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사랑
(84/85)
84. 사랑
(84/85)
84. 사랑
2023.05.18.
“당신이 여기 무슨 일이야?”
접견실로 나오자마자 날 선 질문을 던진 것은 세아였다.
자신과 민경의 약혼식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그녀의 얼굴을 본 지도 1년 반이 지난 것 같았다.
민우는 형을 마치고 나와 3개월을 폐인처럼 지내다 최근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세아를 찾아오는 일이었다.
그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에 관해 묻기 위해서였다.
“당신이 왜 날 찾아온 거야? 우리 정떨어진 사이잖아? 막장을 다 본 사이고. 아, 맞다. 당신 쫄딱 망했다며? 당신 얘긴 뉴스에 종종 나와서 내가 잘 알지. 왜, 가서 1년 살다 나오니 내가 생각났어?”
배배 꼬인 말투로 비꼬는 정세아는 1년 반 좀 넘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처음 보는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그사이 살이 많이 찌고, 얼굴이 무척이나 푸석해져, 언뜻 보면 다른 사람 같았다.
게다가 가만있어도 화가 난 듯, 눈 사이의 주름이 깊어져 있었다.
마치 10년은 넘게 흐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 맞다. 온 김에 영치금 좀 주고 가. 당신도 알잖아, 여기 생활할 돈이 많이 필요한 거. 우리 아버지는 상황이 안 돼서 힘들다고 쥐꼬리만큼만 주거든.”
짜증이 난다는 듯 말하는 세아의 미간 사이 주름이 더욱 선명해졌다.
세아의 모친은 그녀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병원 입원 중이었다.
거기에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 세아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며 변호사를 구해 항소했다가 패소하여 변호사 비용만 날렸다.
작게 운영하던 과수원을 팔아 그 비용을 충당했고, 아버지는 매일매일 막노동을 하며 남은 병원비를 납부하고 정세아에게 매달 약간의 영치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걸 모르지 않는 세아였지만, 그저 불만이었다.
“아이는…… 어디 있어?”
“아이? 아……. 우리 아이. 아이는 여기 없어.”
“뭐?”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엄마가 원하면 일정 기간은 함께 교도소에서 생활하며 여러 가지 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여기에 없다고 하였다.
“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아파서, 병원에 자주 입원해. 지금도 병원에 입원해 있어.”
“병원? 어디 병원? 무슨 병?”
“XX병원이라는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며칠 전에 호흡곤란이 와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하는 세아의 모습에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뭐? 네 아이잖아! 엄마가 돼서 왜 관심이 없어?”
“내 아이? 나 혼자 애를 만들었어? 당신 아이도 되는데 당신은 뭐 하다가 이제야 온 건데? 당신 밖으로 나온 지도 몇 달 됐을 텐데 바로 찾지도 않아 놓고서는 어디다 화를 내, 내기를!”
쏘아붙이는 세아의 말에 민우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너무 늦었다.
“그래서……. 너 애는 어쩔 거야?”
“몰라. 내가 여기 들어와 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내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든데 내가 어떻게 애 걱정을 해? 당신이 데려가든가.”
짜증이 난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 세아는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아직 여기서 몇 년을 더 살아야 해. 그리고 나가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그저 막막하다고! 그러니 아이는 당신도 함께 책임져야지. 그렇게 애 만드는 데 일조해 놓고 손 떼고 보지만 말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아이를 어쩔지 생각을 해보고 온 건 아니었다.
폐인처럼 지내던 몇 개월 동안, 이 세상에 아무도 믿을만한 가족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던 그때…… 자신의 아이가 생각났다.
자신의 핏줄.
혼자 남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핏줄, 정세아와의 아이.
그저 그 아이가 궁금해져 충동적으로 세아를 찾은 것이었다.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렇게 쉽게 아이 손을 놔도 되냐고?”
민우의 입에서는 뜻밖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후회할지 안 할지. 하지만 그건 알지, 여기 들어와 있는 동안은 난 애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하는 그녀는 마치 아이에 대한 정도, 사랑도 없는 사람 같았다.
“당신이 데려가. 난 그 아이 돌볼 자신 없어.”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관련해서 곧 변호사 보낼게. 양육권은 내가 갖도록 하지.”
“맘대로 해.”
민우가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서자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치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치금 잊지 말고 꼭 넣어! 되도록 많이!”
그녀는 끝까지 돈 이야기였다.
사실 아이를 원한 적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다.
아니,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오히려 귀찮기만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배 속의 아기는 마치 정세아가 자신의 발목에 건 족쇄 같았다.
자신의 미래를 망치려고 만들어놓은 족쇄.
다만 최근 몇 달간의 고뇌의 시간 속에 나온 결론은…….
죄책감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저 자신의 핏줄인 이 아이를 이 거친 세상에 마구 내동댕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
“예원이 아빠시군요!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예원, 딸의 이름인 것 같았다.
세아의 정보를 말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간호사는 민우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네, 제가 좀 사정이 있어 멀리 있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와서요.”
“아, 네! 지금 예원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시죠.”
간호사의 안내로 들어간 병실에는 침대가 2개 있었고 한 곳은 비어 있었다.
“여기 계셨던 환자분이 마침 어제 퇴원하셔서 오늘 조용하게 예원이 만나실 수 있겠네요.”
그녀가 칸막이 역할을 하던 커튼을 열자 자그마한 아기가 칸막이가 높은 침대 안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얼굴에는 큰 산소호흡기를 하고.
“우리 예원이 안 자고 있었네? 예원아, 예원이 아빠가 오셨어!”
간호사가 반갑게 아기의 눈을 마주치고는 웃으며 말을 하자 아기가 똘똘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예원이 호흡 상태가 좋아져서 산소호흡기는 떼도 될 것 같아요. 떼 드릴게요.”
