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균형의 붕괴(5)
35화-균형의 붕괴(5)
침략종 스팀고스트, 첫 출현은 북미 지역이며 붉은 눈을 번득이는 악마의 얼굴이 새겨진 흉갑을 중심으로 뿜어지는 검은 증기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영체의 마물이다.
몸의 대부분이 영체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공격은 거의 흘려 버린다. 이제 막 각성한 어설픈 각성자가 자신의 능력을 망각하고 혈기와 의지만으로 덤벼들어서 제압할 수 있을 상대가 아니란 뜻이었다.
“아아······.”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젊은 유치원 교사는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시체를 보고 창백해진 얼굴로 절망했다.
각성자인 사내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스팀고스트에게 덤벼들었지만, 미처 당해 내지 못하고 역으로 제압당했다. 이제, 그들과 스팀고스트 사이를 가로막아 줄 수호자는 없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증기를 보며 그녀는 아이들만이라도 살려 달라 외칠 수 없었다.
상대는 말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이세계의 침략자. 오직 사람에 대한 증오와 살의만으로 움직이는 미친 괴물이었다.
“꺄아악!”
“선생님!”
그러나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푸른 전격을 뿜어 낸 것이 그때였다.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섬광에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은 일제히 바닥에 넘어져 움찔거렸다.
“······효과 있다.”
하지만 이 전격의 끝이 향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해치려 한 괴물. 전격에 직격당한 스팀고스트는 갑옷에 달린 눈을 부릅뜨고 증기를 사방에 흩날리며 파들거렸다.
마법은 총탄이나 폭탄 같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순도 100%의 마나로 이루어진 강력한 일격.
그리고 그 일격은 영체였던 스팀고스트에게 움직임을 제한할 정도의 상당히 큰 피해를 입혔다.
“아직 놈이 쓰러지지 않았어.”
[형태를 보아하니 일반적인 원소 마법은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마법이라면 충분합니다. 놈을 전송시켜 주십시오.]
전격을 쏘아 낸 장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휴대폰을 들고 속삭였다.
[전송 시작.]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는 아직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적을 향해 다시 휴대폰을 겨누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섬광, 공포에 질려 우는 것조차 하지 못하던 아이들을 챙기면서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결코 감지 않았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보려는 의지였다.
‘사, 사라졌어?’
다만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로 시선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움직이진 못해도 분명 있었던 스팀고스트가 단숨에 어딘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유의 음울한 기운도 싹 사라졌다.
“저, 저기요! 잠깐만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서둘러 정신을 붙잡은 그녀는 마치 목적을 이루었다는 듯 몸을 돌려 떠나려는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자신이 왜 불렀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냥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녀를 슬쩍 돌아볼 뿐,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단숨에 괴물을 제압하고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그 뒷모습만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에 남을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에 사람 있어요?!”
그리고 밖에서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방송과 함께 혹시 살아있는 사람을 찾는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람처럼 나타난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약 30분 만이었다.
“얘들아. 일단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자. 우린 살았어.”
그것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일단 억지로라도 웃으며 아이들을 다독였다.
이후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창밖으로 소리쳐 자신들이 이곳에 있음을 알려 구조대에게 구조되었다.
“이런!”
쿵쿵 소리와 함께 날듯이 계단을 올라온 인물은 젊은 여각성자. 그녀는 바닥에 있는 시체와 아이들을 보고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각성자인 이지연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저희는······ 네, 저희는 괜찮아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스팀고스트가 내뿜는 증기는 강한 전자파로 일대의 전자 기기를 먹통으로 만듭니다. 휴대폰이 망가진 건 그것 때문이죠.”
한숨을 내쉰 이지연은 왜 그들의 휴대폰이 먹통이 되어 신고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대충 옷가지를 덮어 둔, 바닥에 쓰러진 각성자의 시체를 흘끔거렸다.
‘어떻게?’
천만다행인 일이지만 이지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분명 적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유치원 교사와 아이들은 살아남은 상태다.
차원의 벽을 넘어오는 끔찍한 괴물들은 대상을 가리지 않으니,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것도 대답이 될 수 없었다.
“맞아요. 누군가가 구해 주었죠.”
“······그게 누구죠?”
그때 구조대에 인계되어 아이들과 함께 구급차에 오르던 그녀가 이지연에게 대답을 주었다.
그리고 구급차가 문을 닫고 출발하기 직전, 이지연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흥분한 아이들의 증언까지 더해지니 거짓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설마.’
괴물을 단숨에 무력화시킨 강력한 화염구, 뇌전. 그리고 터져 나오는 섬광과 함께 감쪽같이 증발한 괴물.
이지연은 최근 며칠간 자신을 끈질기게 신경 쓰이게 하던, 꼭 찾아서 만나고 싶던 ‘누군가’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 아닌가 싶어 얼굴이 창백해졌다.
‘큰 키, 마스크, 검은 옷, 젊은 남자.’
자신은 보지 못했던 인상착의까지 듣는 데 성공했다.
“와, 핸드폰 바꾼 게 언젠데······.”
문제는 방금 자신을 지나친 한 경찰의 말대로 통제구역을 벗어난 스팀고스트의 난동에 일대의 전자 기기가 모두 맛이 가 버렸다는 것.
기껏 인상착의를 알았지만 증거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으니 그 애매한 증언이 결국 전부였다.
***
“집에 가는 중이야. 그나마 놓친 게 하나둘 수준이라 금방 마무리 지은 모양이네.”
