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나는 너를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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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나는 너를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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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나는 너를 사랑했을까?
2023.05.22.
“아빠! 아빠아~.”
접착제로 붙여버린 듯 뜨기 힘든 두 눈을 힘겹게 뜨자 딸의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아빠 어제도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지? 나랑 약속한 거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니야, 아빠 안 잊어버렸어. 우리 예원이랑 오늘 놀이공원 가야지!”
“또 김 이사 아저씨가 아빠한테 술 준 거지! 내가 다음에 김 이사 아저씨 만나면 혼내줘야겠어.”
“그래, 다음에 예원이가 김 이사 아저씨 좀 혼내줘. 아빠가 그 아저씨 때문에 요즘 힘들다.”
민우는 지원이 소개해준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
차장으로 들어가 현재는 영업부장.
이 회사에 입사한 초기에는 다른 곳을 많이 알아보기는 했지만, 민우의 과거가 항상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에는 이런 현실에 괴로웠지만, 다행히 이제는 이 회사에 어느 정도 적응하였다.
회사에서도 한 부모 가정인 민우의 사정을 알고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어, 심적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빨리 이리로 와요, 아빠. 내가 아침밥 차려놨어.”
민우를 잡고 끄는 고사리 같은 손을 따라 부엌에 가자, 식탁 위에 밥과 국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와! 지금 아빠에게 가장 필요한 황탯국이네!”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말하며 기뻐하자 예원의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하였다.
“그치? 아빠 지금 황탯국 필요하지? 아빠 딸이 최고지?”
“그럼~ 우리 예원이가 아빠한테는 언제나 최고지.”
틀어놓은 TV에서 주말 아침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아빠, 나도 나중에 요리사 할까 봐. 저 아저씨 유명한 사람인데 돈도 엄청 많이 번대! TV에도 많이 나오는데 음식도 엄청나게 빨리 만들고, 다 맛있어 보이더라고.”
“우리 딸 요리사 하고 싶어? 예원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지!”
TV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예원의 말만 듣고 대답을 한 민우가 입에 황탯국을 한입 떠 넣었다.
인스턴트였지만 딸의 사랑이 담겨 그런가, 따끈한 국물이 쓰린 속을 달래주는 듯했다.
“오늘은 저희 프로그램에 스티브 셰프님이 와주셨어요! 반갑습니다, 셰프님. 요즘 새로운 레스토랑 오픈이며, 여러 방송 출연으로 바쁘실 텐데 저희 스튜디오에 와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굿모닝이 좋다.’는 제가 꼭 나와야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감사하네요. 그럼 바로 요리에 들어가 볼까요? 오늘의 요리는 뭔가요, 셰프님?”
“오늘은 향신료를 넣은 가지볶음과 볶음밥입니다.”
“오늘도 흥미로운 재료로 새로운 퓨전 음식을 제안 주시겠네요. 너무 기대됩니다.”
예원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TV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스티브 셰프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려고 팔을 걷어 올렸을 때였다.
“어머! 저는 처음 보았는데 너무 예쁜 나비 모양이 팔목에 있네요?”
“아, 제 가족들은 다 이런 나비 모양 점이 있습니다. 위치는 다르지만요. 저희 할아버지도 발목 쪽에 이 점이 있으셨던 걸 보면 아버지 쪽 유전인가 봐요.”
“어머나~ 신기해라.”
TV를 보다 고개를 돌린 예원이 민우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빠! 스티브 요리사 아저씨도 나처럼 나비 모양 점이 있대! 와~ 신기하다. 학교 애들 중에 한 번도 이런 점 못 봤는데.”
“……스티브?”
예원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어 TV 화면을 본 민우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바로 일어서더니 TV를 꺼버렸다.
“아, 아빠! 왜 꺼~ 나 저 아저씨 나오는 거 재밌단 말이야. 다시 틀어줘요.”
