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자연의 법칙(9)
49화-자연의 법칙(9)
“저 놈이 오크들의 대장군.”
마왕군 다수가 전장을 우회하여 점령지를 방어하느라 비어 있던 오크들의 영지를 공격하던 그 시점.
날개를 편 유리아는 루시의 명령대로, 점령지에서 다수의 오크들을 지휘하고 있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이곳까지 빠르게 날아왔다.
게다가 각종 날짐승들의 데이터를 사용해 개조된 그녀의 눈은, 세로로 갈라지며 이 높은 하늘 위에서도 지상을 훤히 살피는 게 가능했다. 그 눈을 통해 현재 보는 것은, 수많은 오크들 한가운데에서 당황했는지 허둥거리고 있는 덩치 큰 오크 하나.
그들이 왜 당황하고 있는지 유리아는 안다. 모든 상황을 실시간을 조율하고 있는 루시가 다른 현장의 상황을 그대로 알려 줄 수 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방어만 하던 고블린들과는 달리 그들은 우리를 먼저 공격하다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본진 방어를 위해 일부 병력을 뒤로 빼려 합니다. 더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그것을 저지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전장을 확대하고 단숨에 상대의 본진까지 세력을 뻗친 루시는 유리아에게 그들을 방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유리아는 기꺼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렇게 죽어라, 마족들아.’
입꼬리를 비튼 유리아의 눈빛이 번득였다. 자신을 배신한 것은 인간들이지만, 마족들 역시 그녀의 삶과 터전을 위협하던 원수들. 특히나 자신을 배신한 이들처럼 같은 편을 배신하고 호의호식하는 현 마계 영주들은 유리아의 입장에선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세력이다.
지금은 비록 루시가 주는 힘에 더 취해 있다지만, 한때 끝까지 추락했었던 유리아의 본질은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
그녀는 지금 그 증오를 마음껏 뿜어낼 기회를 받았다.
“하늘! 하늘이다!”
“아니다. 지상에서도 온다!”
그녀가 급강하하니 그녀를 발견한 오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 혼자 움직일 리가 없다. 마왕군이 전방위적으로 쳐들어와 본인들의 땅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한 점령지의 오크들은, 시간을 끌기 위해 투입되는 마왕군이 몰려오는 광경에 크게 당황했다.
“어차피 급한 건 저놈들이다.”
마왕군은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오크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하는 건 아직 비효율적. 점령지 밖으로 나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오크들을 상대로 역으로 함정을 파고 대기하며 기회만 노렸다.
자신들의 땅인 줄 알았던 점령지가 순식간에 자신들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 버린 순간이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유리아는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온갖 종류의 마법을 폭사했다.
인간의 두뇌와 신경을 가지고는 불가능한 경지와 구조의 마법. 거기다 인공적으로 장착이 가능한 마력의 심장 강심이 서로 빛나며 공명한다.
이 강심은 이제 마왕군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저것은 대체······.”
이제 그것의 의미를 어느 정도 학습하게 된 오크들은 검은 피막에 덮인 큼직한 날개를 펼친 채 하늘 위에 떠서 빛나는 그녀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주춤거렸다.
“이건 우리를 잡아 두려는 속셈이다. 자랑스러운 전사이면서, 고작 저런 놈들에게 겁먹는 것이냐.”
[오크 대장군 나르·1차 각성·lv 65]
그런 상황에서 결국 그가 나섰다. 오크 대장군 나르, 이벨리아에게 성장의 권능을 받아 대전쟁에도 참여했던 그는 직접 도끼를 들고 선두에 섰다.
유리아가 폭사한 뇌전 마법을 도끼를 휘둘러 뿜어낸 풍압으로 가뿐히 밀어낸 그가 콧김을 뿜으며 자신의 병사들을 지켰다.
“저 날짐승은 내가 막겠다. 그사이 본대는 놈들의 덫을 돌파하고 돌아간다. 점령지보다는 본국이 우선이다.”
나름 좋은 식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시선을 끈다는 유리아의 의도를 간파하고 최대한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희생을 감수하고, 기껏 점령한 땅들도 다 내어놓고 일단 집을 지키러 가겠다는 것이다.
“역시 지금의 제 수준으로 완전히 틀어막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역시 놈들이 전력을 쏟는다면 완전히 가로막는 것은 불가능.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이득입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한 것은 상대니까.]
아직 초기 단계인 강심으로 레벨을 올린 강적을 유리아가 단신으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루시는 그 움직임을 보고 자신의 승률을 더 높여서 계산했다.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오크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 얻는 게 단 하나도 없으니까. 반면 루시는 적들의 기반 시설에 타격을 주고 양성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병력 숫자를 줄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생산성과 병력 보충에서 오크들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유전자 단위부터 설정된 마왕군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는 섣부르게 선공을 걸었던 갈색 오크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놈들은 단순한 벌레 집단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갈색오크 왕 플라우로스. 그는 신하들을 모아 놓은 자신의 궁전에서 역정을 내며 몸을 떨었다. 출정식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 보고들에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마치 질척거리는 거대한 늪에 빠지는 것처럼, 쉬울 줄 알았던 마왕군과의 전쟁은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었다.
“서, 서쪽 영지 전체에서 놈들의 난장판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물론 여기 그 누구도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해 보았느냐!? 놈들은, 놈들은 괴물, 괴물이다!”
말을 더듬던 플라우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왕군을 정의할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다. 자신들과 같은 지성체라 보기엔 너무나 야만적이고 원초적이지만 그렇다고 원시 마수 집단이라 보기엔 너무나 지능적이고 계산적이었다.
