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무엇보다 특별한 순간들
(83/85)
83. 무엇보다 특별한 순간들
(83/85)
83. 무엇보다 특별한 순간들
2023.05.15.
사람들이 많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손에 땀이 났다.
아닌 척해도 긴장을 많이 한 것일까?
괜스레 애먼 레이스 장갑을 꼈다 벗었다 반복하기를 수차례.
긴장감에 앙다문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누군가 곁에 다가오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머나! 오늘 너무 아름다운 거 아니에요, 언니?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데요? 내가 본 신부 중에 제일 예뻐요!”
지연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준 것은 친한 후배 은우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잔뜩 얼어 있던 지연은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제야 오늘의 이 행복을 느끼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얼굴을 붉혔다.
“은우야, 제주까지 와줘서 고마워. 일찍 왔네?”
“울 언니 결혼하는데 당연히 와야죠. 이쁜 우리 언니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찍 출발했어요. 태우 씨~ 지연 언니 오늘 너무 예쁘죠?”
은우가 뒤따라온 남편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지연 씨, 우리 은우만큼 예쁘신데요? 아, 저에게 이 말은 최고의 칭찬인 거 지연 씨도 아시죠?”
은우 남편의 너스레에 셋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지연과 강현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모든 신부가 그러하듯 지연은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수많은 준비를 했고, 언니 지은이 선물해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다.
단순하지만 몸의 라인을 따라 흐르는 듯한 슬림라인의 드레스와 길게 늘어진 베일이 새하얀 지연을 더욱 청순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시어머니 수원의 제안으로 강현과는 따로 준비하고 결혼식 바로 전에 만나자 해서 아직 지연과 강현은 서로의 꾸민 모습을 못 보고 있었다.
어제도 만났던 강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그가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지연의 모친 고은과 강현의 모친 수원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고르고 고른 둘의 결혼식장은 제주의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애월의 한 리조트였다.
객실 수 20개로 규모는 작았지만, 커다란 야자수를 리조트 가득 심어 주변 다른 건물들을 모두 가려버려, 마치 동남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탈리아의 유명 건축가와 협업해서 디자인했다는 리조트 건물들은 그 어느 곳보다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잘 관리된 1000평의 멋진 정원을 본 뒤 두 어머님은 당장 결정을 하셨다고 했다.
수많은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웨딩 아치의 새하얀 원단과 꽃잎들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흩날려 로맨틱한 결혼식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전 객실을 3일간 예약하여 제주까지 와주시는 손님들이 즐기고 가실 수 있도록 했기에 다들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둘의 결혼식 준비를 두 사람보다도 더 즐기고 계신 지연의 엄마와 시어머님의 아이디어였다.
식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2시간.
“강현 씨 도착할 때가 됐는데…….”
새하얀 원단으로 만들어진 캐노피와 수많은 수국으로 꾸며진 신부 대기석에 앉아 하나둘 도착하는 손님들과 인사하던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그가 보였다.
천천히 지연에게 걸어오는 강현을 보며, 지연은 갑자기 그를 처음 만난 순간과 지난 시간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떠올랐다.
그를 처음 보고 너무 멋져 눈을 떼지 못했던 순간.
데이트인지도 모르고 그와 맛집을 갔을 갔던 날.
그가 쓰러진 지연을 돌봐주며 고백했을 때.
맹랑하게 그에게 입 맞추자며 도발한 밤.
특별할 것 없이 손만 잡고 걸어도 좋았던 둘만의 산책.
누군가에게는 평범하지만, 지연에게는 그 무엇보다 특별한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인지. 또 얼마나 깊게 그를 사랑하는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가 힘든 마음이었다.
“어머, 신부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머머, 울면 안 돼요! 화장 번져요!”
어디선가 등장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호들갑을 떨며 지연의 눈물을 쏙 들어가도록 했다.
