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대격변(8)
23화-대격변(8)
‘시, 시작되었다.’
전장으로 선택된 숲이 고블린들의 비명과 고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직은 모습을 숨기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리아는 오묘한 기분에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자신만만하게 돌진하던 고블린들.
놈들은 지금 예상치 못한 적을 만나 크게 당황한 상태다. 유리아는 배신당한 자신을 사로잡아 능욕하고 짓밟은 고블린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나서고 싶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계산대로, 적들의 선봉을 부쉈습니다. 뒷열에 있던 적들의 후속대가 오긴 하지만 대비해 둔 병력을 축차 투입합니다.]
중간중간 섞은 지휘 개체들을 통해 이 모든 전장을 지휘하고 있는 마왕은 미리 시뮬레이션 해 둔 대로 착실히 작전을 진행시켰다.
‘이런 식이라면 마왕군이 질 리가 없어.’
유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아 온 마왕이 단순한 직감이나 불확실한 예측에 의존하지 않고, 특유의 연산력을 이용해 수많은 전략과 전술을 모두 계산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채택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마왕은 유사시를 대비한 플랜도 수십 개 이상 보유하고 있다.
기존의 상식을 부수는 방식이었다. 하물며 고블린들은 마왕의 정찰을 알아차리지도 못해 자신들의 모든 정보를 그대로 넘겨 주었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정확성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상식. 덕분에 마왕의 전술은 고블린들의 허를 찌르며 단숨에 전장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족, 족장!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괴물 놈들을 상대로 도망치자는 것이냐?!”
유리아가 고블린들을 짓밟아 가는 마왕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패닉에 빠진 고블린들 한가운데에서 당황한 라쿠는 사색이 된 부하의 외침에 발끈했다.
그러나 그 발끈은 오래가지 못했다. 라쿠 본인도 분노를 뛰어넘는 황당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족은 당연히 아니다. 마수는 더더욱 아니다. 대체 이것들은 뭐지?’
오직 아군의 비명만 들리는 주변을 둘러본 라쿠는 흔들리는 눈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거미, 너무 많······ 캬아악!”
어떻게든 뭉쳐서 버텨 보려는 고블린 전사들을 거대한 땅거미의 형태를 하고 있는 괴물이 앞다리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고블린들의 창과 그 길이가 맞먹는 앞다리는 고블린들의 몸을 관통했고, 애써 만들고 있는 진형을 붕괴시켰다.
“막아라!”
서둘러 그 틈을 막으려 하니, 거미의 등을 밟고 뛰어오른 육중한 몸의 네발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이 돋은 억센 앞발과 이빨로 버티려던 고블린들을 헤집어 놓았다.
고블린들이 가까스로 갑각의 틈으로 창을 찔러 넣어 제압해도, 이미 단 하나의 난동으로 주변 진형은 붕괴한 상태. 그렇게 진행이 붕괴하면 기본적으로 고블린들보다 덩치도 큰 괴물들은 질량을 내세워 전열을 그대로 밀어 버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라쿠는 그 모습을 보고 넋을 잃었다. 다양한 형태를 가진 마수들이 서로 조합되어서 공격해 오자, 그 파괴력은 무기를 든 고블린들 이상이었다.
“족장!”
“이놈들은 그 끝이 없는가?!”
그리고 그 순간, 멍하니 서서 점차 아비규환으로 바뀌어 가는 전장을 바라보던 라쿠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거대한 지네를 향해 주술을 쏘아 냈다.
마수, 인두귀의 등갑을 베이스로 만들어낸 마왕군 특유의 단단한 갑각도 마력이 실린 뾰족한 돌 조각 난사에는 뚫렸다.
하지만 지네를 쓰러트린 라쿠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콜록. 이건 또 뭐냐.”
“독입니다, 족장.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이 괴물들, 심상치 않습니다!”
부하 주술사는 어느새 주변에 매캐하게 퍼진 독가스를 향해 주술을 쏘아, 일으킨 돌풍으로 독가스를 날려 버리고 다시금 라쿠에게 후퇴를 종용했다.
“이런 괴이한 놈들을 상대로 후퇴하라고? 느루, 너 지금 제정신으로······.”
“방법이 없습니다. 놈들은 너무 많고, 우리 병사들은 저런 괴물들과 싸워 본 경험도 없습니다.”
라쿠는 분노했지만 느루라고 불린 부하 주술사는 생각이 달랐다. 느루는 그에게 어서 부대를 퇴각시키라 말했다.
“제길! 퇴각! 퇴각해라!”
결국 라쿠는 지금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의 싸움에서 밀려서 후퇴하는 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써서 판단하는 건 불가능한 일.
그 상태에서 패닉에 빠져 후퇴하기 시작한 고블린들을 마왕군이 악착같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미리 지정된 목표 공격.]
마왕군은 고블린들과 달랐다. 감정이란 것이 존재하진 그들은 공포에 질리는 일도, 사기가 고양되어 격해지는 일도 없다.
서로 동선이 꼬이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향해 역습에 차질이 생기지도 않았다.
‘이건, 이건 왕이 직접 나서야 할 일이다. 누구에게도 관심 받지 못한 북쪽 숲에 끔찍한 괴물들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도망치는 과정에서도 많은 고블린들이 살해당했다. 마왕군에게 당한 것보다도 같은 편에 의해 짓밟혀 죽은 경우가 더 많았다.
“히익.”
슬며시 뒤를 돌아 본 라쿠는 어지간한 오두막만 한 몸집을 가진 돌격병 삼각뿔소ㆍ알파가 사색이 되어 도망치는 고블린들을 마구 짓밟고 날려 버리며 쫓아오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페이즈 2 실행.]
