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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44화 (44/200)

44화-자연의 법칙(4)

44화-자연의 법칙(4)

“돌발 게이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야. 갑자기 강의실 안에 게이트가 생겨서, 30분 만에 괴물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거라고. 난이도 자체가 다르잖아.”

“난이도라.”

강의실에서 만난 친구도 소식을 들었는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한탄을 쏟아 냈다. 사실 내가 루시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준 것 뿐이자 주변 다른 사람들, 아니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그 이야기뿐이었다.

가히 게이트가 처음 나타난 그 순간과 맞먹을 정도다. 그만큼 사람들은 미리 대처하는 게 불가능한 돌발 게이트를 극도로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아치던가. 이게 뭐냐고. 이제 겨우 적응해 가는 참에.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마치······ 무슨 악의가 있는 것 같아.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악의. 친구는 진심으로 탄식하며 그렇게 말했다.

끔찍한 괴물들과 그것들을 뱉어 내는 게이트들. 그것들에 우리는 대항할 수 없었다. 그저 그것들이 뱉어 내는 괴물들과 싸울 뿐이다.

내가 루시와 만나지 않았다면, 루시가 보여주는 것들을 알지 못했다면, 나 역시 그저 세상에 휩쓸린 일개 파편이 되어 친구와 마찬가지로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게이트만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각성자들이 있어. 게이트가 악의라면 그것에 대항하는 그들은 뭔데?”

“무, 물론 네 말도 맞지만 각성자들이 전부······. 그러고 보니 그러네. 대체 그들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친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격변은 순수한 악의나 재앙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게이트는 우리에게 위협을, 각성자들은 그것에 맞서며 안전을 가져다준다. 의도가 다분한 ‘그 시스템’을 누군가는 마치 게임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 우린? 아무 힘도 없는 우린 그 게임의 일개 말이야?”

“그렇지.”

쓰게 웃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그 누구도 주연이나 엑스트라가 될 수 없었던 차가운 ‘현실’이, 삽시간에 게이트와 각성자가 주연이 되는 무대가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 휩쓸릴 뿐인 장기말에 불과하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순 없지.’

나는 은근슬쩍 휴대폰을 손으로 쥐었다. 사실 나 역시 그 장기말 중 하나다. 자칫하다간 한 번에 훅 가 버릴 수 있는 장기말.

하지만 지금 내게는, 함께 그 시스템을 부술 수 있는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까.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래요. 그냥 평범한 여성분 같은데요?”

“좋습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엠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발 게이트라는 변종 게이트의 등장으로 뒤집힌 건 한국만이 아니었다.

태평양 건너의 북미 대륙. 이곳 어딘가의 지하 시설에서, 무언가를 주시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한 흑인여성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른 요원과 함께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역시 당신의 힘은······ 현재 이 세상을 덮친 일련의 관련이 없나 봅니다, 가렛 양.”

“검증은 정말 이걸로 끝인가요, 국장님?”

“일단은.”

국장이라 불린 그는 곁에 있던 여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작 가만히 선 자세로 계속해서 온 몸을 주시당하던 그녀, 마리사는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방금 전 자리를 떠난 흑인 여성은 각성자. 그것도 눈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각성자였다. 게다가 그 능력은 각성자나 침략종들의 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미국 정부에 협력하며 자진 신고하지 않는 각성자들을 찾아내는 임무를 부여받은 능력자가 그 힘을 사용했는데도, 마리사는 걸리지 않은 셈이다. 그 말은 곧 마리사가 가진 힘은 시스템에 개입하는 게 가능한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라는 것을 뜻했다.

“여유가 많지 않아요.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라서.”

“정말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곳의 힘을 온전히 이곳에 빌려 올 수 있는 겁니까?”

목에 건 목걸이와 철저한 잠금장치에 연결된 휴대폰을 쥐며, 전쟁을 언급하는 마리사의 말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마도요.”

어느새 휴대폰을 켠 그녀가 건성으로 답했다. 화면 속에 보이는 것은 그녀를 신으로 여기며 그 충실한 신앙심을 반짝이고 있는 그녀의 군대.

그 선봉에 선 대성녀 이벨리아를 중심으로 마리사는 이제 마왕과의 악연을 끊어낸 대륙 전체를 상대로 하여 자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가능만 하다면.”

미 정부가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다른 게 아니었다. 최근 들어 급격히 불안해진 시국 안정을 위해, 게이트 혹은 각성자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세력을 아군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대륙 전체를 통일해야 해. 하지만 이제 겨우 절반 정도. 무엇보다 가장 큰 제국도 남아있어. 남은 것들은 고작 며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데.’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는 마리사는 신중히 현황을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진심으로 이벨리아를 응원하던 때처럼.

“신의 신탁과 빛을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처단할 뿐이다.”

이벨리아는 언제나 전투의 선봉에 서서 자신이 여신으로 모시는 마리사의 명령을 수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얼마나 피를 보든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모습마저 공포에 각인되어, 그 누구도 이벨리아에게 쉽게 덤비지 못했다.

