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자연의 법칙(2)
42화-자연의 법칙(2)
“돌발 게이트라고 부르자고 하는 것 같더라. 평범한 게이트와는 달리, 짧은 시간 안에 성장을 마치고 안에 있는 괴물들을 쏟아내는 그런 붉은색 게이트.”
[피해 상황이 큽니까?]
“적지는 않지. 하지만 나는 최선의 결과였다고...생각해.”
이지연과 헤어지고, 사태의 수습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즈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귀에 꽃은 이어폰을 통해 전화 통화를 하듯 루시와 소통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초유의 사태니 희생은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지연 같이 앞장서서 나서준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을 최소화 했을 뿐.
당장 거의 동시에 다른 나라에 열린 돌발 게이트 피해 상황과 비교하면 우리는 굉장히 잘 버텨낸 것이다.
“이지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지. 대체 왜 그 괴물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증오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를, 그리고 마계 72영주를 떠올렸어.”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것은 제가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하지만 그 의무를 떼어놓고 생각해 봤을 때, 저는 지금 마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필연적인 것이라 계산했습니다]
“필연적이다?”
[결국 서로 원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지만 자원과 기회는 한정적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경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려야 합니다. 만약 지구에 게이트를 열고 침공하는 괴물들에게도 목적이 있다면, 그들은 그저 지구의 지배자인 인간들과 경쟁을 펼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의 사견 없이 오직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판단한 루시의 답은 원론적이면서도 정확한 정답 같았다. 이유가 어떻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동안 루시가 이끄는 마왕군에 패배하고 잡아먹히는 수많은 생물들을 보며 느끼고, 점차 격렬해지는 현실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었다.
“그럼 그 현실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루시? 나는 당연히 이 세상이 망하는 걸, 사람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
얼굴을 찌푸린 나는 고개를 떨궜다.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 내가 굉장히 어중간한 상태여서 더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던 시절이라면 다른 이들처럼 불안에 떨며 기도하는 것뿐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저쪽 세상에서 힘을 키워가는 루시에게 힘을 빌려올 수 있으니까.
그 갈등이 계속해서 나를 흔들었다.
[제가...제가 김창현님 당신의 힘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그런 내 중얼거림을 들은 루시가 화면 속에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면 됩니다. 제겐 마왕의 의무도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의무일 뿐입니다. 제가, 당신의 인공지능이 당신을 돕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하늘을 보며 말하는 루시의 표정은 평소같이 조금의 감정도 없는 무표정이 아니었다. 어딘가 다급한 듯 약간 찌푸려져 있는 눈썹, 파르르 떨리는 눈가, 내려가 있는 입꼬리 등등.
여전히 감정이란 것을 이용해먹을 도구로 보는 루시 본인은 자각할지 모르겠지만 육신을 가지게 된 이후 루시는 굉장히 감정이 풍부해졌다.
“...아니, 루시 너는 네 성장에 집중해.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하지만]
“네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도 마찬가지거든.”
쓰게 웃은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루시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 속 갈등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당연히 네 힘을 빌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해야 할 일에 지장이 갈 정도로 끌어쓸 생각은 전혀 없어. 지금 너는 72영주 중 하나를 잡아먹었을 뿐이고, 다른 영주들은 너를 그저 경쟁자를 제거해줄 장치나 도구쯤으로 볼게 뻔해. 우선은 시간을 벌자. 그들이 너를 계속 얕보면서 방치하게 만들자.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나, 둘 잡아먹고 네가 마침내 이 땅의 전체와 싸워도 이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보자.”
우선순위를 잘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배웠다. 그렇기에 나는 루시의 성장이, 지금 내가 처한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루시의 군단이 훗날 보여줄 힘을 상상해 보았다. 끝없이 증식하고 끝없이 싸우며 끝없이 강해지는 하나의 군단.
만약 그 힘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있다면 지금 현실에서 열리는 게이트 따위도 충분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흔들리던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루시 역시 내 말에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가 합리적이라 판단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점령지 둥지화 속도를 더 올리겠습니다]
“정보가 더 필요해. 다른 마계 영주들이 우리를 무시하면서도, 인접 영지를 침략해 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잡아먹을 수 있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
따지고 보면 이제 시작인 셈이다.
집에 도착한 나는 오늘도, 시끌시끌한 세상을 등지고 화면 속 세상에 집중하며 머리를 굴렸다.
***
[점령지 둥지화 52%, 예상되는 잔당소탕률은 78%. 속도가 더 필요합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그의 명령을 받은 루시는 자신이 처음 둥지를 틀었던 미궁에 자리한 거대한 뇌는 물론 수많은 지휘개체들의 뇌까지 동원해 연산력을 극대화 했다.
마왕군 하나가 가있는 곳이 곧 루시의 영역이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조리 알 수 있는 루시는 최대한 빠르게 현황을 파악하고 현장을 조율했다.
그 목적은 패배시킨 고블린들을 정리하고 그 땅을 둥지로 삼는 것이다.
