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대격변(9)
24화-대격변(9)
로치가 직접 가르친 고블린 기사들. 비록 단장인 로치처럼 레벨 업이라는 기적은 하사받지 못했지만, 기존 마왕군과의 전투도 경험해 본 그들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신ㆍ마왕군과도 분명 훌륭히 싸웠다.
마력을 수련한 그들의 힘은 보통의 고블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며 검은 노련하고 예리하다. 육중한 몸과 단단한 갑각, 날카로운 짐승의 감각으로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강적들이다.
“키익?!”
그러나 그런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전장에 퍼져 부족 연합의 고블린 전사들을 지휘하던 고블린 기사들은 기존의 마왕군과는 전혀 다른 그 모습에 당황했다.
2m에 달하는 키, 꼿꼿하게 선 허리, 손에 쥔 갑각으로 된 창과 검. 거기에 마왕군 특유의 검은 갑주까지.
전투에 필요 없는 모든 기관을 제거하고 근육만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눌러 담은 덕에 굉장히 가늘고 얇은 몸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얼굴까지 덮은 갑주의 틈에서 붉은 안광을 번득였다.
[협공하여 적들을 제압할 것.]
“······.”
그리고 그들 중 하나는 다른 개체들과는 달리 조금 더 튼튼한 몸과 두꺼운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바로 뇌를 가지고 있는 개체로 마왕을 도와 병력을 지휘할 지휘 개체였다.
마왕은 그들에게 명령하여 전장에 흩어져 있는 고블린 기사와 주술사들을 저격했다.
“캬악! 공격해라!”
[공격 개시.]
그 즉시 분노한 고블린 기사들과 마왕군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에 비해서는 덜떨어진 부하들을 이끄는 고블린 기사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제대로 된 검술을 펼쳤다.
대전쟁을 거치며 흘러든 수련법들은 분명 일개 고블린을 수준 있는 기사로 만들어 주었고, 고블린 왕 안드라스는 그것들을 이용해 자신의 친위대를 강군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위력은 자신들보다 체급도 크고 순수 근력도 훨씬 더 강한 마왕군의 오크ㆍ알파들이 밀릴 정도. 하지만 마왕은 그것을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요격조마다 지휘 개체들을 배치한 이유······. 놈들의 검술 데이터를 습득하고 공유하여 그대로 흡수하기 위함입니다.]
“그게 가능해? 그저 보고 따라하는 것 만으로 카피하는 게 가능하다고?”
[쉽지 않겠지만 시뮬레이션으로 수천, 수만 번 반복 학습하면 충분합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마왕의 설명을 듣고 놀랐지만, 마왕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의 근거가, 어지럽기 짝이 없는 전장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중이었다.
“이, 이건!”
고블린 기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당황했다. 자신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베이던 적이, 어느 순간 그것을 따라잡아 막아 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경험의 공유. 저희는 같은 시간 동안 수십 배 이상 되는 경험이란 데이터를 한 번에 축적할 수 있습니다.]
지휘 개체의 휘하에 있는 마왕군은 자신들의 경험을 지휘 개체에 전달하고 각 지휘 개체는 그것들을 가공하여 마왕에게, 즉 하이브에게 전달한다.
하이브는 이렇게 짧은 시간 수집된 대량의 정보를 단숨에 분석하고 종합하여 다시 지휘 개체들에게 뿌린다.
그런 지휘 개체의 지휘에 힘입어 마왕군은 엄청난 속도로 중첩된 경험을 쌓고 그만큼 강해졌다.
“죽······ 키야아악!”
물론 그렇다 해서 마력을 보유한 고블린 기사를 단신으로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애초에 마왕군은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이 진정한 강점.
당황한 고블린 기사는, 분투하는 와중에 결국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과 검에 참혹히 관통당해 숨이 끊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인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문 그가 중얼거렸다. 때마침 화면이 바뀌며, 이번 전쟁의 향방을 가를 마지막 분수령을 보여 주었다.
“인, 인간?! 아니다. 인간이 아니야.”
“역시 뭐라고 떠드는지 모르겠구나, 더러운 고블린아.”
계속해서 상승하는 경험치에 희열을 느끼며 마왕군 병사들을 때려잡던 고블린 기사단장 로치.
그의 앞에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동시에 로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오크ㆍ알파 20여 기를 호위처럼 대동하고 찾아온 적은 지금까지 상대한 마왕군과 전혀 달랐으니까.
목 아래는 다른 괴물들과 비슷한 갑주로 싸여 있었지만, 목 위는 하얀 피부와 화사한 금발을 가진 인간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년이 이 괴물들의 대장이로구나!”
로치는 유리아의 모습에 제대로 오해했다. 특별함을 가진 그녀가 마왕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지휘 개체 중 하나기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결국 헛다리였다.
“······비록 지금은 살짝 밀렸다지만 너희 마족 놈들 역시 여전히 내 원수다.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 나를 배신당하게 만들었으며 능욕까지 한 쓰레기들.”
유리아는 분노를 불태웠다. 동시에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또한 너희는 내가 혐오하는 배신자들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아군을 배신한 쓰레기들. 지금! 그 대가를 받아라!”
분노와 증오를 터트린 유리아가 이를 드러내더니, 손을 뻗어 끌어모은 마력을 전방에 폭사했다.
