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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38화 (38/200)

38화-균형의 붕괴(8)

38화-균형의 붕괴(8)

이름을 짓는다는 것. 자식도 없고 동물 하나 키워 보지 않는 내게는 낯설고 어색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내가 이름을 지어 주는 대상은 평범한 존재도 아니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수많은 군세를 이끌고 있는 마왕, 그리고 내 휴대폰 속에 있었던 인공지능 박스디.

무엇보다 박스디가 직접 만들었다는 본인의 ‘몸’을 보고 있자니 괜히 좋은 이름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다행히 박스디는 이름을 주겠다며 즉흥적으로 내뱉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시,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네.”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곧바로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박스디는 기다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에 걸려 있는 희미한 웃음이 내 눈에 밟혔다.

박스디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을 표정이라는 지표로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 실감의 정도가 달랐다.

‘아무렇게나 지어 주고 싶지 않다.’

우리 관계가 단순한 인공지능과 사용자의 관계가 아니란 사실은 이미 옛적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너무 평범하거나 의미없는 이름은 주고 싶지 않았다.

“루시.”

“제 이름은, 루시.”

“어떤 이들에게 넌 파괴와 살육의 마왕이겠지만, 내게는 아니니까.”

마계의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키려는 끔찍한 재앙이지만 나에게는 수호천사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루시라고 불렀다.

다행스럽게도 루시는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다. 솔직히 보여 주는 모습만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좋아했을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아군이 적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승리의 광경을 보시죠.”

루시가 그 순간 화면을 돌렸다. 바뀐 화면 속에서는 말대로 아군과 고블린들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저희의 동원력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블린들은 병력을 분산해서 배치한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아군이 강심을 사용해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상위급 병력을 생산할 수 있게 된 이상 분산된 소규모 싸움에서 그들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루시는 아군의 압도적인 승리를 내가 전송해 준, 침략종 스팀고스트의 심장을 기반으로 제작한 동력 기관 강심 덕뿐이라 설명했다.

실제로 아군에게 가장 거슬리던 것은 물리 법칙을 뒤틀어 버리는 기적과 같은 힘인 마나. 고블린들은 마나를 사용한 주술과 검법 등을 이용해 숫자의 차이나 체격의 차이를 극복하고 아군을 압박했었다.

특히 그 힘은 소규모와 소규모로 붙었을 때 치명적이었다. 소규모로 붙게 되면 압도적인 숫자와 질량으로 찍어 누르는 아군의 전술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아군도 그들의 주술과 검법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고블린들이 다시 뭉쳐 대규모 집단전을 벌여 아직 출력과 숫자가 부족한 아군의 상위급 병력을 화력으로 눌러야 하지만, 우리가 미쳤다고 그렇게 해 줄 리가.

“어차피 고블린들은 가불기에 걸렸어. 뭉치려 하면 지켜야 할 곳들이 함락당하고 그대로 있으면 각개격파 당하니까. 절대 뭉치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시는 늘 그렇듯 내 말을 최우선으로 듣고 그것을 실현시켜 주었다.

그렇기에 이제 지시를 내리고 전략을 설명하는 나 역시 부담을 많이 내려놓았다. 만약 내가 비현실적인 헛소리를 한다면 루시가 알아서 조절해 줄 테니까.

[시뮬레이션 결과 약 75%의 확률로 며칠 안에 고블린 영지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런 애들이 앞으로 71마리나 더 있다는 거 아니야?”

계산에 있어서는 조금의 가감도, 감정도 없는 루시는 냉철하게 승리를 예측했다. 루시가 워낙 침착해서인지 정작 나는 그걸 듣고도 당장의 승리보다는 앞으로 산적해 있는 문제들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 경쟁하는 상태라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 생각은 안했어. 하지만 정말로 근처 영주들이 가만히 있는다고? 이렇게 고블린들이 망하는 걸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정찰병을 파견해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노골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야 좋은 거긴 한데······ 사실 이해는 잘 안 되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일단 북쪽 변방에 있는 고블린들의 영지는 총 2개의 영지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다.

웨어울프라고 불리는 수인종과 갈색 오크라고 불리는 오크종. 고블린들과는 또다른 형태의 세력을 이루고 살아가는 그들은, 자기들 이웃인 고블린들이 멸망해 가는데도 어째 개입 없이 조용했다.

“끝까지 그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굳이 둘 다 동시에 상대할 필요가 없겠다. 괜히 둘 모두를 공격하면 서로 협력할 테니까.”

[그렇습니다.]

덕분에 계획을 짜는 것도 쉬웠다. 이대로 고블린들을 먹어치우고, 둘 중 하나를 공격하면 다른 놈은 아마 좋다고 가만히 있지 않을까.

***

“버텨라. 막아라! 곧 지원이 올 것이다!”

“키, 키잇······.”

마왕군이 다시 한번 대단위 전략을 고민하고 갈고닦는 사이.

마왕군의 변칙적인 전술과 성장력에 제대로 된 저항력을 상실한 고블린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누적하고 있었다.

[방어가 약한 곳으로 타격하며 적 전력을 약화시키고 양분을 수집할 것.]

마왕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특히 지휘 개체들에게 철저히 적들을 괴롭힐 것을 명령했고, 그 명령을 착실히 따르는 마왕군은 단단하게 방어 준비를 갖춰 놓은 대규모 도시 같은 곳은 굳이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부족 단위로 살아가거나 소규모 도시를 이루고 살던 고블린들을 집요하게 공격할 뿐이었다.