오늘만은 지연이 세계 제일 예뻐야 한다며 언니 지은이 섭외한 청담동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새벽부터 내내 지연의 곁을 따라다니며 수시로 화장과 헤어를 점검해 주고 있었다.
아니 몇 시간째 지연의 곁에서 잔소리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맞을듯했다.
“오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부님인데 울어서 화장 지워지면 안 되잖아요? 저기 멋진 신랑님 오시는데 예쁜 얼굴로 어여쁘게 맞아주셔야죠! 눈물 자국, 노노~.”
그래,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는 얼굴이 아닌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지.
그렁그렁 눈가에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환하게 웃으며 강현을 맞이하였다.
두근두근.
그가 한 발 한 발 다가올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강현이 지연 앞에 다가오다 몇 발자국을 남기고는 우뚝 서더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하…….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뭐가요, 강현 씨?”
강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말을 이었다.
“내 여자, 오늘 너무 심하게 예쁘잖아요. 진짜 너무하게 예뻐.”
강현의 말에 방금까지 울컥했던 마음이 마술처럼 한순간에 사라지더니 기쁨만이 넘실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은 제쳐두고 당장 보쌈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드는데 이거 어쩌죠?”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강현의 모습이 오늘따라 숨 막히게 멋져서 지연의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고 있었다.
서로에게 새삼 반한 둘은, 잠시도 아깝다는 듯 서로를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눈에 담았다.
“강현아, 신부에게 그렇게 눈빛 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계속 보다가는 지연 씨 녹아 없어져.”
어느새 둘에게 다가온 강현의 친구 장우가 강현의 등을 툭툭 쳤다.
“네 마음 충분히 알겠는데, 제발 3시간만 참아. 그 뒤엔 지연 씨 보쌈해가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내가 근사한 연주와 노래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을 테니까. 알았지? 정신 차리라고! 너희 축복해주러 많은 사람이 제주까지 왔는데 식은 보여줘야지, 안 그래?”
놀리듯 우스갯소리를 하는 장우의 어깨에 팔을 두른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래, 좀 부탁한다, 내가 3시간은 어떻게든 참아볼게.”
친구를 보낸 뒤, 지연의 곁에 가까이 온 강현이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뽀뽀는 해도 되겠죠? 화장 때문에 안 될까요?”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듯, 작게 소곤거리는 그의 말투에 저도 모르게 지연이 쿡-하고 웃어버렸다.
“이 뽀뽀로 3시간만 버텨봐요, 내 남자님.”
누가 볼세라 냉큼 강현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춘 지연이 속삭였다.
“아……. 뽀뽀하지 말 걸 그랬어요. 참기가 더 힘들어지네요.”
“나도요. 빨리 둘만 있고 싶어요.”
“하……. 그냥 몰래 데리고 나갈까?”
그때였다.
“몰래 뭘 어쩐다고? 어머나, 우리 며느리 누가 보면 천사인 줄 알겠네. 너무 예쁘다 지연아. 사진 찍어서 사람들에게 자랑 좀 해야겠어.”
“어머! 우리 사위는 또 어떻고요, 선배. 요즘 아이돌이라고 나오는 사람들, 우리 사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
화사하게 꽃단장을 하고 오신 두 분의 어머님들은 강현과 지연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며느리가 더 이쁘다니까?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고은아.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를 가족으로 삼게 되는 걸 보니. 고은이 네가 누구보다도 잘 알겠지만, 원래도 예쁜데 보면 볼수록 더 예쁜 아이가 우리 지연이 아니겠어?”
시어머니 지수원 여사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왜 이리 울컥한 것인지, 결국, 지연이 아까 겨우 참았던 눈물을 왈칵 흘렸다.
시어머니의 저 칭찬은 또 왜 이리 사람을 울리는지.
“지연이 너, 내가 널 예뻐해서 며느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야. 난 사실 너랑 너희 집안 별로였어. S 전자 둘째를 며느리로 삼았으면 했었는데……. 너 우리 민우 많이 좋아한다며? 민우 맘 돌리려면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니? 그런데 내 말 잘 들어야지 나도 널 예뻐하지?”
