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대격변(3)
18화-대격변(3)
[승리 확률 90% 이상.]
결판은 이미 나 버렸다. 그들이 미처 하늘에서 떨어지는 테러를 예측하지 못한 그 순간에, 버티지 못하고 적들을 내부로 들이게 된 바로 그때에.
잘 무장시킨 병사들은 덩치 큰 마수형 마왕군에게 쓸려 나가듯 휩쓸렸다. 짐승의 형태를 가진 마수형 마왕군의 근력과 전투력은 투자되는 양분 대비 상위권.
온갖 생물종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만들게 된 가장 단단한,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등에 기껏 구한 강철 갑옷도 우그러지고 뚫렸다.
“키, 키이익······!”
공포에 질린 고블린 하나가 동료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는 쌍두호ㆍ알파를 보며 몸을 떨었다.
이미 전투 의지는 상실한 지 오래다. 훨씬 더 지능이 뛰어나고 강한 족장급들도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판에 제대로 된 지원도 지휘도 없으니 당황할 뿐이다.
[도망치는 이들을 추격합니다.]
마왕군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리 족장에게 충성한다 한들, 고블린들은 결국 감정과 본능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리고 그 감정과 본능은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득보다는 실로 작용했다.
극심한 두려움과 부정. 이미 겉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 그것들은 명령과 사명감보다 더 크게 고블린들의 생존 본능을 자극시키고 부추겼다.
“어딜, 가는······!”
그나마 병사들을 지휘하던 고블린 전사들은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하는 병력들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그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거의 동시에 잠시 주춤했던 적의 병력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이······ 놈······!”
고블린 전사는 자신을 덮치려는 거대한 거미와 필사적으로 싸웠고, 앞다리를 베어내고 독니를 물기 전 그 머리를 반으로 쪼개 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전부였다.
마왕군은 고블린들과 상당히 달랐다. 함성을 지르며 고함 쳐 전투를 지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두려움에 빠져 와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혹은 곁에 있는 동족이 죽던가 말던가 오직 적을 쓰러트린다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사기 진작 같은 건 없었다. 함성도, 소리치는 지시 따위도 없었다. 그런 게 없어도 마왕군은 언제나 전력을 내니까.
“설, 마.”
이 위화감을 고블린 전사는 주변 고블린들 다수가 이 괴이한 적들에 의해 단번에 죽어 나가자 이해하게 되었다.
다만 좀 늦은 감이 있었다. 기세에서부터 압도되어 와해되기 시작한 고블린들을, 적들은 최대한 추격했다. 마치 단 하나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이제 마지막입니다.]
고블린 본대가 와해된 이후. 마왕은 자기들끼리 피난가려던 것을 포위한 상태로 족장 샤쿠와 그 패거리를 위협했다.
당연히 이판사판. 고블린들은 끝까지 항쟁할 것을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샤쿠는 이를 악물고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주술도 사용 가능하고 아직 싸울 수 있는 힘은 다들 충분하다. 다만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다 말한 것은 적들의 정확한 전투력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 잔당들이 대부분 궤멸함에 따라 점차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병력의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어디 계속 덤벼 보아라, 이 지옥의 괴물들아!”
옴짝달싹 못하게 된 샤쿠는 결국 다 포기했다. 동시에 분노와 함께 억울함이 차올랐다. 왜 하필 자신들의 부족인지, 왜 하필 자신들을 이번 목표로 삼았는지 등등.
[지옥?]
마왕은 A.I답지 않게 그 도발을 받았다.
“이, 이놈들······.”
그러자 샤쿠 역시 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감지하고 흠칫거렸다. 고블린들을 포위하고 있던 이 정체불명의 검은 괴물들의 기세가 변한 순간이었다.
[저는 의무를 다합니다.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올바른 심판을.]
마왕은 분노했다. 일개 스마트폰 인공지능이었던 마왕이 물려 받은 유산은 단순히 권능만 있던 것이 아니다.
전대 마왕이 품었던 증오와 분노를 그대로 물려받은 마왕에게 고블린들이 보이는 안하무인적인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
[전 병력 돌격.]
원래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은 발악하려는 고블린들을 향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신의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정한 마왕군을 돌진시켰다.
심지어 지금 이곳만 공격받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과는 꽤 떨어진 곳.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던 부족 역시 함께 움직인 마왕군 일부에 의해 무너져 가는 중이었다.
***
“이건 비상 사태다. 지금 당장 모든 부족들에게 알려라. 북쪽 숲에 알 수 없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마왕의 양동 작전에 하루 아침에 부락 두개가 전멸했다. 합치면 도합 1천이 넘는 고블린들이 죽었다.
족장 라쿠는 이것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위기임을 깨닫고 황급히 모든 부족들을 소집했다. 그들 역시 소식을 듣고 하나로 힘을 모으는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
“족, 족장. 역시 왕에게 알리는 것이······.”
“이런 제길!”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최대한 무시하고 싶었지만 라쿠는 결국 일대를 지배하는 영주이자 고블린들의 왕을 자처하는, 72명의 영주 중 하나인 배신자 안드라스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 있는 그 건방진 그린 스킨들이 의문의 적에게 당해 우리에게 도움을?”
