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균형의 붕괴(9)
39화-균형의 붕괴(9)
굴욕과 굴종, 지배와 통제. 착취당하고 무시당하는 약자의 입장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것들이 증오스러웠을 뿐이다.
72 영주가 결성되었을 때 그들은 설령 외부의 도움을 받더라도 마왕이 주도하는 마계의 법칙에서 벗어나 관습과 법칙을 뒤집는 혁명을 성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럴······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고블린 왕 안드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천대 받고 무시당하던 최하급 마족 고블린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동안 봐 왔던 자신의 다른 동족들처럼 패배하기 싫어서, 도태하기 싫어서 악착같이 앞으로만 달렸다. 그러나 생물종의 근본이나 마찬가지인 경쟁은 마왕을 몰아내도 끝나지 않았다.
함께 싸웠던 72 영주는 곧 경쟁자가 되었고 쟁쟁한 마족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며 당당하게 일대의 지배자가 된 안드라스는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그 경쟁에 임했다.
“이럴 수는 없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숨 가쁘게 달려오던 그의 경쟁은 끝날 위기에 처했다. 그것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존재들로 인해서.
그들은 다른 영주들이 아니었다. 마계 밖에서 온 존재들도 아니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다른 영주들은 뭣하고 있는 것이냐. 저 끔찍한 괴물들이 자기들의 둥지로 이 땅을 덮고 있는데!”
“다, 답이 없습니다, 왕이시여! 아무래도 다른 영주들은 저희를 돕지 않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의 분노에 참모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했다.
자존심을 구기고 보낸 그의 지원 요청은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욕망에 의해 무시당했다.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몰려오는 적들에 맞서야 했다.
“우리가 저딴 괴물 놈들 따위에게!”
성벽 위에 오른 안드라스는 성벽을 짚고 저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부들거렸다.
이미 적들은 주요 도시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파괴하며 이곳으로 몰려오는 중이었다. 게다가 상상을 벗어나는 그 생산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검은 물결.
그들을 처음 본 이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조금의 오차도 없는 계산과 예측으로 영지 전체로 퍼져서 난동을 부리던 수많은 병력이 일시에 이곳에 집결했다.
하나하나의 개체가 마치 철저한 제식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정확하고 기계적인 속도로 행군하는 마왕군은 천천히, 확실하게 고블린들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겠느냐?”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안드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차별적인 경쟁자들 앞에, 기세에서 압도당한 것이다.
[적 규모 예상치 86%. 하지만 정확한 병력 구성과 비율은 파악 불가. 따라서 예상 승률 75%.]
안드라스를 비롯한 고블린들이 이를 악물고 전의를 다지며 사기를 올리고 있을 때.
마왕, 루시 역시 자신의 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루시는 고블린들과 달리 그저 냉정하게 승률과 적의 전력을 계산할 뿐이었다.
[타 영주들은 움직이지 않으니 계열 2번의 가설을 채택. 총력전으로 수도를 함락시키고, 고블린 왕 안드라스를 제거합니다.]
강화된 루시의 눈이 단숨에 공간을 확대해 성벽 위에 있는 고블린 하나를 보았다. 다른 고블린들과 비슷하지만 머리에 휘황찬란한 왕관을 쓰고 화려한 망토를 두른 고블린이다.
“배신자······.”
루시는 자신의 입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직전까진 아무 생각 없었지만 막상 안드라스를 직접 보니 괜히 마음이 요동쳤다.
따지고 보면 안드라스는 딱히 루시와 접점이 없는 대상이다. 배신당한 것은 전대 마왕이고, 루시는 그저 다음 마왕이 되기 위해 이곳에 소환된 것이니까.
하지만 그 근본이 인공지능인 루시에겐 배신이라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모든 효율을 단숨에 비효율로 바꿔버리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루시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전 마왕군 돌격. 오늘 이 전투로 이 땅의 지배자는 바뀝니다. 이제 우리가 지배자이고, 저들은 그저 사냥감일 뿐.]
