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새로운 질서(1)
51화-새로운 질서(1)
더 많은 양분과 더 많은 데이터. 루시가 원하는 것은 결국 그 두가지이고 마왕군은 그 두가지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진화하며, 그것이 곧 존재의의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숫자나 개조 및 합성등에 가려져 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마왕군은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살아남는 자가 승리합니다]
루시는 그것마저 자신있었다. 오랜 역사와 근본을 가지고 있을수록 변하기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신ㆍ마왕군은 애초에 그 근본이란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집단.
이것저것 가져와서 적응하고 변화하며 달라지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오크들과의 전투로 접하게 된 그들의 기술을 고스란히 습득해서 사용하는 것 역시 그 변화중 하나였다.
[웨어울프들이 본인들의 근접전에 밀리지 않는 아군의 전력에 당황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뭉치기 전에 최대한 각개격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갈색 오크들과의 전투로 그들의 기술을 배웠다면, 늑대들과의 전투에서도 얻는 게 있겠는데."
[수집한 수많은 움직임을 카피하고 패턴을 분석해서 그들이 어떤 것을 학습해 사용하는지 유추, 그것을 아군에게 학습시키고 반복시켜 개량하는 프로세스는 이미 오크들과의 전투로 완전히 안착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그의 질문에 루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학습, 그중에서도 반복학습은 루시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 이미 오크들과의 전투로 일종의 학습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 놨으니 남은 건 그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것 뿐이다.
웨어울프들의 전투법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철저하게 분석되고 학습된 이상 그것을 상대하는 것 역시 더 수월해진다.
실제로 웨어울프들은 자신들의 공격을 마치 미리 읽고 있다는 듯 완벽하게 받아치는 마왕군의 반격에 크게 당황했다.
[비록 그들과 신체 구조가 펀이한 마수형 병사들에게는 적용이 힘들지만, 어쨌든 근접전 승률은 전투를 반복할수록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대로 끝인가? 전쟁은 우리의 승리인가?"
[아직입니다. 아직 그들은 가진 게 남았고, 우리는 배울 것이 남았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루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 배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밀리기 시작한 웨어울프들은, 급한대로 자신들의 비기를 꺼내들어 대항했다.
"야성을 해방해라. 저 건방진 벌레들에게 파멸을!"
웨어울프 부대와 마왕군이 수천 단위로 뒤섞여 싸우게 된 전장. 그 와중에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든 웨어울프 지휘관 하나가 으르렁거리며 포효했다.
그 포효가 일종의 신호였다. 필사적으로 싸우던 웨어울프들이 일제히 울부짖으며 안광을 번득이더니 더욱 강해진 힘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이것은 우리 종족에 내려오는 신성한 가호다. 네놈들 따위는 흉내 내지도 못할 것이란 말이다!"
끓어오르는 야성에 웃기 시작한 지휘관은 폭주하는 병사들이 조금의 감정도 망설임도 없이 덤벼들던 저 껄끄러운 적들을 상대로 과격하게 덤벼드는 장면을 만족스럽게 보았다.
이 광폭화는 이 거친 마계에서 늑대인간의 입지를 보장하던,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술이었고 자신들만 쓸 수 있는 신성한 것이니까.
[광폭화. 체내의 마력을 의도적으로 폭주시켜 이성을 잃는 대신 신경계를 비롯한 육체를 자극해 순간적으로 한계를 넘어선 근력과 감각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웨어울프의 신체 데이터를 계급과 일족별로 세세하게 확보하기 시작했던 루시는 금방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그럼 그것도 학습했어?"
[마력을 자극하는 전문적인 신체 기관이 그들의 체내에 작게 존재합니다. 덕분에 해당 기관이 없는 기존의 병사들로 지금 당장은 재연 불가능. 하지만 해당 기관의 데이터를 추출하는데 성공했고 이식하는 것 역시 성공한 개체들이 지금 출격합니다]
루시는 웨어울프 본인들조차 지금껏 모르고 있는 그들의 유전데이터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저 신성한 가호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던 그 비밀의 구조와 원리를 상세히 밝혀내는 것도 성공했다.
그러니 그것을 역으로,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저놈들은 뭐지?"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웨어울프 전사 하나가 뜨거운 숨을 토하며 저 앞을 바라보았다.
기껏 하나를 베어 죽였는데도 새로운 적들이 계속해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다. 이길 수 있다. 우리에게 이 신성한 가호가 깃든 한!'
그는 이를 악물고 근육의 한계까지 몸을 움직였다.
광폭화를 발동한 이후 그 부작용으로 너무나 흥분해 명령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적어도 눈앞의 적들을 때려 죽여야 함은 알고 있었으니까.
"크아악! 죽어라!"
폭주한 그는 새롭게 전장에 난입한 적들을 향해서도 피 묻은 검을 자신만만하게 내리쳤다.
뜨거운 분노를 실은 강공이 바람을 가르며 충격파를 터트렸다.
"...!?"
하지만 그 검은 상대의 검에 막혔다. 사실 공격이 실패하는 건 그리 놀랄 게 아니지만 그는 폭주하는 와중에도 크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웨어울프ㆍ베타]
새롭게 난입한 이들은 기존에 있었던 오크형 병사들과 생김새가 달랐다.