모든 적들을 처리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내가 현장을 떠난지 약 1시간만의 일이었다.
솔직히 운이 조금만 더 없었다면 도착한 지원군들에 의해 수확을 거두지 못했겠지만, 박스디의 보조가 더해져 필요한 것들만 빠르게 알아차리고 해결할 수 있었다.
“너는 어때?”
[문제없습니다. 소환된 스팀고스트는 완전히 제압되었습니다.]
박스디가 이번에는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곳에 보이는 건 바닥에 나타난 빛나는 마법진과 거기서 튀어나온 빛나는 사슬 등에 단단히 구속당한 스팀고스트.
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마나로 이루어진 마법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박스디는 늘 그렇듯 내가 넣어 준 이 샘플을 이용해 또다시 자신이 가진 세력들을 업그레이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스팀고스트는 영체인데 어떻게 소화시키고 흡수하려 하지?”
[현재 방법을 도출하기 위해 가능한 분석을 먼저 시행 중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박스디 입장에서도 당장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답은 아니었다.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이용하면 어쩌면 저희가 찾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언제나와 같이 박스디는 답을 찾아내었다.
“심장?”
[스팀고스트가 영체라고 불리는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던 근원. 갑옷으로 보호하고 있던 그 심장부에 스팀고스트가 가진 힘의 원천이 있습니다]
박스디는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어떻게든 설명을 해 주었다. 덕분에 나 역시 박스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영체라고 부르던 스팀고스트의 몸과 그 힘이다. 그것은 마치 박스디가 마법을 쓰는데 사용하는 마나와 같은 힘이라는 것이 설명의 핵심. 스팀고스트가 박스디의 마법에 치명상을 입은 것도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스팀고스트는 이 심장을 이용해 마나를 비축하고 그것을 다루며 자신의 몸을 유지할 수 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본질은 무색, 무취, 무형이라던 마나가 이런 형태로 뭉쳐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마법사인 유리아의 증언까지 더해졌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지금은 분해해서 형체도 없이 사라진 스팀고스트의 흉갑에서 뜯어 냈다는 사람 얼굴만 한 검붉은 광석.
설명에 따르면 저것이 바로 놈의 심장이며 동시에 일종의 동력 기관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네 설명은 그 광물을 사용하면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건가?”
[실험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안에 깃든 힘과 그 구조를 철저히 분석해서 저희의 것으로 만든다면, 저희도 그동안 축적하기만 해 둔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박스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이 바로 마나를 이용하는 법이었다.
마나에 대한 것만큼은 아무리 유전 정보를 분석하고 조사해도 알아낼 수 없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박스디는 끝끝내 정답을 찾아내었다. 응축한 마나의 결정을 신체 일부로 다루던 이세계의 괴물을 잡아먹고 분석해서.
“한번 해 봐. 분명 네가 그랬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아군의 전력이 급상승할 거라고.”
[그렇습니다. 만약 마나를 전장에서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단순히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목소리에서 어딘가 들뜬 것 같은 기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대화를 거기서 끝낸 나는 박스디가 유리아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방법의 문제였지, 명확한 방법이 정해진다면 계산과 실행은 굉장히 빠르다. 그것이 무섭게 성장해 가는 인공지능이다.
[우선 기존의 병사를 개조하는 식으로 프로토 타입을 개발했습니다.]
실제로 성과가 나온 것은 채 몇 시간이 지나기 전이었다.
[심장을 대체시키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 전투에서의 효율이 떨어져, 이렇게 따로 장착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외부동력이라는 소리지. 마치 배터리처럼.”
박스디는 내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4개의 팔에 4개의 검을 들고 서 있는 가늘고 큰 키의 병사는 겉보기에는 기존에 있던 오크ㆍ베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마나를 운용하게 되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리아의 감탄처럼 박스디는 계산 끝에 이번에도 상식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마나를 운용하게 되었다.
오크ㆍ베타의 양 어깨, 양 허벅지,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에 붉게 빛나는 주먹만 한 광물들이 반쯤 모습을 드러낸 채 빛나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강심(強心)이라 정의한 5개의 기관이 각각의 부위에 작용하여 마나를 공급하고 공명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마나를 운용하면 연산력이 급증하는바, 차라리 단순한 방법으로 마나 그 자체를 끌어내어 운용하는 것이 저희에게 더 알맞고 효율적인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설명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유리아와는 달리 애초부터 마나가 뭔지 마법이 뭔지 모르던 나는 박스디의 말을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다.
“굉장히 기계적인 생각이네.”
그 근본이 인공지능인 박스디는 마나를 일종의 부차적인 에너지로 이해하고 철저히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구상했다.
그것이 바로 배터리처럼 충전이 가능한 기관을 만들어 병사의 몸에 부착시키는 것. 마치 기계가 파츠를 교환하듯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다. 그 결과가 지금 보이는 이것이다.
[아직 개량할 점도 한계가 보이는 점도 많습니다. 유일한 샘플인 스팀고스트의 심장에 새겨진 회로는 단지 에너지의 방출과 유지 그 두 가지뿐이던 까닭에.]
“그건 괜찮아. 더 나아질 수 있어. 분명히.”
오크ㆍ베타가 쳐든 검에서 순간 붉은 기운이 터져 나와 일렁이는 것을 본 나는 박스디의 말에 피식 웃었다.
이것마저 먹어치운 박스디가 결코 여기서 막힐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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