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대격변(5)
20화-대격변(5)
“마법사······ 맞아. 나는 마법사······.”
자기 자신째로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억지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들로 인해 다시금 미치는 일은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의 공포가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유리아. 유리아 브란트.”
마왕은 그녀가 얼추 진정한 것처럼 보이자 다시금 질의응답을 시작했다. 아직 불안정하긴 했지만 그녀는 나름 착실히 대답을 시작했다.
[당신은 어째서 고블린들에게 잡혔습니까?]
“나, 나는······.”
고블린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몸이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끔찍한 기억들 중 가장 끔찍한 기억들이 지금 떠오르는 기억들이었다.
얼마나 끔찍했냐면, 고블린들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에 자신이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했었다는 사실도 깜빡 잊었을 정도였다.
[배신?]
그리고 마왕은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배신, 그것은 현 마왕의 근간과도 같은 것.
패잔병들이 결코 배신당하지 않을 강력한 마왕을 원했기에 인공지능인 현 마왕이 이 땅에 강림한 것이었다.
“맞아요. 저는 동료들과 함께 연합군에 참전했던 마법사. 하지만 저는, 우리는 배신당했습니다. 사전에 고지된 것과는 달리 한낱 미끼로 쓰였고 우리는 그대로 전멸했죠.”
얼굴을 찡그린 그녀가 그날의 기억을 뒤지며 짓씹듯 말했다. 기억만 선명해 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감정 역시 그때와 같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분노와 원망이었다. 의기롭게 참전한 자신들을 소모품으로 써버렸던 연합군의 지휘부를 향한.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박스······ 디? 목소리는 여자 같은데. 대체 여긴 어디입니까?”
[저는 스타더스트 D 10+의 비서 인공지능이자, 마왕 소환술로 마왕이 된 마왕입니다.]
“······네?”
[그리고 이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당신을 깨우려 했을 때 움직이는 마력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니 들어오게 된 것뿐. 유리아 브란트, 마법사인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그녀는 역으로 질문했으나 막상 듣게 된 마왕의 대답은 그녀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가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 마왕은 그녀에게 역으로 제안을 하나 건넸다.
[내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힘을 빌려주십시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왕이라니요?!”
[합리적인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한계를 맞이한 당신의 육체는 지금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제게 협조한다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당황한 유리아는 정보를 요구했다. 마왕은 딱히 숨기지 않고 현실을 말해 주었다.
전대 마왕은 같은 마족들의 배신으로 이미 죽었고 자신은 그 의지를 이어 나가기 위해 외부에서 온 새로운 마왕이며, 고블린들의 사육장에서 발견된 그녀의 현재 몸은 이미 망가진 상태라는 것까지.
“아아······.”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포로로 잡혔던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다시금 깨달은 이후 충격을 크게 받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망설일 이유가 있습니까? 제게 협조하여 새로운 육신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은 언젠가 자신의 염원을 다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협조하면 다시 태어나게 해 주며, 동시에 증오스러운 이들에 대한 복수의 기회까지 얻을 수 있다는 마왕의 제안은 굉장히 달콤하고 치명적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이미 인간의 유전 데이터도 획득했습니다. 조합식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게다가 모두 유리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언제나 계산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불현듯 불안함을 느낀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
이미 또렷하게 의식을 차린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곳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더 싫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이곳에서 꺼내 주세요.”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결국 밑져야 본전 수준이던 유리아는 마왕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강압적인 수는 쓸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에게서 원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던 마왕은 설득에 성공하여 끝내 원하던 것을 얻게 되었다.
[인간의 데이터에, 그녀의 육체 정보를 결합.]
마왕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촉수로 들고 있던 그녀의 몸을 일꾼에게 시켜 소화장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그 몸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뇌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한 군데로 뭉치기 시작한 나노들은 생산장에서 조금 특별한 둥지를 형성했다.
그 둥지 내부에서 자라는 것은 다른 병사들과는 조금 다른, 그 겉모습이 인간과 거의 흡사한 몸을 가진 생명체. 마왕은 기존의 몸에서 분리한 그녀의 뇌를, 새롭게 생성되는 몸 속에 집어넣었다.
“이, 이건······.”
정신세계로 명명된 그곳에 갇혀있다시피 한 유리아 역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차렸다.
기존과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새로운 육신. 그 육신의 배양이 성공적으로 진행될수록, 그녀의 정신세계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온전한 전력을 낼 수 있게 비효율을 감수하고 인간의 몸을 베이스로 개조를 진행.]
그리고 마침내 모든 조정이 끝났다. 이제는 분해되어 없어진 이전의 몸 대신, 마왕군의 일부로 다시 태어난 유리아가 천천히 웅크리고 있던 몸을 움찔거리며 눈을 떴다.