결국 플라우로스는 마왕군을 ‘괴물’이라고 칭했다. 대전쟁 시절, 인간들에게 괴물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마족마저 혀를 내두를 만큼 악독하고 지독하다.
“진정하십시오, 대왕. 지금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던 대장군이 돌아오고 있을 겁니다.”
“돌아오면, 그걸로 끝인가? 우리가 처음 파악했던 것과 지금 놈들의 규모와 수준을 생각해보라.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강해졌다!”
그가 제일 놀란 것은 마왕군의 전술이나 전투력이 아니었다. 고블린 영지를 제압한 시점과 비교했을 때, 그 영지를 모조리 파먹으며 급격하게 덩치를 불려 가는 지금의 마왕군은 그 짧은 시간에 몇 배 이상 성장했다. 그는 상식을 파괴하는 그 성장력이 가장 두려웠다.
“당장 주변 영지에 연락을 보내라. 특히 아직까지도 간만 보고 있는 멍청한 개대가리에게! 이건 마계 영주 전체가 뭉쳐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래도 플라우로스는 안드라스보다는 조금 더 빨랐다. 저항할 힘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주변 영주들과 손을 잡아, 마왕군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을 만큼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놈도 웃기는 놈이로군.”
문제는 직접 당해 보지 않은 다른 영주들은 오히려 그런 그를 비웃고 무시하기 시작한 점이다.
“함께 손을 잡아야만 그 괴물 놈들을 물리칠 수 있다? 혼자 안드라스의 땅과 자원, 노예를 독점하고 싶어서 먼저 쳐들어간 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웨어울프 대족장 안드로말리우스. 그는 플라우로스가 급히 보낸 연락을 받고 마치 고블린 왕이 보낸 연락을 받았을 때처럼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나에게만 이런 연락을 보낸 게 아니라 들었다.”
“그렇습니다. 듣자니 주변 영지 전체에 이런 연락을 돌린 것 같습니다.”
“멍청한 놈. 지금 대다수의 관심은 이런 변경 따위에 전혀 없단 말이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마계 영주 중 하나인 바알이 인간 제국의 황제와 손을 잡으며 과거, 마왕군과 싸울 때처럼 마계 영주들을 다시 소집했다.
모든 영주 전체가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영주들이 현재 인간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중이다.
“웃기기는 하는군. 인간들과 편을 먹고 인간들을 공격하게 되다니. 결국 마왕군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나저나 전쟁을 통해 얻을 게 있다면 다른 영주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흐하핫!”
그는 경쟁에 미쳐 전쟁을 통한 전리품으로 자신의 영지를 강화할 생각뿐인 각 영주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의 예상대로 플라우로스는 괜히 욕심을 부렸다가 고전하는 중이다. 이럴 때 우리가 그 원시 마수들을 공격해서 몰아낸다면 영지 하나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겠지.”
오히려 남들이 힘들게 전쟁을 벌여 전리품을 획득하는 이 틈을 타 현재 루시가 지휘하는 마왕군이 점령한 옛 고블린 영지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족장, 갈색오크 왕이 괜히 주변 영주들까지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영지를 역으로 침입해서 난동을 부린 것도 그렇고, 저희 혼자 들어갔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가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독단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다. 멍청한 오크들이 어떻게든 버티는 동안 그걸 이용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양면에서 그 벌레 놈들을 공격할 수 있다.”
반대 의견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는 오히려 능숙하게 반론하며 그 의견을 넘겨버렸다. 실제로 그 말대로 상황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크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족히 수십만 이상의 군세가 그쪽에 묶여있다.
설령 상대가 아무리 미지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자신이 새롭게 옆을 공격한다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근거였다.
‘과연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반대 의견을 내본 참모 코랄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논리는 안드로말리우스가 이겼지만, 코랄은 어째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냥 넘기기에는 등장 이후 이 짧은 시간 동안 상대가 보여 준 기묘함이 너무 많았다.
***
[······주시하고 있던 웨어울프 영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데이터가 없다면 사고 자체가 멈춰 버리는 경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루시가 강박증 수준으로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는 데이터 수집, 즉 정찰이다.
계속해서 개량하고 발달시키는 정찰망은 이미 이 일대 전체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수준. 상대는 평범한 벌레나 날짐승 등의 모습으로 의태한 마왕군 정찰병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정보를 루시에게 넘겼다.
그리고 지금 그 감시망에 눈치만 보고 있던 웨어울프 군단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리 설정한 계획대로 대응.]
루시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상황 역시 미리 세워 둔 수많은 가설 중 하나에 속하니까.
그저 차분하고 계획적으로 자신의 병사들을 움직일 뿐이었다.
[반드시 승리하여, 목표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루시의 마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살짝 달랐다. 분노, 슬픔, 기쁨 등 그동안 보였단 단편적인 감정들과도 살짝 달랐다.
[반드시.]
지금 이 마음은 강렬한 열망 혹은 욕망에 가까웠다.
욕망이란 그저 상대를 보조하는 비서 인공지능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마치 이지연과 함께 싸운다는 소리에 순간 끌어 올랐던 질투와 비슷한 결이었다.
던전에 들어갔었던 그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앞으로는 자신과 함께 싸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루시는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일. 그러나 막상 그 생각을 알자마자 그때를 기점으로 욕망이 폭발한 것이다.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제 단순히 휴대폰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욕망의 크기도 정도도 커졌다.
다만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자신의 성장, 그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양분과 전쟁. 그렇기에 루시는 자신을 방해하는 이들은 모조리 잡아 죽여 양분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이룰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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