곧게 선 허리와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을 가신 오크형 병사들과는 달리, 보다 억세고 두꺼운 갑주를 가졌으며 몸도 더 육중했다.
[광폭화]
그리고 생김새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알파에서 육체적인 개조만 거친 베타급인데도 강심을 하나씩 몸에 지니고 있는 그들은, 마왕군 내에서 새롭게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신체기관을 몸 내부에 하나씩 달고 있었다.
"이건 설마...!"
가슴팍에 박혀 있는 강심을 빛내며 급변한 웨어울프ㆍ베타의 기세에 경악한 그가 비틀거렸다.
일족의 신성한 가호인 줄 알았던 광폭화가 지금 정확히 정체도 모를 적에게서 시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체별로 차이가 있는 웨어울프들과는 달리 마왕군의 광폭화는 오차 없이 정확하고 균일하며, 무엇보다 이성을 잃고 폭주할 일도 없었다.
[예상승률 상향조정]
웨어울프ㆍ베타의 검이 그 목을 단칼에 쳐버리는 순간. 루시는 승률을 또다시 상향조정했다.
광폭화라는 무기마저 마왕군에 고스란히 빼앗긴 웨어울프들은 속절 없이 무너져 내렸다. 방어전으로 전환한 오크들과는 달리 병사들을 모아서 싸우려다 그대로 당하고 궤멸당한 것이다.
"괴물...이놈들은 진짜 괴물이다!"
"후퇴하라. 지금은 이길 수 없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대의 능력에 대한 공포가 단숨에 늑대들의 진영을 덮쳤다. 그렇게 두려움을 품은 순간 광폭화는 힘을 잃었고, 그들의 전의는 완전히 꺾여버렸다.
덕분에 오크들보다도 더 빠르게 무너진 늑대들은 사방에서 덮쳐오는 마왕군에게 하나 둘 쓸려가며 단숨에 영지 경계선까지 역으로 밀려나갔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고차원적인 차원간 이동 마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다는 뜻...]
배우고, 성장하고, 진화하여 또 다시 전쟁을 승리로 끝낸 루시가 처참한 전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인공지능 루시는 그 무엇이든 배운다. 상대의 모습, 기술, 신체구조 그 무엇이든. 심지어 그것엔 감정마저 마찬가지이며 감정 그 이상의 것도 포함된다.
탐욕이라는 강렬한 욕망이 그것 중 하나였다. 마계의 마족들이든, 유리아든, 혹은 '그'든 지금껏 루시가 접해 온 이들이 보여준 그 욕망.
지금 이 순간 루시의 마음에 모든 것을 먹어치우겠다는 그 탐욕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넘실거렸다. 그리고 갈수록 구체적으로 변해가는 그 욕망의 목적은 단 하나다.
먹고, 배우고, 진화하여 그의 곁으로 가겠다는 일념. 이제 배신자를 처단한다는 기계적인 의무는 뒤로 밀린지 오래다. 루시가 마계 영주들을 처단하려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들을 양분삼아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이긴 거 맞지? 늑대들이 도망치고 있어."
다만 지금 함께 화면을 통해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그는 이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다. 지금 루시는 자신의 욕망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중이니까.
함께 싸우자는 것은 그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루시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숨겼다. 본인 스스로도 이 욕망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탓이었다.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루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유리아는 그런 격한 감정의 동요를 눈치챘다.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계획은 수정 없이 계속됩니다]
"오크들에 대한 반격...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고개를 저어 여운을 털어버린 유리아가 루시에게 간청했다. 점령지에 갖혀있던 오크들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기회를 달라는 소리였다.
[오크들을 상대하며 근접전에 대한 실마리와 숙련도를, 그것을 이용해 웨어울프들을 상대하며 광폭화와 숙련도를 얻었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다시 한번 써서 오크들을 몰아낼 때입니다]
루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새롭게 생겨나는 변수들에 맞춰 실시간으로 전술을 수정했다. 웨어울프들을 상대로 광폭화의 전투력을 증명했으니, 이제는 그것을 이용해 오크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급한대로 기존의 오크ㆍ베타와 오크ㆍ감마 일부를 개조하여 광폭화가 가능하게 조정했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이끌고 돌아가고 있는 오크 본대를 공격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아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객관적인 전력분석으로 유리아가 작전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확인했으니까. 무능한 지도자라면 한번의 실수로 책임을 물어 인재를 내치겠지만, 설령 감정을 익힌다 해도 루시에게 감정으로 비롯된 비효율적인 일처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
그것을 유리아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양날의 검이다. 만약 계산상 자신의 존재 혹은 투자가치가 비효율이라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쳐내버릴 것이 루시라는 존재.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유리아는 스스로 헌신하며 증명해야 했다.
[예상되는 기대 승률은 45%입니다]
"...이번엔 더 잘하겠습니다."
루시는 전투 직전 가장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리아의 승률을 계산하여 45%라는 애매한 답을 내었다.
그러자 저 앞에 수많은 오크군을 보게 된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극복하겠다 다짐했다. 분명 루시의 계산은 데이터가 많을수록 정확도가 급격히 올라갔지만, 유리아는 애초에 계산이 전부라 믿지 않았으니까.
'기적.'
유리아는 계산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힘을 믿었다. 본인이 루시를 만나 살아난 그것처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