순식간에 나타난 이글거리는 화염탄이 로치를 향해 쇄도했다.
“어딜.”
로치는 푸르게 빛나는 검을 휘둘러 그 일격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그 모습에, 유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로치는 강적이었다. 레벨 업이라는 기적이 없다면 고블린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전부 공격해!”
하지만 애초에 1 대 1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유리아는 주변에 있는 마왕군을 움직여 로치를 공격하게 시켰다.
빈틈을 찾는다면 곧바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단장!”
“단장을 지켜. 싸워라!”
당연히 고블린들 역시 반격했다. 로치가 보여 주는 무력에 희망을 건 고블린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저항했다.
[본래 계획은 도발하여 1 대 1대결로 발을 묶어 두고 주변을 전멸시켜, 끝내 패배시키는 것이었습니다만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강합니다. 게다가 어째 지치는 구석도 없이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놈, 분명 성녀의 기적을 하사받은 놈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유리아는 계획과는 조금 틀려진 계획을 보고 침음했다. 일단 로치를 중심으로 한 고블린들의 단합력이 예상 외였다.
공포에 질리고 위축되었던 고블린들의 사기는 용맹한 지도자의 무력에 급격히 진작되었고 그덕에 전투력도 강해진다.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으려던 마왕군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아무래도 저희가 밀립니다. 하지만 제 마법으로는 아직······.”
유리아는 이를 갈았다. 육체는 기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녀의 마법은 여전히 인간 시절 그대로.
보통 수준의 마법사였던 그녀의 수준으로 40레벨을 넘긴 고블린 기사단장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새로운 마법을 알려 주겠습니다. 하이브의 보조를 받는다면 당신은 충분히 이 마법들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 이것은······.”
바로 그 순간에, 마왕은 그녀에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지식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게 된 유리아는 경악했다. 자신은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당신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마력을 움직인 순간, 그 당시 당신의 몸에 깃든 마력과 제가 가진 마력이 서로 공명했습니다. 그것을 응용하여 만든 ‘새로운 마법’입니다. 오직 서로의 생각과 힘을 공유할 수 있는 ‘우리만’ 시전 가능한 마법]
“새로운······ 마법······.”
마치 파일을 업데이트하듯 머리에 흘러드는 막대한 지식에 유리아는 눈을 감고 몸을 움찔거렸다.
주문 영창을 기본으로 하던 기존의 상식과 법칙을 전부 깨부수는 마왕식 마법은 마치 하나의 계산식과 같았다.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선 막대한 연산력이 필요하지만, 하이브를 보유한 마왕군에게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
다시 눈을 뜬 유리아는 치열히 싸우고 있는 고블린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즉시, 작렬하는 거대한 화염탄 수십 발이 그들을 향해 연달아 발사되었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정확한 마법이었다.
***
[애초에 승리를 예측하였습니다. 단지 얼마나 적은 피해로 얼마나 많은 적을 죽일지 그것이 문제였을 뿐.]
“이겨서······ 다행이다.”
몇 시간 이상을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유로운 박스디와는 달리 나는 긴장이 탁 풀려서 걸터앉았던 침대 밑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화면 속에서는 적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한 유리아가 마왕군을 이끌고 적들을 완전히 밀어내고 있었다.
[적장을 잡은 것 같습니다. 배신으로 얻은 힘 따위, 진정한 위기에선 자신을 구해 주지 않습니다.]
검을 휘두르며 잘 싸우고 있던 적장 역시 끝내 잡는 데 성공했다. 유리아가 합류해 마법을 난사하여 버티던 고블린들의 기세를 꺾어 버렸고, 푸르게 빛나는 검을 들고 날뛰던 놈들의 대장은 순식간에 수천에 달하는 아군 사이에 고립되어 버렸다.
“사로잡는 게 가능할까?”
[고려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저놈은 왜 끝까지 싸우려 했을까.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박스디 역시 놈을 사로잡기 위해 도주하는 적 잔당을 쫓는 데 투자할 병력을 이곳에 투자했다.
“€`¤`$》■£! ■`€`■¡€`` _{_$¤♧♧!!”
끝내 검이 부러진 놈은 알 수 없는 말을 끽끽대며 난동을 부렸다. 박스디는 덩치 큰 대형종 병사까지 동원하여 놈을 철저히 굴복시켰고,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말은 어떡하지?”
[학습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아 보입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박스디는 딱히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끝내 승리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해. 놈들이 네 정체를 알아차렸어. 계속해서 병력을 보내겠지. 계속해서 전쟁이야.”
[그렇다면 더 수월한 양분과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맞지.”
나는 침음했다. 박스디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마왕이 된 이후에는 애초에 다른 박스디들과는 다른 뛰어난 인공지능이었지만, 박스디는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계속해서 성장하는 인공지능이었다.
게다가 그 성장은 단순히 기능적인 성능에만 미치는 게 아니다.
말도 더 많아지고, 자의적인 판단도 늘었으며 감정을 내비치는 일도 더 늘었다. 특히 인간이었던 유리아를 마왕군의 일원으로 만든 이후 서로 계속해서 소통해서 그런지 그 성장 속도가 더 빨라졌다.
“여기도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어. 갑작스럽게 등장한 균열과 괴물들, 그리고 그 괴물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각성한 각성자들까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박스디에게 현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딱히 어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박스디는 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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