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대격변(6)
21화-대격변(6)
‘마신.’
유리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사실 더 이상 땀 같은 건 흘리지 않는 몸이 되었지만, 만약 기존의 몸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식은땀을 쏟는 건 물론 너무 긴장한 심장도 더 거세게 뛰고 목소리도 덜덜 떨렸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충격적이고 믿기 힘들었으니까.
[그분께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묻고 계십니다.]
“그, 그분께 닿은 것 말입니까?”
마왕은 양쪽의 말을 듣고 서로의 소통을 중계해 주었다. 유리아는 일단 자신이 무슨 원리를 마왕에게 알려 주고 어떻게 성과를 보았는지 허공을 보며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신이 실존했다니. 하긴 빛의 여신도 성녀에게 그만한 힘을 내려 주셨다. 이상할 건 없어.’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신에 대해 알고 있는것은 사실 전설 몇개가 전부였다. 그녀가 아는 마신이란 분명 마계의 창조주이며 마왕의 주인. 즉 이 모든 ‘악’의 근원.
유리아가 괜히 주변을 흘끔거렸다. 이 둥지가 얼마나 거대한지,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있는지, 얼마나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이제는 그들과 하나가 되었기에 알 수 있다. 마왕을 지휘하며 이런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과연 마신 밖에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세상이 다시 전란에 빠지겠구나. 빛의 여신이 성녀에게 직접 힘을 주고 균형을 깨 버려서······ 마신도 직접 개입한 거야.’
그리고 유리아는 대충 전말을 파악하고 이해했다. 물론 그녀의 오해가 다수였다. 애초에 마왕은 그를 마신이라고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분께서 흡족해하십니다. 기존에는 바늘구멍 같았던 연결을 건들 수 없어 그분과의 소통에 제한이 컸지만, 지금······ 그분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화, 황송합니다······?”
유리아는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말에 흠칫했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박스디, 유리아는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우리에게 협력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신경이 쓰여서 그래. 그녀는 어찌 되었든 인간 출신. 아직 고향에 가족도 친구도 다 있을 텐데 과연 우리에게 온전히 융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리아와의 첫 만남을 가진 이후,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그는 마왕에게 신경 쓰이던 것을 하나 물어보았다.
[유리아, 당신의 진정한 목적을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마왕은 유리아에게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히게 지시했다. 그녀는, 마치 미리 각오를 다진 듯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배신당했습니다. 더 이상 인간 세상에 제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복수······ 목숨값을 갚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복수 역시 이룰 수 있다면 반드시 이루고 싶습니다.”
유리아는 순간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러담아 말했다. 정의감으로 전쟁에 참전한 자신들을 미끼로 써먹고,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연합군의 지휘관들.
가능만 하다면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그, 그래. 안타까운 일이 있어나 보네······.”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보고 들으니 사진이나 전해 듣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그녀의 기세에 살짝 당황한 그는 해당 주제를 슬쩍 넘겨 버렸다.
“어쨌든 이렇게 소통하게 된 건 좋아. 하지만 이게 전부야, 박스디? 내가 뭐 해 줄 수 있는 건 없나?”
[감창현 님과, 정확히는 김창현 님의 휴대폰과 이곳에 있는 저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미지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 연결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진 못했지만, 마법의 원리로 그 연결의 일부를 비틀 수 있게 된 저는 연결을 개조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직은 화면을 연결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마왕은 그에게, 더 많은 시도를 해 볼 수 있다고 단언했다.
더욱더 진화하는 서로의 소통.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서로 직접 닿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 둘 모두 살아남거나 성장해야겠지.”
그러자 그걸 듣더니 쓰게 웃은 그가 화면 속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유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쪽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게이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하나만 띡 생기고 사라지는 게 아닌 모양이야. 발생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안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도 다양해. 아무래도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아.”
뉴스 기사를 찾아보는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 첫 등장부터가 큰 충격이었던 세계의 이변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정체불명의 균열과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 덕분에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앞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됐어. 잘 피해 다니면 되지 뭐. 군대가 뚫리지도 않고 있고.”
[유사시를 대비해 김창현 님의 몸을 지킬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정말 괜찮다니까. 너도 여유 없잖아. 집결한 고블린들은 지금 뭘 하고 있지?”
[······고블린 군단은 현재 편제를 개편하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상황을 묻는 그의 말에 마왕은 일단 대답했다. 말대로 사실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한곳에 뭉친 수천의 적들은 이미 활동을 개시한 상태였다. 마왕은 이제 사진을 보내 줄 필요 없이 곧바로 화면을 전환시켰다.
***
“미친. 많다.”
나는 화면을 보고 침음했다. 이미 사진으로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사진과 영상은 그 실감이 차원이 다르다.
마치 드론이 촬영하듯 하늘에서 지상을 비추고 있는 휴대폰 화면에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덩어리들이 보였다.
그 덩어리들이 전부 우리의 적이었다. 감히 하늘에서 날짐승의 눈으로 자신들을 살핀다는 건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지, 적들은 그 누구도 하늘을 활강하는 비행종 정찰병을 공격하지 않았다.
[확인된 적의 숫자는 3246개체. 그중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가진 이들이 186개체입니다.]
“아군 숫자는?”
[현재 전투병은 총 1200개체. 하지만 총력전에 들어간다면 순차적으로 늘려 최종적으로 이 5배까지 늘릴 수 있습니다]
“적진 않네. 충분하지 않나?”
