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대격변(2)
17화-대격변(2)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라쿠의 말에는 동의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처 나서지 못하고 있었으니 함께 협력해서 조사하자고 전해라.”
“알겠, 다.”
연락이 끊긴 부족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부족, 최고 족장 샤쿠는 부족 연합의 맹주를 자처하는 라쿠가 주장하는 협력 제안에 응했다.
안 그래도 인근 부족들이, 수백에 달하는 그들이 ‘무언가에 의해 전멸’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던 차였으니까.
“대체 뭐에 당한 걸까요. 전투의 흔적만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마수들에게 당했다고 보는 것 외에는······.”
“이 지역에 사는 마수들 중 그 무엇이 우리를 전멸시킬 수 있을까. 신화 시대의 마수라도 깨어난 것인가?”
전령이 소식을 가지고 부락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때. 조심스레 전하는 휘하 주술사의 말에 샤쿠는 피식 웃었다.
마수들은 마족들과의 끝없는 사투 끝에 크고, 위협적인 종들은 대부분 멸종하거나 모습을 감추고 약한 놈들만 남았다. 게다가 설령 그런 고대의 마수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수백에 달하는 고블린들이 도망도 못치게 만들어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일단 계속 긴장하고 있는 수밖에. 기껏 전쟁이 끝났다 했더니······ 이렇게 또 다른 위협이 찾아올 줄이야.”
혀를 찬 샤쿠는 부락의 경계를 더욱 삼엄하게 단속시켰다. 적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부족은 무려 800에 가까운 구성원이 살아가는 대부족. 지금 연락이 끊인 최북단의 두 부족을 합쳐도 그의 부족보다는 작다.
하지만 통치자의 입장에서 조금의 피해도 보기 싫었던 그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모든 비축분을 꺼내서 무장해라. 당분간 수렵과 채집은 중단한다. 토벽을 더 단단히 쌓고 경계를 강화해라.”
그의 지시에 맞춰서 부락을 점점 더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조금 불편할지언정 만일의 사태에 손해 보지 않겠다는 각오가 여실히 보였다.
[적들이 대비를 철저히 하니, 그에 맞춘 전략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지켜보고 있던 마왕은 자신의 병력들도 그들의 대처에 맞추어 변형하고 보강시켰다.
이렇게, 샤쿠의 예상대로 전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뚫기에는 벽이 너무 두껍고 높습니다.]
“왜 비행종들을 쓰지 않지? 하늘을 나는 건 엄청난 메리트인데.”
[비행종의 경우 설계와 개조에 제한이 많습니다. 비행이 가능하게 하려면 방어력에서 희생을 많이 해야 하기에.]
점점 더 단단해지는 적들의 방어를 뚫기 위해 마왕은 이번에도 그와 머리를 맞대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 나온 아이디어가 하늘을 나는 병사, 비행종.
하지만 마왕은 비행종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투자하는 값에 비해 기대할 수 있는 전투력이 너무 낮습니다.]
“아직은 그 정도인가······.”
그는 마왕의 답을 듣고 탄식했다. 아직 마왕군이 확보한 비행종에 대한 데이터는 너무 적었다. 가장 거대한 비행종이 깊은 동굴에서 거대화한 마수 박쥐로, 기껏해야 대형 독수리보다 조금 더 큰 정도.
게다가 비행종의 특성상 갑주를 두텁게 두를 수 없어 방어력도 그리 강하지 않으니 그가 상상하는 거대한 비행체와 하늘을 덮는 비행 야수 군단은 지금으로선 실현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지. 비행종은 당분간 정찰이나 특수전 전용으로 쓸 수밖에. 비행종으로 적들을 교란하고 그 틈에 지상군이 쓸어버리는 걸로.”
그러나 비행종을 쓰는 걸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왕에게 다른 아이디어를 주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듯 마왕은 그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활로를 뚫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쓴다면 이전보다 더욱 두텁고 단단해진 고블린들의 방어를 함락시키고 다시 한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계산 결과 약 이틀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전투는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 번 방침이 결정되면 마왕에게 망설임은 없다. 오직 목적을 위해 전체가 움직이는 마왕군은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준비했다.
“족장, 방어는 두텁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대로 가면 식량이······.”
“조사 결과가 나올때 까지는 버틴다. 어쩔 수 없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늦은 밤, 샤쿠는 부하 주술사의 걱정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이틀째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결성된 조사대는 의심지로 추정되는 북쪽 숲을 향해 이제 막 출발한 참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는 수백 개의 횃불이 일렁이는 부락 내부를 둘러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를 위안했다.
과연 수백의 병사들이 철저히 무장한 채 주술과 노동의 힘으로 만들어진 든든한 벽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믿음직스럽다. 마왕의 지배가 계속되던, 고블린종이 지금보다 더 야만적이고 약했던 시절에는 불가능한 그런 광경이었다.
‘역시 마왕을 죽이는 게 옳은 선택이었어.’
자신의 침소로 향하던 샤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일대에 있는 다른 소부족의 족장들처럼 반란의 주축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 고블린 왕 안드라스를 지원한 것은 사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캬악······!”
“뭐, 지?!”
하지만 뒤에서 소란이 들려온 게 그때였다. 당황한 그는 고블린들이 아우성을 치는 현장에 나와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뭐냐?”
그는 그렇게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계 특유의 붉은 달을 배경으로 은하수가 가득한 밤하늘에, 다수의 무언가가 빠르게 부족을 향해 활강하고 있었다.
“족장! 괴물, 괴물입니다!”
주술사 하나가 다급히 그를 향해 뛰어왔다. 그 말대로 점차 가까워지는 그것들은 괴물이었다.