하지만 마왕군은 그저 착실하게 단계를 밟아 나갈 뿐이다.
“이기고 있어. 숲에서 싸울 때는 황소를 숨기고 있다가, 쫓을 때 풀어서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도 들어맞았고.”
[하지만 이제 막 숲으로 진입하려던 이들과 합류한 이들이 도망치고자 하면 끝까지 쫓는 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계획대로 지금 페이즈 2를 실행합니다.]
그는 화면에 보이는 분위기를 보고 기뻐했으나 마왕은 냉정히 다음 단계를 시도했다. 약간 놓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전력을 온존해서 도망치게 둘 수 없었으니까.
[비행종들을 동원해 놈들의 길을 막겠습니다.]
마왕은 대기시키던 수백의 비행종들을 동원했다. 비행종들의 내구력은 분명 지상군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기동력을 살려서 도망치는 적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발을 묶어 놓을 정도는 되었다.
“하늘! 하늘이다!”
“안 돼. 길을 뚫······ 크아악!”
마수 박쥐나 독수리 등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비행종들이 활강하며 고블린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크게 당황한 고블린들이 무기를 휘두르고 하늘을 향해 주술을 쏘았지만, 비행종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목적을 위해서 몸을 던질 뿐이었다.
[목이 베여도, 날개가 떨어져도 병사들은 임무를 다합니다.]
마욍은 그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며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듯 말했다.
[배신하지 않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충성하는 진정한 마왕군입니다.]
“그렇······겠지. 결국 네 의도대로 움직이는 이들이니까.”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면에서 보이는 모습은 극단적이다.
다급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고블린들. 고블린들에게서는 그들이 공포에 질렸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반면 공격하는 마왕군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설령 자신들의 몸에 칼이 박혀도, 주술로 찢겨 나가도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끝까지 가게 된다면 어느쪽이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잠깐. 이것 봐. 여기 이놈.”
그때 그가 화면에서 무언가 발견했다.
[분명 중앙에서 파견된 고블린 기사일 것입니다.]
숲 앞에 있던 평지에서 벌어진 2차전. 그 수가 반수 이하로 뚝 떨어진 고블린들 중 뛰어난 무력을 보이며 마왕군을 상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신기한 놈들이다.”
고블린 왕이 직접 파견한 고블린 기사 로치. 그는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미는 비행종의 몸을 향해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번득이는 빛과 함께 휘둘러진 일검. 그러자 남들은 쉽게 베어 내지 못하는 마왕군의 갑각이 갈라지더니 반으로 쪼개진 비행종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블린 기사단장 로치ㆍ1차 각성ㆍlv 41]
‘레벨이 오른다.’
로치는 그 이후로도 몇 마리의 비행종을 죽여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왕군을 죽여도 경험치가 들어온다는 사실.
이렇게 경험치를 획득하고 레벨을 올려 스스로를 강화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마왕을 배신한 대가로 성녀에게 받은 기적이었다.
“단, 단장! 단장!”
“내가 너무 급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쳐 온 라쿠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얼굴을 찌푸린 그는, 사방에서 터지는 독가스를 검을 휘둘러 불러낸 검풍으로 밀어내었다.
“후퇴해야 하오. 놈들은 진짜배기 괴물이오. 후퇴한 뒤 왕께 연락해서······.”
“아니, 우리는 후퇴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요?!”
빠르게 이야기 하던 라쿠는 그의 대답에 째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했다. 그러나 로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레벨을 올릴 기회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 나는, 나는 여기서 더 진화한다.’
죽어 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자신의 세력에 괴로워하는 라쿠를 무시한 로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검을 움켜쥐었다.
대전쟁 직전까지 느꼈던 레벨을 통한 성장. 도저히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한 그는 말 그대로 기적인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싸울 상대가 필요했다.
‘나도 더 강해져서······ 왕처럼.’
“자리를 잡고 버티시오. 우린 끝까지 싸운다!”
흥분한 로치는 검을 들고 오히려 앞으로 뛰쳐나갔다. 순간 푸르게 빛나는 그의 검이 빛날 때마다, 그 단단한 갑각으로 둘러진 마왕군의 몸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며 우수수 쓰러졌다.
분명 주술과는 또 다른 강력함이다. 그러나 마왕군에서 그런 그를 유심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가설 6번의 내용대로 놈들은 도망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역시 중앙에서 합류했다던 고블린 기사들.]
“그러고 보니 소문으로 들은 적 있습니다. 성녀에게 빛의 기적을 하사받은 이들은 싸우면 싸울수록 빠르게 강해지고 쉽게 한계를 벗어난다고. 그리고 성녀와 편을 먹은 건 전대 마왕을 배신한 마계 영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페이즈 3. 주술사, 전사, 기사 등 마력을 보유한 고블린들을 요격합니다.]
마왕은 그들을 따로 사냥하기로 결정했다. 적들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마력을 흡수해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유리아, 저 유독 강한 고블린 기사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습니까?]
“푸르게 빛나는 검은 강검의 경지······ 하지만 해 보겠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마왕은 대기시키던 유리아를 고블린 기사단장 로치의 상대로 출격시켰다. 그녀는 현재 마왕군 내 유일한 마법사였으니까.
물론 과거의 그녀는 그리 특출난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된지 오래다.
[그렇다면 가십시오. 다른 기사들은 묶어 두겠습니다.]
마왕은 그녀를 움직임과 동시에 대기하던 다른 부대도 움직였다. 철저하게 대인 마크를 위해 조합된 이들이었다.
전투의 양상이 다시 한번 바뀌기 시작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