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새로운 질서(3)
53화-새로운 질서(3)
"...으윽?"
[몸을 수복하는 중이니 걱정 마시길. 현재 78% 복원]
유리아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분명 마지막 일격을 날렸던 전장이 아닌 마왕군의 생산장에서 눈을 떴다.
'죽지 않았다. 역시.'
그녀는 느껴지는 감각들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몸 대부분이 조각나고 끊어질 일격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사실 그녀는 머리만 파괴되지 않는다면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왕군 병사들이 나노를 이용해 얼마나 극적인 재생이 가능한지 줄곧 봐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예상이 있었다고 해도,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적을 방심시켜 일격을 먹인 사실은 분명하다.
"전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유리아. 제가 계산하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하는 기적을]
자신이 쓰러진 이후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유리아에게 루시는 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결과적으로는 마왕군의 승리.
허무하게 대장군이 전투 불능에 빠져버린 갈색 오크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어 끝내 수많은 희생자를 두고 쫓기듯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다.
[현재 아군이 그대로 적들의 영역에 밀고 들어가 승기를 굳히고 전선을 확대하는 중입니다. 웨어울프들의 영지에도 마찬가지로 254,379기의 병력을 투입하여 전선을 확대, 전쟁의 고착화를 진행중입니다]
루시가 이끄는 마왕군은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곧 효율적이라면 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그 몸을 던져 넣을 수 있다.
오크들도, 웨어울프들도 생전 처음 맞아보는 이 과격한 방식의 전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이 깔보던 고블린들처럼 루시의 한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깔린 것이다.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전..."
[앞으로 26시간이면 당신의 몸은 완전히 수복됩니다. 그 이후 당신을 오크들과의 전선에 투입할 생각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증명까지 해보인 유리아는 더 싸우게 해달라고 의욕을 부렸다. 물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시는 이미 그녀를 쓸 계획을 다 세워놓았다.
전력을 놀리고 있는 것이 곧 비효율이니까.
[하지만...그분께선 당신에게 휴식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마, 마신께서 말입니까?"
그러나 루시보다도 위에 있는 존재가 그것을 막았다.
유리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해 입을 벙긋거렸다.
"유리아가 깨어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몸을 던졌고, 그 전술이 먹혀들어 이길 가능성이 없었던 적을 제압했어. 얼마나 들뜨고 얼떨떨할까. 하지만 내 생각에 그녀에겐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
유리아가 쓰러지고 그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나노를 보충할 수 있는 생산장으로 옮겨졌을 때.
그는 루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리아의 몸은 전신 나노로 이루어진 완벽한 육신.
피로 따위 양분공급으로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으니까.
[정신적인 휴식 말입니까?]
하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아직 인간의 정신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는 루시가 할 말이 없었다.
"나도 확실히는 몰라. 나는 심리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래도 같은 사람으로서 생각해 보건데, 지금의 유리아처럼 증오와 분노만으로 앞만 보고 달린다면 분명 망가질 게 뻔해."
그는 유리아의 모습을 보고 어딘가 몰려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지금은 비록 마왕군의 최상위급 개체이자 간부라지만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가, 인간과는 판이한 마왕군 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문제 없을리는 만무.
그것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저는 데이터가 없어 잘 모르니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이참에 그녀에게 이거라도 전해줘.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은데."
그는 지시에 따르겠다는 루시에게 무언가를 전송해 주었다.
루시는 말없이 땅에 떨어진 그것을 받았다. 책, 큐브, 인형 등등. 그가 나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물건들이었다.
[역시 당신께선...'인간'을 원하십니까]
루시는 그것들을 보며 그가 듣지 못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유리아를 걱정하며 휴식을 명령하고 선물까지 쥐어준 이유는 하나였고 루시는 그것을 간파했다. 바로 인간성의 유지.
루시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그가 본능적으로 본인과 같은 인간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되겠습니다. 제가 인간의 모든 것을 배워 당신이 원하는 인간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시는 절망하지 않았다. 루시는 무에서 유를 일구는 탐욕의 마왕. 모든 것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가 인간을 원한다면 자신이 인간이 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건 네 거야 루시."
그때 그가 루시에게 무언가 하나를 더 보내주었다.
"지금 당장은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양분이나 표본을 보내줄 수 없어. 그래서 그냥 내 방식대로 상을 주는 거야."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가 루시에게 보내준 것은 작은 인형에 불과하다. 그저 적들과 잘 싸워 준 루시에게 나름의 칭찬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비효율적인 선물인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괴물의 손으로 멍하니 그 인형을 들고 있던 루시는 화들짝 놀라 허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연결을 활성화시켜 처음 무언가를 교환하게 되었을 때. 그때 시험 삼아 넣어 준 또 다른 인형을 가장 깊은 둥지에 아직까지도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인간으로 치면 아직 어린아이. 하지만 나는 루시에게 배운 게 많아.'
그는 만족해하는 루시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서로 실제로 만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이미 두 존재는 그 어느 존재보다도 단단하고 깊게 엮여가고 있었다.
자아를 각성하고 키워가는 루시에게 그는 자신의 기원이자 부모이고 스승이며 세상, 그에게 루시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든든한 아군이자 희망의 빛.