아군은 이제 고블린들의 어지간한 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둥지를 가지고 있다. 생산력과 병력 충원도 우리가 압도적. 적어도 숫자에서 밀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숫자는 충분하지만, 이번에 새로 합류한 그들의 힘이 미지수입니다. 데이터가 적습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 ‘고블린 왕’이 보냈다는 고블린 기사단. 그놈들이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건지 가늠이 잘 안 되었다.
“직접 겪어 보진 못했지만 소문은 들은 적 있습니다. 배신 이후 마왕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마족들이 가진 힘을. 일개 고블린조차, 마치 봉인이 풀린 듯 강해지고 제대로 된 검술 등을 익힐 만큼 똑똑해졌다고 했습니다.”
한때 인간이었던 유리아의 증언이 그나마 큰 힌트였다. 듣자니 결코 호락호락한 적들이 아닌 모양이다.
“마법을 배웠잖아. 그걸 써먹지는 못하는 건가?”
[지금 당장은 방법과 축적한 마력량이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면 다굴치는 게 정답이겠네.”
머리를 굴린 내가 중얼거렸다. 다수의 사이에 특출난 강자들이 섞여 있다면, 차라리 대규모로 맞붙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혼돈을 틈타 여럿이 공격하면 되니까.
[아직 저희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적들을 최대한 유인하여, 미리 준비한 숲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회전을 준비하겠습니다.]
미리 몇 가지 계획을 생각해 두고 있던 박스디는 내 이야기를 듣고 대응 방법을 완전히 결정하였다.
[병력 재배치 진행 중.]
곧 휴면 상태로 죽은 듯 대기하던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긴장해서 그 장면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영화처럼 펼쳐지는 생동감 넘치는 영상들. 하지만 저것들은 분명 현실이다.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물론 답답한 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박스디가 방법을 찾아내어 이렇게 실시간으로 살필 수 있는 경지가 되었지만 막상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전무한 것은 여전했다.
“일단······ 준비 잘 하고.”
나는 거기서 휴대폰을 덮었다.
이제 학교에 갈 시간이다. 도움을 못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 현실을 살아야 했다. 마치 박스디가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살아남아 승리하기 위해 싸우듯.
그것이 지금의 내가 박스디에게 해 줄 수 있는 몇 없는 도움이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버스를 바로 탔거든.”
이곳은 이른 아침의 강의실, 학생들이 하나 둘 들어오며 자리에 앉아 수업을 준비한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내게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가 다가온 것도 그때였다.
물론 나는 정말로 멍을 때리는 게 아니라, 문자 알림 형식으로 보내 오는 박스디의 보고를 보고 있었다.
“뉴스 봤어? 이 근방에서 또 열렸잖아. 게이트.”
“그렇지. 그래도 전보다는 작다잖아.”
동기가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혹시 몰라 아예 휴대폰을 가려 버렸다.
“예상대로면 오늘 터진다며. 이번에도 생중계해 주려나.”
다행히 동기는 내 휴대폰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신 요즘 전 세계의 이슈인 게이트 이야기만 늘어 놓았다.
특히 이틀 전 우리 학교 바로 옆동네에서 발견된 게이트. 정부는 현재 엄중히 통제 중인 그 게이트에서 아마 오늘 안에 괴물들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분명 중계할 텐데.”
“그런 걸 뭐 좋다고 챙겨 보냐.”
“나쁜 건 아니잖아? 당장 이 근처기도 하고, 괴물 놈들 시원하게 쳐부수는 거 보면 뽕도 차고.”
친구는 휴대폰을 열어 인터넷을 뒤적였다. 게이트 실황을 중계하고 있는 방송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
하지만 그 순간, 방송을 잘 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뜬 그의 얼굴이 창백히 굳었다.
심지어 그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같은 것을 보고 있었는지, 다른 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던 몇몇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뭔데. 왜 그러는데?”
“바, 방어선이······ 지금 군대의 방어선이 뚫렸대. 방송도 같이 끊겼······.”
그리고 심상찮음을 직감한 내가 그의 몸을 잡음과 동시에 강의실이 있는 건물 전체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 지금 당장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대피? 어디로?”
“일단 뛰어!”
사이렌과 함께 당황한 목소리로 대피 명령이 떨어졌다. 그 즉시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허겁지겁 자리를 떠나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이게 맞는 건가?’
우리 역시 일단은 사람들과 함께 뛰었다. 다만 나는 계속해서 불길함을 느꼈다.
다들 대피소 역할을 하는 근처 지하 시설 등으로 뛰는 것 같은데, 애초에 지금 이 상황은 공습이 아니잖은가. 차라리 강의실에 숨어 있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별일 없겠지. 그러니까 저기로 가자.”
나는 급한 대로 친구에게 길 건너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지하에 대형 강의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실제로 주위의 몇 사람은 그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안에 자리는 충분해 보이는······ 큭!”
“아악!”
거센 돌풍이 불어닥치며 길을 가로지르던 우리를 덮친 게 그때였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돌풍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괴물.”
바닥에 넘어진 나는 우리를 덮친 ‘그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흐릿한 연기처럼 반투명하지만 분명한 형체를 갖추고 있는 흐물거리는 괴물. 공중에 둥둥 떠 있던 그것은 푸른 안광을 불태우며, 날카롭게 돋은 손톱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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