처음 만난 아이는 예상보다 작았다.
8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났고, 이제 13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개월 수에 비해 많이 작은 체구이고 다른 아이들보다 발달이 느리다는 말.
그리고 호흡곤란 증세는 호전이 되었지만, 하루 이틀 더 입원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는, 간호사는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이는 처음 본 민우를 보고 울지도 않았고 말똥말똥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처음 본 것이 아니라는 듯.
“아……안녕 예원아?”
서툴고 어색하게 민우가 아기에게 물었다.
몇 초간의 침묵.
“아뿌? 아뿌 아뿌.”
옹알거리는 입으로 뱉어낸 단어.
예원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아기가 알고서 하는 말인지 그냥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민우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몇 번이나 ‘아뿌’라는 말을 하더니 예쁘게 눈을 접어 꺄르르 웃는 예원.
웃음 짓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리고 아이가 아빠를 외칠 때 차민우는 깨닫게 되었다.
‘아, 나는 사랑에 빠졌구나. 이 아이에게.’
예원은 곧 손을 뻗어 민우에게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뻗은 예원의 손에 나비 모양의 작은 점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예원이가 아빠를 알아보나 봐요. 너무 좋아하는데요? 예원이가 저렇게 웃어주는 건 저랑 담당 선생님밖에 없는데.”
간호사의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민우가 예원을 안아 들었다.
가슴에 어색하게 안아 들자 새삼 느껴지는, 더 작은 아기.
“예원이와 예원이 어머님 상황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복지사님 말씀 들으니…… 아무래도 상황이 그래서 그런지 예원이 어머님께서 예원이를 잘 못 챙겨 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같은 방에서 지내시는 다른 분들이 더 챙기신다고. 그러다 보니 예원이가 사람들의 정을 그리워하듯이 항상 안아달라고 해요. 아…… 제가 괜히 말씀드린 것 같네요.”
간호사는 속상한 듯 무심결에 이야기했다가 민우와 세아의 관계가 어떤지도 모르는데 흉을 본 것 같아 급히 입을 닫았다.
“이제 제가 데려갈 겁니다. 예원이 저와 지낼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민우의 품에서 예원이 작게 바둥거리며 또 꺄르르 웃었다.
“아뿌뿌뿌 아뿌, 아뿌.”
예원은 민우가 아주 마음에 든 듯했다.
바로 변호사를 통해 아이의 양육권 관련 절차를 밟았고, 얼마 뒤 예원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급하게 구한 집이었지만, 나름대로 아이 방을 꾸며두었다.
평소 아이를 볼 일도 없었고, 키울 일은 더더욱 없었던 그인지라 모든 것이 어색했다.
급한 마음에 잠시 모친 주란이 생각났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며칠 전에도 주란과 도강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아직 그녀를, 그리고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만날 수 없었다.
어떤 얼굴로 그들을 만날지…….
아니 자신이 폭주하지나 않을지. 자신이 없었다.
잠시 예원을 바닥 이불 위에 눕히고는 컴퓨터를 켰다.
아무래도 아이를 봐주는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온라인 사이트 이곳저곳에서 한참 아기를 봐줄 사람을 찾아보는데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
“아뿌, 아뿌, 맘마마마 맘마.”
눕혀놨는데 어느새 몸을 뒤집어 기어 와서는 의자에 앉아 있는 민우의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서는 옹알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예원이 배고파?”
“맘마마마마 맘마, 맘마마마.”
마치 민우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꺄르르 웃으며 맘마를 말하는 아이를 보자 찌푸렸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며칠 동안은 거의 전쟁과 같은 시간이었다.
예원을 돌볼 사람은 결국 찾지 못해, 사는 아파트 근처의 어린이집을 찾았다.
그러고는 턱없이 모자랐던 아기용품을 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다시 한번 온 김지원 여사의 연락.
[내가 저번에 얘기한 건 아직 유효하니 잘 생각해보렴. 내가 알기론 너 지금 어디 안 들어간 것 같은데. 전과는 다르겠지만, 너도 다시 마음잡고 뭔가 차근차근 시작해야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메시지에 답장하지는 않았다.
폐인처럼 지냈던 지난 3개월 동안, 과거 사업상 알게 된 지인들에게 일자리를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적당한 자리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연락을 받아주면 다행이었다.
대부분은 민우의 연락을 무시했다.
수많은 헤드헌터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해요. 상무님, 지금 마땅한 자리가 없어요.”
“김 실장님, 자리가 없는 게 아닐 텐데요? 있지만, 저에게 안 보여주시는 건 아니고요?”
“사실, 상무님 사건이 워낙 크게 쟁점이 됐었잖아요. 사안이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건이다 보니 제안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또……. 막말로, 상무님 빨간 줄도 생기셨고.”
이 과정은 민우를 나락으로 다시 떨어뜨렸고, 술에 빠지게 했다.
그 시기에 김지원 여사가 연락을 주었지만 무시했다.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제안한 자리도 민우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다.
C&C 하청업체 중 하나인 세모XX. 그 회사의 영업부 차장 자리였다.
대기업 임원을 하던 자신이 작은 회사의 차장이라니.
이런 제안을 받았다는 것에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무시를 했고, 술독에 빠졌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조금은 현실에 눈이 떠졌다.
냉정하게 보니, 자신의 경력은 이전 사건으로 깡그리 무너졌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주인공, 거기다 그로 인해 범법자도 되었다.
벌금을 내고 난 후 자신에게 남은 돈은 작은 집과 차를 구하고 남은 얼마의 돈.
당분간 살 수는 있겠지만, 이제 자신에게는 예원도 있기에 안심할 수 없는 돈이었다.
선택의 폭이 너무나 좁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말씀 주신 자리,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