“이러다가 정말로 모든 땅이 교단의 손에 들어가게 되오!”

그러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세력이 하나로 뭉쳤다.

그 중에는 직접 대전쟁을 겪은 베테랑 영웅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끝도 없이 성장해 가는 이벨리아의 세력은 그 존재만으로 구도를 비틀 수 있는 새로운 존재다.

“그러니······ 우리만으로는 이길 수 없소. 하지만 배신하고자 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떠나려는 걸 막을 것이오.”

제국의 황제가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결국 통보를 하고 말았다. 그들에겐 자력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옵니까?”

"대성녀 이벨리아는 또 다른 마왕이오! 자신의 독선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전쟁에 몰아넣은 마왕! 그러니······ 다시 한번 위대한 연합군이 결성될 때지."

분기탱천한 황제의 손짓에 대기하던 마법사가 큼직한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모여든 모두가 주시하는 그 수정구 안, 미리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안녕하신가. 한때 같은 목적을 두고 싸웠던 동지들.”

“마, 마족······!”

“마계 영주 바알!”

수정구 속에서 히죽이며 웃고 있는 보라색 피부의 사내. 현장에 모인 이들은 큼직한 염소의 뿔을 가진 그 사내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졌으며 다른 영주들의 맹주 역할을 하던 마계 영주 바알. 대전쟁 종결 이후 협정에 따라 마계와의 연결이 끊기며 설마 다시 보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이 세상 전부를 자신의 신에게 바치겠다는 대성녀의 말도 안 되는 폭주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 계집이 당신네들을 멸망시키고 그 칼끝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우리는 전처럼 다시 손을 잡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바알은 황제와 미리 합의한 대로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마계 영주들과의 동맹을 제안했다. 대부분이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을 알기에 그 누구 하나 나서서 거부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벨리아의 군대는 움직이고 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군. 동맹에 참여할 영주들을 더 모아 오겠다.”

결국 마계와의 동맹이라는 초유의 선택이 결정되었을 때, 만족스럽게 웃은 바알이 다른 이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겠다며 통신을 종료하려 했다.

“모든 영주들이 참여하는 건 아닌가?”

그것을 붙잡은 게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마계 영주들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에 살짝 놀란 상태였다.

“멍청하고 비루한 놈들이 다수지만, 어쨌든 마계 72 영주는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왕의 지배력이 사라진 이후 더 이상, 우리에게 명령을 강제할 존재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나는 그대가 새로운 마왕이 되는 줄 알았다.”

“······참으로 인간답고, 위험한 소리를 하는군. 마왕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섭리를 거스른 우리가 또 다른 마왕의 등장을 용납할 것 같은가.”

혀를 차며 마계의 사정을 설명해 준 바알은 황제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서 통신은 그대로 종료되었고, 황제와 바알은 텅 비어 버린 투명한 수정구 앞에 서게 되었다.

“······.”

그 상황에서 바알은 멍하니, 계속해서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샛노란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이 빛나고 있다.

“아직도 마왕의 흔적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느냐.”

“모든 영주들이 불을 켜고 영지를 수색하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블린들이, 안드라스가 망했다고 들었다. 괴이한 마수들의 습격으로.”

“그렇습니다.”

천천히 입을 연 바알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몇 가지 사실들을 재확인했다. 안드라스가 다스리던 고블린 영지가 망했다는 소식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주변 영주들이 나서면 금방 진압될 것이다. 오히려 좋다. 그런 신종 마물들이 변방에서 이목을 끄는 사이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그렇게 된다면······.’

바알에게 고블린들을 무너뜨린 괴물들은 그저 한 줌의 짐승들로 보일 뿐이다. 고블린들을 멸망시켰든 어쩌든 자신의 세력에 비하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으며, 오히려 다른 영주들을 견제할 하나의 카드로 생각할 정도였다.

‘마왕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좋다. 그렇게 숨어서, 미천한 벌레가 되어 쥐죽은 듯 지내라, 메이아. 무능한 네년의 뒤를 이을 새로운 마왕의 등극을 보며 땅을 치고 후회하라.’

슬며시 웃은 그는 목에 건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 끝에 달린 보석은 마왕의 상징, 마정.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 보석을, 그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얼버무리긴 했지만, 제국의 황제가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끓어오르는 탐욕은 바알에게 스스로 마왕이 되어 이 마계를 지배하라는 욕망을 계속해서 불어넣었다.

“이벨리아와 싸울 병력을 차출해라. 다른 영주들에게도 통보해라. 이것은 마계 전체의 운명이 달린 또 다른 혁명이라고.”

바알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다른 영주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 지금 그 마정을 빛내고 있는 진짜 마왕은 결코 숨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다는 것을.

[거점은 내어 줄 생각이지만 오크들과의 전투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 전투를 벌입니다. 전군 돌격.]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이 마계의 변방에서는 마왕군과 오크군이 지정된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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