[유리아가 부재해도 아군의 전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으로 화제를 돌렸다.
결국 갈색 오크들과 웨어울프들이 종족의 존망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는 이 전쟁도 루시에게는 목적을 위한 일개 과정에 불과했다.
***
"모두 피해라!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짐은 버려라. 일단 대피하는 게 먼저다!"
영지 중심부에 위치한 한 갈색 오크 부락. 영지 중심부에 있기에 언제나 평화로워야 할 이곳은 지금 뒤집어진 상태다.
그 누구도 오늘 같은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일은 엄연한 현실이다.
'과연 이것이 요새로 대피한다고 해결될 일인가? 한평생 요새 안에 갇혀 살 순 없지 않은가.'
대피하는 부락민들을 보는 족장의 얼굴이 굳었다. 요새로 대피하고 전투를 준비하는 것,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늘 해오던 대로 행동하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지금 발생한 건 전쟁이 맞았다. 그러나 영지를 침략한 마왕군은 단순히 침략해 온 외국의 적군 따위가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삶의 터전을 초토화 시키는 마왕군은 이미 이 일대에서 하나의 생물 계층이 되었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요새에 숨어 저항하는 것은 마치 숲 속의 산짐승을 상대로 성에 숨어 저항하는 것.
즉 처음부터 높고 긴 장벽을 지어 마왕군의 유입 자체를 차단한 게 아닌 이상 아무 의미 없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요새에 숨어 저항한다면 마왕군은 굳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일대를 먹어치우고 그들을 고립시킬 것이 뻔했다.
"족장!"
"저놈들이...!"
다만 족장은 그 이상 복잡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의 주력군을 붕괴시키고 영지 내부까지 침투한 마왕군은 마치 산짐승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처럼, 가리지 않고 사방을 공격하며 그들이 왕 플라우로스를 중심으로 제대로 병사를 모아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우리의 가장 강한 전사 몰그."
전사 하나가 결연한 표정으로 뒤에 남아 시간을 벌겠다고 자청했다. 탄식한 족장은 차마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조상신이 자랑스러운 그대를 도울 것이다."
결국 족장을 비롯해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행운과 축복을 빌어주는 것뿐이었다.
"가자! 저 짐승놈들에게서 마을을 지켜야 한다!"
전사 몰그는 약간의 동료들과 함께 각오를 다지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망설임을 억누를 수 있는 사명감과 숭고함이 있었다.
'갈색 오크의 힘을 보여주겠다.'
몰그의 눈이 번득였다. 혈기 넘치는 전사의 피가 마력을 가득 담은 도끼에 베여나가는 마왕군 병사들을 보며 끓어올랐다.
위기의 순간 등장하는 영웅의 빛. 그 편린이 그에게서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몰그! 저길 보게!"
독기 섞인 마왕군의 피를 뒤집어쓰고 콜록거리던 동료 중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킨 것이 그때였다.
몰그는 그곳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었다.
[웨어울프ㆍ감마]
달려오고 있는 적은 기존의 마수형 병사들과는 달랐다. 몸 곳곳에 박혀있는 강심을 빛내며 손에는 큼직한 대검을 빗겨든 괴물.
몰그도 저것이 적들의 지휘개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놈을 잡아야 한다!'
그는 반사적으로 적을 향해 뛰었다. 상대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이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기세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뜨거운 피는 지금이 최상의 컨디션임을 나타내는 지표였고 이미 여럿의 마왕군을 베어내며 자신감도 충만했다.
"우리는 꺾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 사악한 침략자에 맞서 동족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폭화]
"죽어라!"
광폭화를 발동시키며 순간 힘을 폭발시키는 웨어울프ㆍ감마의 검과 몰그의 도끼가 서로 충돌했다. 울려 퍼지는 굉음과 충격파. 그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의 승산을 점칠 정도였다.
"몰그!"
'...어?'
하지만 그 직후.
그는 자신을 부르는 동료들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의지와는 달리 움직이지 않는 몸과 빙글빙글 도는 자신의 시야에도 당황했다.
'어째서...'
사지가 3조각이 나버린 몰그의 머리는 상반신 일부와 함께 바닥에 철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일격살 해버린 웨어울프ㆍ감마가 다른 동료들 역시 가차없이 척살하는 모습.
뜨거운 피는 단숨에 식어버렸다. 그의 마음과 힘은, 정말로 기적을 일으키기에는 한없이 역부족이었다. 마왕군은 기본적으로 승산 없는 비효율적인 싸움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하라!"
몰그의 죽음은 사소한 하나의 죽음에 불과했지만 그런 죽음이 영지 전역에서 수 백, 수 천 이상 발생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갈색 오크왕 플라우로스에게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영주들이 협조하지 않겠다면! 협조해줄 이들을 하나하나 불러 모을 수밖에!"
분노한 그는 다시 한 번 사방에 연락을 돌렸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거나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영주들에게 돌리는 연락은 아니었다.
영주들의 지배하에 있지만 나름 자율적인 행동이 가능한 이들. 그런 이들을 용병으로 부리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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