안드라스는 보고를 듣고 코웃음을 흘렸다. 대전쟁 당시 모든 고블린들이 그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북쪽의 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비록 하나로 합병하고 충성 맹세도 받았지만 안드라스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은 토착 부족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왕이시여. 결국 그들도 저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만약 문제가 생겨 세금 수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크흐,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신하의 조언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부족들이 마음에 안드는 것을 떠나서 결국 그들 자체가 자신과 세력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전쟁을 일으킨 성녀 때문에 인간 놈들도 혼란스럽고······. 덕분에 다른 영주놈들도 신경 쓰인다. 이런 와중에 힘을 잃을 순 없지.”
안드라스는 히죽 웃었다. 그는 마족 중에서도 최하층이던 고블린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몸. 이미 한번 그 성장을 맛본 이상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랬다.
그것들 중 하나는 한때는 함께 힘을 합쳐 마왕을 몰아냈던 동료인 다른 영주들을 제치고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는 것.
그것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데, 그것에 트러블이 생겨서는 안 된다.
“로치와 그 휘하 부대를 불러와라. 로치에게 그 멍청한 북쪽 놈들을 돕게 만들겠다. 그리고 이번 일을 구실로 그놈들을 완전히 눌러 놔야겠다.”
“알겠습니다.”
아직까지 이 일을 변경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태로 여기고 있는 그는 믿을 만한 자신의 부하를 불러내었다.
평범한 부하는 아니었다. 무려 자신과 함께 싸웠던 부하이며, 성녀에게 ‘기적’을 부여받았던 대전쟁의 일원이기도 하니까.
[고블린 왕 안드라스ㆍ2차 각성ㆍlv 70]
그렇게 히죽거리는 그의 머리 위에, 아른거리는 문자표가 스쳤다.
[고블린 기사단장 로치ㆍ1차 각성ㆍlv 40]
“왕이시여.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로치가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드라스는 로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지금은 무슨 상태인지 설명해 주었다.
“부족 몇 개가 전멸이라니, 전쟁입니까?”
“전쟁일 리가 없다. 그곳은 척박한 땅이고, 마수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다. 다른 영주들도 그곳을 노리진 않아.”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어쨌든 그 건방진 놈들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이것을 구실 삼아 더 이상 우리에게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로치는 적이 누군지 모른다는 대답에 살짝 당황했지만 듣고보니 왕의 말이 틀지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이기도 하다. 레벨을 올려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들을 포함, 일부의 고블린들만이 공유하는 레벨 업 시스템.
이것이 바로 성녀가 자신의 신에게 받아 그들에게 부여해 마왕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준 기적이고 권능이었다. 이 레벨 업 시스템을 할당받은 그들은 싸우면 싸울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레벨이 상승했다.
게다가 레벨이 상승하면 당연하다는 듯 능력치도 강해졌으니 그들에겐 이것이 곧 진화고 성장이었다. 그 기적을 맛본 마족들은 대전쟁에 더 적극적으로 임해 마침내 마왕군을 무너뜨리고 마왕을 죽였다.
하지만 최근,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며 그들은 레벨을 잘 올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레벨을 가진 다른 영주들과 맞붙는 것은 불가능.
그러니 오랜만에 등장한 적의 모습이 내심 반가웠던 것에는 이것의 비중도 분명 있었다.
“그들을 도와, 빠르게 문제를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로치는 그날 즉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북쪽을 향해 떠났다. 대전쟁까지 직접 겪은 정예로운 고블린 기사단의 힘은, 일개 변방 부락의 전사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제대로 된 검법과 심법을 배우고 경험까지 쌓은 그들은 애초에 이번 일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적들의 규모가 적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까지 도착하는 중. 아무래도 이번 전투는 지금처럼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마왕은 당연히 그들의 모습도 모두 지켜보았다. 위성 정찰과 항공 정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사방에 퍼트린 다양한 종류의 정찰병들을 통해 일대를 실시간으로 관측하는 마왕은 로치와 그 부하들이 뭉치고 있는 라쿠의 부족에 합류하는 모습도 관측했다.
“어······ 근데 지금 여기도 난리야.”
그러나 이번에는, 그도 일방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격변이,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괴, 괴물들이 정말 나왔습니다······!”
“쏴 버려!”
그가 박스디의 목소리를 들으며 들고 있는 휴대폰, 안에서는 정체불명의 균열에서 기어나오는 괴물들을 향해 미리 재기하고 있던 한국군이 화력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먼 나라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박스디의 세상을 볼 수 없듯 박스디도 그의 세상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그가 불안해한다는 것.
“넌 뛰어나지, 박스디. 강하고, 수많은 병사들도 부려. 하지만 난 아니야. 장담하건데, 저런 괴물 하나랑 마주쳐도 난 그 자리에서 죽을걸.”
[어떻게든 방법을 구상해 보겠습니다].
“네가? 듣기로는 네 코가 석 자 같은데.”
[할 수 있습니다.]
박스디는 대답했다. 설령 그렇게 찾아낸 가능성이 극히 미미하더라도 상관없다. 그 극히 미미한 가능성을 키우고 증폭시키며 진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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