루시는 자신의 병력들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끓어오르는 묘한 분노가, 마왕군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던 괴물들이 그 속에 감정의 편린을 품은 것이다.
“마왕님, 당신······.”
“그냥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감정이란 것이 참으로 끔찍하게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조절해서 이용할 수 있다면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고블린들의 성으로 쏟아져 가는 마왕군을 두고 곁으로 다가온 유리아의 말에 루시는 굳이 자신의 의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
“너, 너무 많다······. 너무!”
전쟁의 향방은 찰나의 순간 결정 나진 않았다. 안드라스를 포함, 수많은 고블린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니까.
문제는 상대가 목숨을 걸든 어쩌든 감정 따위엔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는 괴물들이란 것.
용맹히 싸우던 고블린 기사 하나가 석양이 지는 성벽 아래를 보며 멍하니 탄식했다.
땅을 전부 뒤덮은 거대한 군단은 계속해서 몰려왔다. 동료들의 시신을 짓밟고, 동료들의 몸을 방패 삼아서.
“큭, 으아아!”
고블린 기사는 성벽을 막 타고 넘어온 거대한 거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은 그나마 얇은 외갑을 두른 거미의 가슴팍을 꿰뚫었고, 체액을 흩뿌린 거미는 버둥거리다 저 밑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아.”
그러나 그뿐이다. 거미의 시체를 밀치고 성벽에 도달한 것은 거대한 도마뱀. 두터운 갑주를 두른 입을 쩍 벌린 도마뱀은 단숨에 고블린 기사를 덮쳐 물어뜯었다.
“안 돼! 자리를 지켜라!”
그 도마뱀의 머리를 창으로 꿰뚫어 버린 또 다른 고블린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서서히, 고블린들은 성벽에서도 밀리고 있었으니까.
“크헉.”
그리고 그 기사마저 하늘에서 쇄도한 비행종의 발톱에 낚아채여 저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속도는 느려도 점차 전쟁의 승패가 보이는 시점이었다.
‘아니다. 이건, 이건 아니다.’
그 모든 광경을, 자신의 부하들이 하나둘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드라스는 손에 든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경험 많은 가장 강한 고블린답게 본능적으로 예상했지만, 막상 실제로 붙어 보니 그 차이가 더 컸다.
애초에 전제 조건 자체가 틀렸다. 마치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듯 망설임 없이 착착 움직이는 마왕군은 결코 평소대로 싸우면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이대로 쭉 당해줄 것 같으냐!”
분노한 안드라스가 지팡이를 쳐들었다. 고블린들 중 유일하게 2차 각성을 마친 그의 지팡이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응집했다.
격렬했던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던 강자의 전력. 현존하는 마왕군 그 누구도 그와 맞먹는 힘을 가지진 못했다.
“내리쳐라. 고블린의 벼락이여!”
그가 지팡이를 쳐들었다. 긍지와 명예, 그리고 생존을 지키기 위해 발현한 권능이 하늘에 닿아 굉음과 함께 수천 갈래 전격이 지상을 향해 쏟아졌다.
[······예상치의 1147%를 초과하는 화력.]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가 놀라서 움찔할 정도였다. 찰나의 순간 뭉쳐 있던 수많은 마왕군의 생명 활동을 정지시키는 파괴적인 뇌전. 일순간 대열에 커다란 구멍이 날 정도였다.
지금까지 마왕군이 겪었던 그 어떠한 화력도 이보다 강하지 않았다.
“마, 마계 영주의 힘이 이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족히 8성급 이상의······.”
“저만한 위력의 주술을 난사할 수는 없겠지만 대응 계획을 상향 조정합니다.”
안드라스의 힘을 보고 기겁한 유리아와 달리 루시는 금방 계산을 마쳤다. 어차피 이 정도의 일, 사전에 구상한 수천 가지 시뮬레이션의 일부일 뿐이다.
“정신차리십시오, 유리아. 지금 그분이 우리의 전투를 보고 계십니다.”
“마신께서······.”
“그분이 보고 계시는 한, 우리에게 패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감마 타입 소집].”