“예원아~ 아빠 머리가 너무 아프네? 시끄러우니까 더 아파서 그래. 잠깐만 끄고 있자.”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딸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민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놀이동산에 도착한 것은 2시간 후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놀이동산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빠와 놀이동산에 온 것이 신이 나는지 예원은 민우를 잡아끌며 끊임없이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활력이 넘치는 아이는 이것저것 타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았다.
쉬지 않고 3시간쯤 놀이기구를 탔을 때 민우가 예원을 잠시 저지시켰다.
“예원아, 아빠 힘들다. 우리 간식이랑 음료수 좀 먹고 또 타러 갈까?”
“응 좋아! 예원이는 핫도그 먹고 싶어요!”
핫도그 얘기를 하며 초롱초롱해지는 예원의 눈빛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민우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알았어. 그럼 아빠가 음식 사 올 동안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야 해?”
수많은 인파를 뚫고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를 찾은 민우는 예원을 자리 앉혀두고 음식을 사러 푸드코트 쪽으로 향했다.
딸이 먹고 싶다는 핫도그 파는 곳이 멀리서 보이길래 빠르게 걸어갈 때였다.
“앗, 차가워!”
자신의 바지가 차가워진 것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가 음료수를 들고 뛰다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자신의 바지가 온통 젖은 것이 보였다.
“하아…….”
꼬맹이가 이런 거라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 부모에게 짜증이 났다.
“죄송합니다. 너무 죄송해요! 애가 말을 안 듣고 뛰어서…… 그만…….”
“아니, 그러니까 왜 애를 제대로……!”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사과를 전하며 뛰어온 아이의 부모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은지연이 있었다.
지연도 민우를 알아본 듯 뛰어오다가 그 자리에 서버렸다.
몇 초간이었지만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그렇게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때 들리는 울음소리.
“엄마……. 엄마, 미안. 미아안. 우에에엥!”
아이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지연이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쏟아진 음료수를 닦아냈다.
“시우 어린이. 아저씨에게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하고 말해야지.”
“잘못해떠요 아저씨. 죄송합니다.”
아이가 어설픈 동작으로 허리 숙이더니 사과의 말을 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아이는 계속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지연이 아이를 안아 올렸다.
“바지가 많이 젖었는데……. 세탁비 드릴게요. 너무 죄송해요.”
“됐어.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 물로 지우면 금방 지워질 거야.”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네.”
민우의 얼굴에 잠시 엷은 미소가 서렸다 사라졌다.
“…….”
“나도 잘 지내. 아홉 살 딸도 있고. 뭐, 궁금하지는 않겠지만.”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시선을 내려뜨리던 민우가 손을 뻗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아저씨는 괜찮아, 화 안 났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갈게. 잘 지내.”
잠시 후 민우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민우를 보며 지연은 그를 너무나도 좋아했던 어린 날 자신의 모습들이 문득 떠올랐다.
이상한 선배들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주던 그와의 첫 만남.
그를 기다리며 더운 날 편의점 앞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 여름.
청강하던 강의에서 그의 뒤통수를 발견하고는 행복해서 그걸 스케치한 수업 시간.
그리고 그 이후 그와 함께했던 힘들었던 결혼생활.
잠깐이지만 과거의 시간이 떠오른 지연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좋았던, 힘들었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시간.
“지연 씨, 뭐 해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강현이 지연의 이름을 불렀다.
강현의 곁에는 이제 일곱 살이 된 딸이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시우가 또 사고를 쳤어요, 강현 씨. 지나가던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 사람 바지에 온통 음료수를 부어버렸지 뭐예요. 그래놓고선 뭐가 그리 억울한지 이렇게 울고 있네요.”
“이시우! 엄마 말이 정말이야? 또 엄마 말 듣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사고 친 거야?”
짐짓 엄한 말투로 아들에게 묻자, 시우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시우야, 네가 잘못했는데 왜 네가 울어. 뚝!”