“네가 날 잡으려면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지, 나는 너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데 말이야.”
깊은 흉터를 남기던 가시같이 날카롭던 나쁜 기억들이 있었다.
빼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 더욱 손댈 수도 없어 그저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 했던 감정의 폭력과 기억이라는 가시.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랑의 말들로 움푹 팼던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났고 깊숙이 파고들어 빠지지 않던 아픔의 가시는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는 영원히 안녕. 나에게 상처 따위는 더는 없을 거야. 나는 더 단단해졌고, 나의 사람들은 그런 나를 언제나 단단하게 지지해 줄 거거든.’
지연의 마음속 마지막 가시가 눈물을 통해 밖으로 흘러내렸다.
“고마워요. 모두.”
두 어머님과 강현이 눈물을 흘리는 지연을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마치 너를 다 이해한다는 듯.
이제는 우리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어머머! 신부님~ 이렇게 울면 안 된다니까요! 아이참. 식 시작하면 제일 예뻐 보여야 하는데 왜 다들 신부님을 울리세요. 어머님들, 신랑님! 저리로 가세요. 그리고 신부님! 뚝! 제발, 뚝! 마스카라 번지면 큰일이란 말이에요!”
어느새 나타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잔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수많은 꽃으로 장식된 버진 로드의 끝에, 지연과 강현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두 눈에 서로의 모습만을 가득 담은 채.
“강현 군, 내 딸 지연이를 평생의 아내로 맞아 언제나 사랑할 것을 모여 있는 모든 분 앞에서 맹세할 수 있겠는가?”
주례자로 나선 지연의 아버지 은주훈 회장이 신랑에게 물었다.
“네! 맹세합니다.”
긴장해 조금은 떨리는 강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너무 크게 대답해서일까?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네. 지연아, 내 사랑하는 딸아.”
함께 웃음 짓던 은 회장이 고개를 돌려 지연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너는 강현 군을 남편으로 맞아 평생을 마주 보며 사랑을 나눌 것이라 우리 모두 앞에서 맹세할 수 있겠니?”
“네, 맹세합니다.”
“강현 군, 지연아. 고맙다. 두 사람 오래오래 건강하고 사랑만 하며 살기를 바란다. 부모로서 더는 바라는 것은 없구나. 행복만 해라.”
막내딸을 보내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한 은 회장의 주례사를 끝으로 강현과 지연이 모여 있는 가족들과 친인척들에게 인사를 하였고 지연의 친구들이 모여들어 두 사람에게 꽃잎을 뿌렸다.
두 사람 앞에 펼쳐진 꽃길이었다.
***
너무 눈이 부신 햇살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진 민우는 손으로 해를 가려보았지만 내리쬐는 햇볕을 모두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1년의 형을 마치고 나온 밖의 공기는 안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1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민우가 체감한 것은 10년 같았다.
다시금 켠 핸드폰은 다행히 작동하였고, 누군가 계속 요금을 내고 있는지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당장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 무심결에 주란에게 전화를 하였다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아니, 만나고 싶지 않았다.
출소일에 마중 나오겠다는 주란의 편지에 그녀가 보이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 버릴 거라며 강하게 반대한 건 민우 자신이었다.
그녀를 마지막 만난 지도 벌써 11개월이 다 되어갔고, 그사이 면회는 모두 민우가 거부했었다.
약 11개월 전.
변호사 김대범이 그를 찾아온 이후, 민우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아버지라 믿고 34년을 살았던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남이라 믿고 몇십 년을 보았던 사람이 친부라 했다.
그리고 차승조가 자신과 자신의 모친 주란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접한 뒤로 주란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만날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자신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미쳐 날뛰다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외면했다.
발이 땅에 붙은 듯 교도소 앞에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난, 이제……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