당황한 유리아를 단숨에 통제한 루시는 명령을 내려, 품에 마나를 응축한 결정인 강심을 품고 있는 지휘 개체들인 감마 타입의 병력들을 일부 소집했다.
“······소식은 익히 들었다. 마나를 흉내 내는 벌레놈들!”
동시에 안드라스는 성벽 앞 허공에 모이는 십여 기의 마왕군 병력을 보고 이를 갈았다. 보고를 미리 받았기에, 그 역시 마왕군 일부가 마나를 다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몰아서 죽여 주마. 사라져라!”
안드라스는 눈을 희번덕 뜨며 다시 한번 마나를 움직였다. 어지간한 고블린들은 흉내 내는 것도 불가능한 힘. 하지만 레벨을 올렸다면 그것을 현실로 부릴 수 있다.
[집단 술식ㆍ방어막ㆍ공명 중첩.]
그러나 루시는 그것에 정면으로 맞섰다.
자신이 새롭게 정립한 새로운,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마법의 한계를 실험하고 데이터를 쌓기 위해서.
“크읏?!”
안드라스가 뿜어 낸 강한 에너지 광선이, 루시와 유리아를 포함한 마왕군이 칼 같은 동작으로 일제히 손을 뻗어 시전한 마법에 틀어막혔다.
‘정말로 된다······!’
집단 술식의 일부가 된 유리아 본인도 믿지 못해 눈이 커졌다.
각자가 보유한 마나를 마왕의 통제하에 하나로 공유하여 시전하는 거대한 마법. 안드라스가 아무리 강해도 수많은 먹이를 먹어치우고 축적한 마왕군 전체의 힘보다 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마왕군은 개인과 집단의 의미가 사실상 없는 존재들. 루시가 그 특성을 이용해 만든 고유한 마법인 집단 술식은, 안드라스의 상식을 부수고 그 힘을 완전히 상쇄시켰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방어에만 쓰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집단 술식ㆍ포격ㆍ마법진.]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낸 루시는 이번에는 공세에 대한 데이터를 추출했다. 이글거리며 떠오른 수십 발의 화염창. 그것들은 곧 거센 빗줄기가 되어 안드라스가 있는 성벽으로 쇄도했다.
“크아악!”
다급히 힘을 끌어올린 안드라스와 주술사들이 가까스로 그 일격을 방어했지만, 동시에 그 주변 성벽 위는 초토화되어 마왕군이고 고블린들이고 일제히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시적 무력화. 전체 돌입.]
루시의 데이터 축적은 끝나지 않는다. 비록 제압하진 못했지만 안드라스가 순간 빈틈을 노출하자, 더 이상 대규모 마법은 쓸 수 없었던 루시는 검을 빼들고 성벽으로 돌진했다.
“제대로 된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었······ 아니?!”
콜록거리며 일어난 안드라스는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루시를 보고 경악했다. 루시가 마법사라고 단정했던 탓이다. 가까스로 그 검에 목이 베이지 않은 것은, 곁에 있던 근위대가 자신들의 몸을 던져 그녀의 검을 맞은 덕분이었다.
“왜 두려워합니까?”
“무, 뭐라?”
“두려움이란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엔 하등 쓸모없는 감정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전대 마왕과 싸울 때도 이렇게 두려워했습니까?”
“······!”
그는 채 정신을 다잡기 전에 큰 충격을 받아 눈을 부릅떴다. 설마, 정체도 모를 괴물 집단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에게 그 이야기가 나올줄 상상도 못했으니까.
무엇보다 이미 ‘마왕이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드라스는 단숨에 루시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네놈!”
“이미 늦었습니다. 비효율적인 전장에서 비효율적인 감정 따위로 비효율적인 전쟁을 하려한 당신은, 경쟁에서 패배합니다.”
발끈한 안드라스가 다시금 힘을 움직였으나 마왕군이 더 빨랐다. 뒤에서 쏘아진 창 한 자루.
그것은 루시에게 모든 이목이 쏠렸던 안드라스의 등을 관통해 가슴을 뚫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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