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너
(82/85)
82.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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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너
2023.05.11.
[언니, 늦지 않게 와야 해요. 알았죠?]
벌써 세 번째 문자.
귀여운 이모티콘이 가득한 은우의 메시지를 보며 지연이 웃음 지었다.
오늘은 가족처럼 아끼는 대학교 후배 은우가 함께 친했던 수희와 꼭 함께 만나야 한다며 지난주부터 신신당부한지라 시간 맞춰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셋이서 함께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민우와의 결혼을 기점으로 아끼는 친구들과 거의 만나지도 못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는 게 새삼 놀라웠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요즘 들어 잘 알게 되었다.
그와의 결혼 기간이었던 지난 3년.
돈이 없거나, 시간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건만, 그때는 누구를 만나거나 맘 편히 이야기를 터놓기가 힘들었다.
언제나 긴장되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전남편과 시댁과의 관계에서 오는 힘듦과 괴로움이 한가득 차 있어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리라.
바닥을 치던 자존감도 영향이 있었을 테고.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근황을 말하다 보면 왈칵 울어버릴 것 같고, 구구절절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할 것만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왠지 사람들이 그녀가 힘든 것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그저 숨기고, 꾹 참고, 견디면 될 줄 알았다.
그때를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이제는 그런 게 아닌 걸 아니까.”
잠시나마 기억났던 어두운 과거를 떨쳐내듯, 손을 뻗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볼륨을 크게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니 한참 동안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벌써 기대가 됐다.
도착한 약속 장소는 남산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탑이 유명한 카페였다.
주차하고 입구로 가자 앞에 놓여 있는 입간판에 ‘오늘은 예약으로 만석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예약했다니까 괜찮겠지?’
입구 메시지 때문인지 사람들이 넘쳐났을 인기 있는 카페에 손님이 없었다.
은우를 찾기 위해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자 곧 직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네, 기은우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아, 네. 일행분 도착하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3층으로 가시면 되세요.”
“감사합니다.”
이곳은 루프탑도 유명했지만, 플라워 카페로도 유명했다.
카페 곳곳에 정말 많은 꽃과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어 1층에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다양한 꽃내음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다음에 강현 씨랑 와봐야겠다.’
강현에게 소개해 줄 멋진 곳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만나고부터는 참 좋은 곳, 아름다운 곳을 많이 다녔는데, 지연은 알고 있는 멋진 곳이 없어 항상 아쉬웠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며 발걸음을 더할수록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꽃내음이 짙어졌다.
“꽃밭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싱그러운 향이 가득 날 수 있지?”
마치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드넓은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짙은 꽃내음이 지연을 감쌌다.
3층에 도착해 루프탑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지연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50평은 됨직한 공간의 반 이상이 다양한 꽃으로 가득하여 살랑이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프로방스의 라벤더 밭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하여 지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때마침 눈앞에 흩날리는 꽃잎들에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 서프라이즈~!”
놀라워하며 멈춰 선 지연의 양옆에서 꽃잎을 뿌리며 갑작스레 나타난 은우와 수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니, 결혼 축하해요!”
“축하해, 지연아!”
그러고 나서 하나둘 등장한 친구들의 모습에 놀란 지연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너희들…….”
너무 놀란 지연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지연 언니 진짜 놀랐나 보다. 우리의 깜짝 선물이 성공했네.”
즐거워하며 까르르 웃던 은우가 지연의 손을 이끌더니 안쪽에 있는 자리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제야 한쪽 공간을 가득 채운 풍선들과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사랑하는 은지연♡ 결혼 축하해♡ 너의 행복을 응원해♡]
은우와 수희, 하영, 중학교 5총사. 그리고 주연 대리까지.
지연이 아끼는, 그리고 지연을 아끼는 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온 친구들은 하나씩 들고 있던 꽃다발을 지연에게 전해주었다.
두 손 가득, 꽃다발을 받아든 지연은 행복한 광경에 어느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고마워, 모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은우의 이끌림에 자리에 앉은 지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강현 형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고. 결혼 전에 지연이 네가 친한 친구들과 행복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마침 우리도 네 브라이덜 샤워를 해주자고 이야기 나눈 참이라 잘됐다 싶었지.”
“강현 씨가?”
“응, 그래서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바로 행동에 나섰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충식의 팔을 중학교 동창 유나가 꼬집었다.
“야, 넌 그러고선 바로 나한테 연락한 거밖에 더했어?”
“아얏! 야! 빠르게 연락한 게 중요한 거지! 그리고 여자친구 앞인데 자중 좀 해줄래?”
충식의 대답은 지연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여자친구? 누구? 설마……!”
옆에 앉아 있던 주연 대리가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 너도, 나도 바빠서 연락이 좀 뜸했지? 하하……. 주연 씨랑 그렇게 됐어.”
충식의 손이 주연 대리의 손을 깍지 끼듯 잡더니 웃으며 들어 올렸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충식의 모습을 보자 지연의 얼굴에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잘됐다, 충식아. 주연 대리님, 너무 축하해요.”
“감사해요, 과장님.”
중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전 직장 동료.
알게 된 이유나 시간은 달라도, 모두 지연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친구가 되어 있었다.
행복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눈에 담는 지연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사랑하는 내 사람들.
나를 사랑해 주고 걱정해주고 아껴주는 이들이 언제나 내 곁에 있었는데, 나는 왜 그걸 잊고 혼자 고민했을까?