금발은 여전했지만 탁하고 공허하던 푸른 눈은 사라지고, 은은하게 번득이는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당신의 뇌에, 정보를 업로드하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리아가 채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제 그녀의 몸을 구성한 세포 하나하나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게 된 마왕이 그녀의 뇌에 자기가 알고 있는 몇몇 정보들을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 으윽······.”
그녀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기괴한 감각에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그것을 견뎠다. 그래도 덕분에 그녀는 대량의 정보를 공부하거나 이해할 필요도 없이 손쉽게 알게 되었다.
‘마왕!’
그리고 동시에 전율했다.
말로 들었을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완벽히 이해되었으니까.
“우읍······ 흐으읏.”
[아직 뇌와 육체가 제대로 결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새롭게 얻은 육신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던 유리아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헐떡였다. 마치 맞춰져 있던 모든 세팅이 초기화된 것처럼 모든 것이 어색하고 이질적이었다.
“옷······ 이 필요해요.”
그녀는 나체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며 쓰게 웃었다. 이전과 비교해도 훨씬 아름다워진 몸은 마왕이 가장 완벽한 비율을 찾아 계산한 것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당신은 생산된 지휘 개체 중 가장 고등한 존재. 체내의 나노를 직접 움직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마왕은 옷을 찾는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단위 마족, 나노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법을 알려 주었다.
“하······ 하하!”
그녀는 그 방법대로 자신의 몸을 직접 조작했다. 곧 그녀의 피부가 급격히 변이를 일으키더니, 빠르게 무언가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갑옷을 연상시키는 검고 거친 갑각과 질긴 가죽. 그 몸을 두른, 펄럭이는 로브 혹은 망토와 같은 피막. 유리아는 어지간한 강철보다 단단한, 날카로운 발톱이 돋은 괴물의 손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뽀얀 알몸은 가리게 되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 중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부위는 목 위의 얼굴뿐이니, 새삼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것이다.
[충분하군요.]
“알겠습니다. 마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다만 과연 제 지식이, 마왕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유리아는 선택지가 없었다. 애초에 육신을 바꾼 이상 이 육신의 진짜 소유자는 마왕인 박스디였으니까. 그녀는 일단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마왕과 공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현 시대의 마법은 모두 실종의 변환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품고 있는 마력을 변환시키는 것이죠. 과거에는 다양한 학파나 계열들이 존재했다지만, 현재는 가장 실용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수식법만이 살아남은 모양입니다.”
[이해 완료.]
“대, 대단하십니다.”
마왕이 가진 연산력은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그런 연산력은 곧 학습력을 의미한다. 유리아가 설명을 해도 그 즉시 외우고 이해한 마왕은 엄청난 속도로 마법에 대해 익혀 갔다.
이렇게 된다면 굳이 그와 소통하는 데만 마법을 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마법을 난사하는 마도 병단을 양성하기에는 보유한 마력이 부족하고, 병사들의 몸에 마력을 부여할 방법도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것에만 집중해 보시죠. ‘그분’과의 연결점이 확실하다면, 분명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유리아는 마력을 변환시키는 마법의 원리와 구조를 익히게 된 박스디가 염원하던 그와의 연결이 가능할 것이라 평가했다.
[연결 가능.]
그리고 계산을 끝낸 박스디 역시 가능하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마법 실행. 마법명ㆍ연결.]
그리고 그동안 축적한 마력을 연료삼아 단숨에 그 마법을 발현했다.
***
“김창현 님, 박스디입니다. 김창현 님?”
어둑한 자취방. 침대에 엎어진 그의 숨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머리 옆에 있던 휴대폰이 웅웅거리며 빛나더니 그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인공지능 특유의 목소리였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휴대폰 내부 스피커와 프로그램을 사용한 덕에 기계음 가득했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듯 울렸다.
“왜······ 무슨 일이야······.”
잠에서 깬 그가 눈도 채 뜨지 못하고 휴대폰을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한껏 찌푸린 얼굴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성공했습니다. 마법을 익히고, 그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여 현 상황에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
어딘가 들뜬 게 확연히 티 나는 박스디의 목소리와 함께 비몽사몽이던 그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이내 휘둥그레 떠졌다.
휴대폰 속에는, 더 이상 텅 빈 화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바, 박스디?”
“위대하신 마신께 인사드립니다.”
벌떡 일어나 앉은 그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서, 눈치를 보던 그녀가 일단 허공을 보며 한쪽 무릎을 꿇더니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현재 그녀가 있는 배경은 말로 지겹게 듣고 사진으로 지겹게 보았던 둥지 최심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찰랑이는 금발 머리에 격하게 흔들렸다.
“저는 마왕께서 거두어 주신 마법사, 유리아 브란트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네.”
유리아의 인사를 받은 그는 정말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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