어요? 그사이에 어디 여행 안 갔어요? 친구나, 언니 오빠랑은?”

“언니 오빠는 너무 바쁘기도 했고, 친구들은 최근 3년 동안은 얼굴을 자주 못 봤었어요. 그러고 보니 어디 간 데가 없었나? 아, 발리는 가봤는데…….”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던 지연이 급하게 말을 멈췄다.


“발리는 어때요? 저는 안 가봤는데 거기 리조트들이 모두 멋지다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제가 아는 미국이나 유럽 동료들은 발리나 동남아에 대한 로망들이 있었어요. 휴가를 모아서 2, 3주 정도 갔다 오고는 하던데 다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저도 사실 가보기만 하고 돌아다니지는 않아서 전혀 몰라요. 리조트에만 있었거든요. 강현 씨는 여행 가본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은근슬쩍 얼버무린 지연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발리. 그녀와 민우의 결혼식을 했던 곳이자 신혼여행지였다.

그의 가족은 부모님인 차승조 회장, 그리고 강주란 단 두 사람만이 참석했었다.

민우의 이복형제들은 참석하지도 않았었다.

지연 쪽에서는 지연의 부모님, 언니 오빠의 가족들이 참석했었다.

지연의 가족은 결혼식을 발리에서 한다는 것에도 불만이 있었지만 차민우가 워낙 강하게 지연에게 이야기했던지라 그의 뜻을 거스르기 싫었던 지연이 자신의 가족을 한참이나 설득했었다.

둘의 시간을 위해 결혼식이 끝나고 다음 날 바로 가족들이 돌아가자, 그때부터는 민우는 리조트 룸을 바로 하나 더 잡아 따로 지내다 비행기만 같이 타고 돌아왔기에, 여행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나와 다시 가봐요. 멋진 곳이 많다고 들었어요. 친구 하나가 거기에서 사업을 하는데 연락할 때마다 저에게 오라고 난리거든요. 특히 지연 씨 얘기했더니 더 난리예요. 둘의 사랑을 더욱 깊어지게 해주겠다나 뭐라나.”

“우리의 사랑을 더욱 깊어지게 해주겠다니 너무 좋은데요? 우리 연말에 휴가 내서 갈까요?”

‘그러면 당신과 함께한 행복의 찬란한 색이 과거의 어두웠던 무채색의 기억을 덮어주겠죠?’

즐겁게 이야기하는 강현을 지연이 말없이 쳐다보며 생각했다.


“강현 씨는 우리 신혼여행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요?”

최근 둘의 결혼식 관련한 이야기가 두 가족의 가장 주요 관심사였다.


“나는 지연 씨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그리고 사실 지연 씨와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서 딱 한곳을 말하기가 참 어렵네요.”

맞잡은 지연의 손등에 키스하며 눈을 맞추던 강현이 대답했다.


“저도 그렇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없어요?”

“그렇다면 전 지연 씨와 하와이에 가보고 싶어요.”

“하와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곳을 말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신혼여행지로는 흔할 수 있지만, 제가 가본 여행지 중 가장 행복한 기억이 있는 곳이에요. 학교 다닐 때 몇 달간 파트타임 일 열심히 해서 제힘으로 돈을 모아 가본 첫 여행지가 하와이였거든요.”

잠시 그때가 생각난 듯 강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걸 보는 지연의 얼굴에도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유학 가기 전도 그렇고 유학할 때 정말 공부만 하고 살아서 막상 미국에 있었을 때 여행 다녀 본 곳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 몇 달을 잠도 줄여가며 미친 듯이 일해서 모은 돈으로 어디를 갈까 한참 검색을 하는데 눈에 딱 들어온 곳이 하와이였죠. 배낭 하나 메고 가서 한 달을 지냈는데, 정말 너무 좋았어요. 가서도 일하며 자급자족하느라 힘들기도 했는데 정말 좋은 사람들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죠.”

“혼자 그렇게 준비해서 갔었다니, 대단한데요?”

“라니카이 비치의 에메랄드 바다를 보면서 언젠가 내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생긴다면 꼭 함께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신혼여행은 아니어도 돼요. 하지만 언젠가 지연 씨와 꼭 함께 다시 가보고 싶어요.”

“하와이에 가요, 우리. 저도 강현 씨가 느꼈던 하와이에서의 행복했던 기억, 느껴보고 싶어요.”

“좋아요, 그리고 앞으로 좋은 곳 많이 가봐요. 우리 둘이서.”

 

드디어 지연과 강현의 결혼식이 2개월 뒤로 결정되었다.

결혼식 일정을 정하는데 뭔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자, 두 사람의 모친들이 전격 결정한 것이었다.

지연과 강현의 두 사람의 요청은 딱 2가지였다.

결혼식을 가족과 가까운 지인만 모여 50인 미만으로 하고 싶다는 것.

두 사람의 결혼식을 작게 하는 대신 두 사람의 결혼 기념으로 기부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 외에는 모친 두 분이 친하시니까 준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가족들, 특히 모친 두 분은 강현과 지연의 결혼 준비에 완전 신이 나신 상태였다.

과거에도 친했던 두 사람은 여전히 죽이 잘 맞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제는 제일 친한 친구처럼 매일 만나며 두 사람의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하나도 신경 안 써도 돼. 이 엄마들이 리스트 쫙 뽑아서 대령할 테니, 너희들은 그냥 고르기만 하면 된다. 아휴 신나라!”

“그래그래, 수원 선배랑 아니 사부인이랑 내가 잘 준비할 테니 너흰 그냥 기다리면 돼. 아휴 근데 사부인이라니, 선배 우리 꼭 그렇게 불러야 해요? 어색해 죽겠네.”

“사부인, 너무 웃긴다 고은아. 남들 신경 쓸 거 뭐 있니. 그냥 우리 편한 대로 부르자고.”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 웃는 두 분의 어머님들은 마치 고등학교 선후배 때로 돌아간 듯 행복해 보였다.

얼마 뒤,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하게 된 아버지 은주훈 회장이 조금은 불만이라는 듯 지연에게 하소연했다.


“네 엄마가 너희 결혼식장 찾는다고 사부인과 제주도에 2박 3일 간다는구나. 너희 결혼식인데 어째 네 엄마가 더 신난 것 같아. 지난주에는 청평과 춘천을 1박 2일 돌더니만.”

지연과 강현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며 여행을 가듯 서울부터 지방, 제주도까지. 두 분의 어머님께서 전국 방방곡곡 찾아다니고 계시는 요즘이었다.


‘행복한 결혼이라는 건 이런 건가 봐.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함께 행복하게 되는 거…….’

아버지의 고민 아닌 고민을 들으면서, 왠지 두 사람의 결혼이 어머님들에게 또 다른 행복감을 준 것 같아 지연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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