검은 외갑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그것들의 외형은 커다란 박쥐를 닮았다. 심지어 그 발에 무언가 큼직한 것을 들고 있었으며 편대를 이룬 그 숫자는 거의 서른에 육박한다. 샤쿠는 본능적으로 저 괴물 박쥐들이 자신들의 적임을 알아차렸다.
“쏴! 쏴 버려라!”
그는 다급히 궁수들에게 하늘을 쏘라고 외쳤으나 그 사이 적들은 고도를 낮추며 더욱더 부족과 가까워졌다.
“쏴!”
허겁지겁 하늘을 겨눈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냈다. 하지만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을 향한 화살들의 위력은 급감. 박쥐들은 화살이 자신들의 외갑을 부수지 못할 고도에서 발에 들고 있던 ‘그것들’을 투하시켰다.
“저게 뭐······.”
샤쿠는 그것을 보고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격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전술이었다.
심지어 그 떨어지는 것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애벌레라면.
“캬아앗! 이, 건!”
“족장, 숨을······ 쉴 수가······.”
그러나 무언가로 인해 몸 전체가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이 고블린만 한 애벌레들은 지면에 닿는 즉시 터지며 체액과 함께 의문의 액체를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그 액체들은 공기와 접촉하자마자 짙은 녹색 연기로 변하며 바람을 타고 부락 전체를 휩쓸었다.
“콜록······ 이럴 수가. 독이다!”
연기를 맡은 샤쿠는 호흡기에 느껴지는 타는 듯한 감각에 눈을 부릅떴다. 이 연기의 정체는 직격당한 고블린들은 피를 쏟으며 죽어 버릴 만큼 독한 독가스.
상상을 초월한 방식의 테러에 족장인 샤쿠마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케에엑······.”
“적, 적이다······.”
족장급 고블린도 괴로워하니 일반적인 고블린들은 피해가 더 컸다. 하지만 끙끙거리며 피가래를 뱉어 내는 고블린들에게, 숲을 뚫고 돌진해 오는 수백의 적들이 땅을 울리며 직선으로 부락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게 보였다.
[계산대로 적들의 전투력이 급감했습니다.]
병사들을 돌진시키는 마왕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자 망설임 없이 다음 계획을 실행했다.
고블린들이 독가스에 당해 정신없는 사이, 저 든든한 토벽을 넘어 병력을 안에 쏟아붓겠다는 계획이었다.
[일부 병사들을 계단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벽을 타 넘는 것으로.]
병력 구성도 순전히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삼각뿔소ㆍ알파처럼 몸이 육중한 이들은 그 자체로 발판이 되어 뒤에 오는 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스스로 벽을 탈 수 있는 신체 구조를 가진 병사들은 단숨에 벽을 타 넘었다.
[현장 지휘 프로세스 연결 정상.]
그리고 무엇보다, 마왕은 이번 전쟁에서부터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서 운영했다.
지금 적들을 공격하고 있는 병사들 중 일부는 조금 특별한 개체들이다. 그들은 뇌를 가진 병사들로, 마왕의 지휘를 도와줄 일종의 지휘 개체였다.
***
“막, 막아. 반드시 막아라!”
아비규환, 아수라장, 난장판. 그 모든 말이 지금 이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달이 휘영청 뜬 야심한 밤에 이곳은 고블린들의 비명과 고성으로 가득차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터져라!”
샤쿠의 고함과 땅이 터지며 일어나는 소음도 그 중 하나였다.
분명 고블린들이 익힌 땅의 주술은 강력하여, 육중한 몸무게를 가진 적들도 일격에 즉사시킬 정도.
하지만 적들은 너무 많았다.
‘이놈들······ 이놈들이 분명하다!’
내부에 난입해서 미친듯이 날뛰는 검은 갑주의 괴물들을 보는 샤쿠의 눈이 미친듯이 떨렸다. 고블린 부족을 흔적만 남기고 남김없이 몰살한 정체불명의 ‘세력’.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족, 족장. 이미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남은 이들이라도 이끌고 후퇴해야 합니다. 다른 부족이 전멸한 걸 생각하십시오!”
다른 주술사들이 그에게 달려와 후퇴를 이야기했다. 비록 숫자는 절반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미 준비한 방어 수단들은 모두 무력화되었고, 본진 내부에서 벌이는 난전은 고블린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 어둠을 틈탄 괴물들의 습격은 본래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 후퇴라고?”
그의 몸이 떨렸다. 비록 패배하더라도 다른 부족처럼 전멸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 몸을 지배했다.
“후퇴, 후퇴시켜라!”
결국 그는 부락 내부에서 전멸하기 전에 살아남은 이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부족을 포기한 샤쿠가 휘하 세력을 이끌고 도주하려는 것을 쫓기로 결정하고, 근처의 병력 다수를 데리고 그 뒤를 추격했다.
[놓칠 순 없습니다.]
마왕은 병력을 나누었다. 부족 내부를 마무리 지을 병력을 남기고 도주하는 샤쿠와 잔당들을 쫓았다.
그 선두에 숲길을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는 네발짐승 다수가 있었고, 그것들은 곧 도주하는 고블린들을 따라잡아 마음껏 사냥했다.
“이런, 제기랄! 죽어 버려라!”
샤쿠를 비롯한 주술사들과, 정예한 고블린 전사들이 주축이 되어 그 추격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아무리 주술을 써서 다수의 적을 죽인다 한들, 적들은 주술을 난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그들을 압박했다.
애초에 마왕이 주술이나 마법 같은, 아직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힘에 대처하는 방식이 바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이런 미친. 대체 네놈들은······.”
도주하는 것도 중간에 막혀 버린 샤쿠와 잔당들은 자신들을 포위한 적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붉은 안광들. 그것들은 사방에서 빛나며 그들을 죽이기 위해 이빨이며 발톱이며 각자의 무기를 드러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