“마왕님. 흩어져서 숨어드는 잔당 소탕은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으로 병력을 더 투입하겠습니다]
고블린들에게 원한을 품은 덕에 구심점을 잃고 흩어진 잔당들을 절멸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유리아는 속력을 올리라는 루시의 명령에 당황했지만 루시는 그곳에 병력을 추가 투입하는 것으로 효율의 균형을 맞췄다.
[비효율을 감수하고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노동병 추가생산]
거기에 둥지화 속도를 가속하기 위해 마수 개미를 베이스로 한 일꾼들을 적정치 이상으로 대량 생산, 양분을 운반하고 요충지 곳곳에 둥지를 만들어 점령한 고블린 영지 대부분을 완전한 마왕군의 영역으로 바꾸고 있었다.
“이놈들...”
물론 고블린 잔당들이 그저 도망만 간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한 무리의 고블린들이 복수와 삶의 터전을 수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마왕군의 둥지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이게 맞는 겁니까? 와, 왕께서도 이겨내지 못한 괴물들입니다!”
“캬악! 그러면 이대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낼 것인가. 이렇게 살아서 다른 영지로 넘어간다 한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겠나. 전투에서 패하고 변변찮은 저항도 못한 채 저런 괴물들에게 땅을 빼앗긴 버러지들에게, 그 어떤 이들도 호의를 보이지 않을 거다.”
“족, 족장..”
“다시는 최하급 마물로 살던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다. 명예와 긍지를 보일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다른 동족들이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고블린 족장 킨ㆍ1차 각성ㆍlv 35]
고블린 왕 안드라스의 측근 중 하나이자 권능을 부여받았던 특별한 고블린 킨, 그는 이를 갈며 지팡이를 쳐들었다.
“무력하게 진 겁쟁이로 남겠느냐. 고블린의 힘을 보여주자. 너희의 모든 것을 걸어라! 저 괴물들은 너희의 원수다!”
그는 사력을 다해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 와중에 원수를 들먹인 것이 나름 효과가 있었다. 곧,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침략자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킨 고블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마왕군의 둥지로 돌격을 시작했다.
‘인정하겠다. 너희는 강적이다. 하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우리가 된다.’
부하들과 함께 돌진하는 킨은 이를 악물었다.
부하들에겐 승리하고 돌아가겠다며 말했지만 안드라스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그는 사실 살아갈 생각은 이미 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들이 죽는다고 상대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미 마계 72영주는 전대 마왕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마왕을 처단하여, 이 마계 전체를 지배하게 된 승자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희생으로 훗날 다른 영주들 사이에서 살아가게 될 고블린들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징그러운 둥지를 전부 불태워라! 큭, 저놈은...!”
양분을 운송하며 일에 열중하고 있던 마왕군 노동병들을 해치며 등장한 그는 단숨에 이곳으로 날아오는 상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갈색 오크를 무려 3번이나 개조한 감마 타입.
고블린들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그들을 상위급이라 불렀다. 강심이라는 일종의 배터리를 통해 무슨 기계마냥 체내에 보유한 마력량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 마왕군 특성상, 어지간한 고블린 기사나 주술사는 상대조차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덤벼라!”
이를 악문 킨은 그럼에도 적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힘을 움직였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함께 끓어오른 자신의 피를 느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놈들에게도 이런 뜨거운 마음이 있느냐.’
지금 가진 이 강렬한 투지와 긍지, 마음이라면 설령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적장 제압]
“...아.”
그러나 찰나의 순간. 그는 자신의 주술을 손쉽게 빗겨낸 상대가 휘두른 검에 외마디 탄식과 함께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쓰러졌다.
물밀 듯이 몰려오는 마왕군에 밀려나는 다른 고블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진 투지와 각오만으로는, 결국 현실적인 출력과 숫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개입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다가 이런 현황들을 을 파악하고 갑자기 급해진 이들은 따로 있었다.
“국경에 도망쳐 오는 고블린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갈색오크, 플라우로스의 군대는 움직였다. 그런데 왜 막는 것이냐. 놈들이 땅과 노예를 더 많이 차지하면 어쩌려고!”
“그 괴물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족장. 조금 기다렸다 움직여도 충분합니다.”
급히 소집된 웨어울프들의 회의에서 급해진 대족장 안드로말리우스는 계속해서 반대하는 늙은 참모 코랄을 흘겨보았으나, 정작 코랄은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해 나갔다.
“괴물들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그 사실을 간과한 오크들은 분명 큰 피해를 볼 것이니, 그들이 조금이라도 괴물들의 숫자를 줄인 이후 움직여도 저희는 이득입니다.”
“으음··· 그건 맞는 말 같은데. 그러다 오크 놈들이 단숨에 저 괴물들을 격파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결코 그럴 일 없습니다.”
그는 단언했다. 나름의 통찰로, 마왕군이 가진 잠재력을 알아본 탓이다.
“다른 놈들의 모든 신경은 대성녀 이벨리아가 일으킨 전쟁에 향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 그렇다면 코랄의 의견대로 갈색오크 놈들의 행동을 기다린다. 그 괴물놈들이 그놈들까지 타격을 입혀 준다면! 흐, 우리에겐 또 다른 기회지.”
탐욕, 끝을 모르는 탐욕이 황금색 동공에서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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