누나 시아까지 아빠 말투를 따라 하며 동생에게 말하자, 시우는 엄마 지연의 목에 고개를 푹 파묻더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기편이 아닌 것으로 보이자, 너무나도 서러운 다섯 살이었다.
“지연 씨, 시우 이리 줘요. 이제 무게도 많이 나가는 애가 매일 혼나면 엄마 품에 파고들어서는…….”
“저 괜찮아요. 그리고 시우도 엄마랑 약속한 게 있으니 계속 이러지는 않을 거예요.”
“약속?”
“또 엄마 말 안 듣고 사고 치면 레X 무지개마을 세트를 누나 주기로 우리 셋이 약속했거든요. 그치 시우야?”
그 말을 들은 시우가 번쩍 고개를 들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엄마. 그거 시우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저번에 시우 어린이 엄마랑 누나랑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사고 치고 울고불고 떼쓰면 그거 누나 주기로? 그치 시아야?”
지연이 딸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 누나랑 약속했잖아.”
그 말을 듣더니 시우가 내려가겠다며 바둥거리더니 곧 지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시우 이제 안 울어요. 아까도 안 울었어요. 그러니까 무지개마을 누나 주지 마세요. 엄마~ 아빠~.”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달고는, 안 운다며 꾹 참고 있는 어린 아들의 얼굴을 보며 지연이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럼 앞으로 엄마 말 잘 듣고 얌전히 걸어 다녀야 해요? 누나랑도 손 꼭 잡고?”
시우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서럽게 울더니 어느새 해맑은 미소를 가득 담은 아들이 작은 손으로 누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엄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언제나 저 미소와 애교에 금세 사르르 녹고 말았다.
특히나 장난기 많은 아들 시우는 강현의 얼굴을 똑 닮아서는 지연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고는 했다.
“오늘 참, 사람이 많네. 우리 시아랑 시우가 타고 싶어 하는 놀이기구 금방 탈 수 있을까? 지연 씨, 힘들지는 않아요? 난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그런가…….”
강현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가 고개를 내려 지연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더니 미소 지었다.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방금 충전했네요.”
사람이 많건, 아이들의 앞이건 상관하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하는 강현을 보며 딸 시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폭- 쉬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뽀뽀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뽀뽀는 집에서만 하면 안 돼요?”
그러자 강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딸과 시선을 맞추더니 시아의 뺨에도 뽀뽀했다.
“아빠는 엄마랑 우리 시아, 시우가 너무 사랑스러워 못 참겠는걸?”
그러자 아들 시우가 손을 뻗더니 강현의 얼굴을 잡아 그의 뺨에 뽀뽀했다.
“나도 뽀뽀할래요.”
놀이공원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뽀뽀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지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사랑 표현은 조금 이따 하고, 시아랑 시우가 좋아하는 붕붕카 타러 갈까요?”
“좋아요!”
지연의 말에 신나는 듯, 시우가 작은 발을 동동거리며 꼭 잡은 누나의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런 동생이 귀여운 듯 시아가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그럼 오늘은 아빠와 시아, 엄마와 시우가 한편이 되어 대결하는 거다?”
강현의 말에 아이들의 입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연은 사랑하는 가족의 손을 잡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 발을 떼기 전, 아까 민우가 사라졌던 곳을 잠시 뒤돌아보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을까?’
지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된 지연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은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고.
사랑은 한쪽으로 흘러가는 샘물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는 큰 바다 같은 것이라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있어.”
무심결에 소리 내 흘러나온 지연의 말에 강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랑해요, 지연 씨.”
“나도요, 엄마! 나도 엄마 아빠 사랑해요!”
“시우도 엄마랑 아빠랑 누나랑 사랑해요. 이~~~만큼!”
다섯 살 시우의 두 팔이 하늘 높이 뻗어졌다.
오늘도, 내일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든 날이 찬란하고 눈부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날이, 따뜻한 봄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