“단, 단장! ‘놈’이 떴소! 당신이 막아야 하오!”

들이닥친 수백의 마왕군에 난장판이 된 자그마한 도시에서 싸우던 주술사 하나가 다급히 고블린 기사들을 이끌던 단장을 찾았다.

“놈이라면!”

“팔 4개 달린 놈 말이오!”

땅고블린 출신인 주술사는 갈색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덜덜 떨었다. 마왕군과의 전투가 지속되며 이제 고블린들도 나름의 데이터를 쌓고 학습한 탓이다.

다만 대강의 상대법을 적립하고 구분하는 데도 성공한 만큼 보다 객관적으로 적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상위급!”

검을 움켜쥐고 헐레벌떡 달려 나온 단장은 이곳을 습격한 마왕군을 통솔하고 있는 존재를 보고 이를 갈았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몸과 전신에 두른 검은 갑주. 투구벌레처럼 뿔이 돋은 투구 속에서 번득이는 6개의 붉은 안광.

4개의 팔에 4개의 검을 든 오크ㆍ감마는 몸에 박힌 강심을 빛내며 마왕군이 고블린들을 학살하는 그 현장 위에 미동도 없이 떠 있었다.

‘밑에 놈들로는 놈을 막을 수 없다. 내가 나서야 한다!’

마왕이 레벨을 올린 특별한 기사를 기준으로 잡고 표준화시킨 감마 타입의 출력은 어중간한 고블린 기사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어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직감한 고블린 기사단장은, 검을 빼들고 허공을 박찼다.

“이곳은 우리의 땅이다, 이 사악한 침략자 놈들아!”

고함친 그는 단숨에 오크ㆍ감마의 코앞까지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순간 마나로 강화되어 푸르게 빛나는 검은, 강철도 단숨에 베어 버릴만큼 예리하다.

“큭?!”

하지만 그 검은 교차한 두 검에 너무나 쉽게 막혔다. 동시에 남은 2개의 검에서 뿜어진 참격이 그대로 그의 몸을 덮쳐들었다.

‘이럴 수는······.’

비장하게 덤벼들었지만 일격에 당해 버린 그는 토막난 상태로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나는 자신의 팔다리를 보고 절망했다.

고블린들이 패한 것이다. 그리고 도태된 패자에게는 자비 없는 살육만이 있을 뿐. 한때 일대를 지배하던 고블린들은 이제 철저히 사냥감이 되어 사냥당했다.

“······이곳도 패배한 건가. 아무래도 고블린 놈들, 이렇게 가다간 진짜로 전멸하겠는데.”

숲에 숨어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이들마저 움찔할 정도로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이었다.

“대족장! 고블린 왕 안드라스가, 지원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웃기는군! 그 건방진 놈이 말이냐?”

“하지만 대족장, 그 괴물들에 의해 고블린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사실입니다.”

고블린들의 영역 바로 옆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웨어울프 대족장 안드로말리우스. 그는 고블린 왕이 도움을 바란다는 보고를 받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곁을 보좌하는 참모들은 지금 고블린들이 처한 위기가 사실임을 일깨웠다.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습니다. 이 검은 괴물들은 마수와 같이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마치 하나의 군대가 된 것처럼 뭉쳐 다닙니다.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끔찍한 점액과 둥지만 남을 뿐, 살아있는 그 무엇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 봤자 일개 괴물 놈들 아닌가. 고블린 놈들이야 멍청하고 방심해서 당했다지만 우리가 과연 그렇게 당할까. 말해 보라, 코랄! 일당백을 하는 듬직한 우리 전사들이 질 것 같은가?”

“······그건 아닙니다.”

그의 말에, 흰 수염을 배까지 기른 늙은 웨어울프는 고개를 저었다.

고블린과 웨어울프의 전투력 격차는 확실히 엄청나다. 고블린들처럼 빠르게 번식하거나 세대 교체의 사이클을 돌리지는 못해도,기본값이 비교 불가능할 만큼 높았다.

웨어울프 하나가 고블린 병사 열댓도 이기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일 정도였다.

“하지만 대족장, 그 괴물놈들의 성장 속도에 주목하십시오. 놈들이 처음 관측된 것은 고작 한 달 전으로 그때 놈들은 고작 수천에, 체계도 잡혀있지 않았고 마나도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채 며칠 만에 만 단위의 병력을 생산하고 마나를 다루는 개체도 등장했습니다. 만약 고블린 영지 전체를 그 괴물들이 먹어치운다면 얼마나 더 성장할지 알 수 없습니다······!”

“안드라스, 그놈을 제거할 기회다. 그걸 놓치긴 싫다.”

현명한 늙은 참모의 말에 순간 움찔한 그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72 영주가 맺은 서약 덕분에 서로는 서로를 대놓고 공격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경쟁 영주가 사라진다면 무주공산이 된 그 땅, 그 자원은 곧 먼저 먹어치우는 자가 임자가 된다.

그 탐욕을 안드로말리우스는 차마 떨치지 못했다.

“그 괴물 놈들과 안드라스가 공멸하는 순간을 노린다. 우리만 이렇게 하겠는가? 갈색 오크를 이끄는 플라우로스, 그놈도 분명 기회를 보고 있을 것이다.”

경쟁 상대가 고블린 왕 안드라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갈색 오크들을 이끄는 갈색 오크왕 플라우로스 역시 영역을 확장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두고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결국 늙은 참모 코랄은 대족장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사실 더 강하게 반대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코랄 역시 괴물들이 고블린들과 공멸하는 순간을 노린다면, 자신들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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