내가 힘들어도, 혹은 행복해도…….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조언해주고 내 편에서 힘을 주었을 내 친구들을 두고 말이야.
따스한 햇볕 같은 이들이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그리고 이 따스한 시간을 만들어준 강현에게 고마웠다.
“언니, 여기 이 수많은 꽃은 형부의 선물이야. ‘우리 지연 씨, 앞으로 꽃길만 걷게 할 겁니다.’라고 말씀하시던데?”
강현이 선물했다는 수많은 꽃을 바라보며 지연이 살며시 미소 짓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이 사람은…….”
살랑이는 바람결에 달콤한 꽃내음이 실려 와 지연의 마음을 적셨다.
“언니와 형부 덕분에 우리도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네. 이런 날일수록 행복을 만들어 준 주인공과 함께 보내야지. 언니, 얼른 형부에게 가봐요.”
이른 저녁 시간까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지연은 친구들의 성화에 예상보다 일찍 강현에게로 향했다.
오늘은 은우, 수희와 함께 저녁까지 먹고 온다며 강현에겐 내일 보자고 했었지만.
‘혹시 집에 없으면 어쩌지?’
그는 지연이 늦게 돌아올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라 어쩌면 약속을 잡고 나갔을 수도 있었다.
“미리 연락할 걸 그랬네.”
‘지금 그가 집에 없으면 내일 보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급하게 오느라 연락도 못 한 것이 내심 아쉬웠다.
딩-하며 들려오는 도착 음에 멍하니 엘리베이터 문을 쳐다보는데, 열리는 문틈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강현을 발견한 지연은 이 순간이 왠지 또 하나의 선물 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린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즐거웠어요?”
원래도 달콤하지만, 오늘따라 더욱 달달한 그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강현 씨는…….”
결국, 그의 품 안에서 눈물이 터져버린 지연을 보며 강현이 당황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멋진 거예요. 왜 이렇게 완벽해.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매일매일 감동을 주고 말이야.”
흐느끼는 와중에도 사랑스러운 말들을 뱉어내는 지연을 강현이 꼭 끌어안았다.
그의 사랑에 행복함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은지연이라는 존재가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난 원래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는데.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변한 거예요.”
흐느끼는 지연의 등을 토닥이던 강현이 지연의 이마에 따스하게 키스했다.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방울방울 눈물을 쏟아내는 지연이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러웠다.
“우리 지연 씨, 내일 눈이 퉁퉁 붓겠네. 예쁜 개구리여도 난 너무 사랑하지만.”
“으흑, 그게 뭐야.”
꼬물꼬물,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지연에게서 꽃내음이 나는 것만 같았다.
“친구들과 즐거웠어요? 들어가서 오늘 어땠는지, 나에게 말해줘요.”
지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강현이 지연을 안아 올렸고,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할 말이 엄청 많아요. 밤새워 말할 거예요. 그러니까 중간에 잠들면 안 돼요?”
“밤새 말해줘요. 내 품에서.”
지연을 안아 든 채로, 그녀의 코를 장난스럽게 살짝 깨문 강현이 웃었다.
“나도 지연 씨 밤새 안 재울 거니까.”
결국, 이른 새벽의 빛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 때쯤에야 지연을 놓아주었다.
기절하듯 잠든 그녀를 강현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품는 내내 흘린 눈물 때문인지 잠이 들었는데도 지연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쓰다듬자 그녀가 잠결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그녀를 푹 쉬도록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지, 몸보신을 시켜야 하나?’
얼마 전부터 온유 제약에 출근하며 새로운 사업의 윤곽을 잡고 있는 지연은 강현만큼이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예전부터 해보고 싶어 하던, 병원 환자들의 회복을 돕는 ‘테라피독(Therapy Dog)’ 프로젝트였다.
테라피독 프로그램에서 활약할 강아지로는 유기견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유기견 보호, 재활, 교육 등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출근하는 와중에도, 평일 중 하루나 이틀.
그녀는 매주 유기견 보호센터에 봉사하러 가고, 주말이면 외부에서 진행되는 입양 행사도 지원하고 있어 어떨 때는 강현보다도 바쁘게 지내기도 했다.
근래 들어 예전보다 마른 것 같아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꿈꿔왔던 일에 한 발씩 내딛는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났기에 강현은 묵묵히 그녀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녀를 알고 나서 그의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선하고 바르게는 살았지만, 주변을 둘러보거나 일부러 찾아 무언가를 나누는 일은 없었던 삶이었다.
그저 내가 바르고 올바르게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생각을 깨버린 그녀였다.
지연은 끊임없이 나눠주고 베풀고 싶어 했다.
언제나, 무슨 일에서건 기쁨을 찾고 감사함을 말했다.
어느새 스며든 그녀의 마음과 생각은 어느새 강현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지연은 언제나 강현에게 감사함을 말하지만, 정작 감사한 것은 자신이었다.
“내 인생에 나타나 줘서, 나를 받아줘서, 그리고 내 사람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얼굴로 흘러내린 지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기고는 눈가에 키스했다.
“사랑해, 은지연.”
마치 그의 고백에 답변이라도 하듯, 지연의 입가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현이 그녀의 입가로 귀를 가져가자 웅얼거리듯 들려오는 작은 소리.
“떡……볶이…….”
오물거리는 입술이 귀여웠다.
“오늘은 내 사랑에게 맛있는 떡볶이를 해줘야겠네.”
두 팔로 지연을 꼭 안자, 그녀가 그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