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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54화 (54/200)

54화-새로운 질서(4)

54화-새로운 질서(4)

"왕이시여. 조금 특별한 놈을 찾았습니다. 그놈이 직접 왕을 뵙고 싶다 합니다."

"어떤 놈이냐."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저 아군이 패퇴했다, 땅을 빼앗겼다 같은 절망적인 소식들 뿐. 그런 와중에 눈에 보이게 수척해진 플라우로스에게, 신하 하나가 다른 소식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 신하는 플라우로스의 명령을 받들어 다른 영지에서 싸우길 희망하는 용병들과 접촉하고 그들을 데려오는 일을 맡고 있던 책임자.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플라우로스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무엇보다 마계 영주란 일개 용병 따위가 만나고자 한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어둠 오크족의 강령술사입니다."

"...강령술사?"

다만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그의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강령술사는 영혼과 악령을 다루는 주술사. 그런 존재가 왜 자신을 보자고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떠들어 보라 하라."

잠시 고민한 그는 제안을 수락했다. 파격적이긴 하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지금 그들은 사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무슨 수를 써보든 시도는 해야 했다.

곧 가라앉은 갈색 오크들의 궁전에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존재 하나가 검은 로브를 두르고 당당히 걸어 플라우로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늘진 보라색 피부 속에서, 황금색 눈이 번득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기다 왕이시여. 가이샨이라 합니다. 오크종에 영광을."

"하나의 오크도 이제 옛말이지. 너와 같은 어둠 오크의 왕 아몬 때문에. 이제 헛소리 하지 말고 본론을 말하라. 계속해서 헛소리를 한다면 처형하겠다."

"급하신 건 이해합니다."

보라색 피부를 가진 오크, 가이샨은 날이 서 있는 플라우로스의 말에 쓰게 웃었다. 속내를 숨기고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할 왕이 그럴 여유조차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본론은 간단합니다. 제게 정예 병력을 붙여주십시오. 제 뛰어난 영안에는 영지를 습격한 검은 벌레들의 비밀이 낱낱이 보이고 있으니, 놈들을 무력화 시켜 몰아내겠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플라우로스는 자신이 적들의 비밀을 안다는 가이샨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눈이 커졌다. 강령술사는 땅의 주술밖에 다루지 못하는 갈색 오크들은 가질 수 없는 존재. 그 말의 진위를 이 자리에서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왕이시여. 저는 그동안 영지 내부에서 돌아다니며 그 괴물들을 접하고,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보았습니다. 영지를 습격한 저 괴물들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언데드란 말이냐?!"

"...언데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뭔가, 뭔가 더 복잡하고 차가운."

가이샨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이해한 사실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옮기는데 버벅거림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능력을 가진 강령술사인 그는 적들이 보통 존재가 아님을 알아챘다. 그가 산ㆍ마왕군에게서 영혼대신 본 것은 다름 아닌 루시가 심어놓은 명령체계와 그것을 조작하는 일종의 통신망.

하지만 인공지능인 루시가 설계한 그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인 명령어와 프로그램으로 짜여있다.

그 개념을 모르는 가이샨이 보기에 신ㆍ마왕군은 단연코 이질적이고 기괴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외부에서 흘러온 심연의 존재들이 분명합니다 왕이시여. 이 세상과 다른, 끔찍하고 어두운 곳에서 이 세상을 침식하고 파먹기 위해 찾아 온 괴물들입니다."

"그런 놈들을 함께 잡자고 해도 무시한 것이 다른 영주들이다!"

마른침을 삼킨 가이샨의 대답을 들은 플라우로스가 분노하여 옥좌의 손잡이를 주먹으로 탕! 내리쳤다.

자신의 호소를 무관심으로 일관한 다른 마계 영주들의 태도가 생각난 탓이다. 물론 자신이 고블린 왕 안드라스를 무시했던 사실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런데 일개 강령술사인 네가 혼자서 어떻게 그놈들을 상대하겠단 것이냐."

"놈들에겐 지휘개체가 있습니다. 그 지휘개체와의 연결을 통해 다수의 병사들이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그 연결을 끊을 수 있다면."

흥분을 가라앉힌 플라우로스의 말에 가이샨은 확신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본 것이 있으니 이렇게 한달음에 플라우로스를 찾아 온 것이다.

"좋다. 가서 증명해 보아라. 사실이라면 여지껏 없었던 큰 상을 내리리라."

어차피 플라우로스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의 지원을 받게 된 가이샨은, 이내 최정예 갈색 오크 전사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말을 증명부터 해야 믿어주실 것 아닙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러니 일단 증명부터 하지요. 가장 가까운 놈들의 둥지로 가겠습니다."

가이샨은 자신과 동행하게 된 플라우로스의 측근이자 최고의 전사중 하나인 기오로에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힘을 증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저곳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접근한 곳이 바로 영지의 수도와 가장 가까이 만들어진 마왕군의 거점 둥지.

일종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는 해당 둥지는 상위급을 포함한 수많은 마왕군 병사들이 휴면상태로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몇 번을 보아도 끔찍하고 두렵다.'

가이샨은 손에 뒨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몇 번이나 휘말려서 죽을뻔한 것이 사실. 그때마다 반격은커녕 도망치기 급급했고 반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서는 마수 개미를 베이스로 삼은 수많은 노동병들이 말 그대로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모든 유기물을 양분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엔 세상을 끝장내는 끔찍하고 무자비한 괴물들의 파괴행각으로 보이는 행동.

자신들의 땅을 거무튀튀한 황폐지만 남도록 무차별하게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한 오크들 역시 복수심에 이를 갈았다.

"어서 해라. 난 저놈들을 당장 쳐 죽여야겠다!"

"보십시오. 저 영혼 없는 공허의 괴물들은 이것에 견딜 수 없습니다."

기오로의 재촉에 가이샨이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직후 움직인 그의 마력이, 보라빛 섬광으로 터져나오며 발현했다.

반격의 시작. 전의를 다지던 오크들은 그 섬광을 그렇게 이해했다.

***

[F-56둥지에 적 등장]

[상황에 맞는 대응시스템 가동]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신호. 분명 중앙통제시스템 그 자체인 루시에겐 수많은 곳에서 단 1초도 쉬지 않고 동시에 몰아닥치는 신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F-56둥지, 연락 두절]

그러나 장담컨대 지금 이 상황은 루시가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다.

본래 루시가 멀리 떨어진 자신의 병사를 조종하는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통신망을 사용하는 것.

하위 프로그램인 지휘개체들이 주변 병력들에게 일종의 무선 통신망을 발현한다면 루시는 모든 개체에게 기본적으로 연결선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거점 둥지 하나의 연결이 통째로 끊겨버렸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병력들에 대한 연결선 자체가 끊긴 것이다.

[데이터 수집 불가능. 대응 불가능. 대응...]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루시의 판단 자체가 지체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루시라면 설령 처음 겪는 상황이라 해도 빠른 연산력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워가며 대응책을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연결이 끊기고 현장의 데이터를 얻을 수 없자 그 연산 자체가 멈춘 것이다.

"진정해. 모든 연결이 끊긴 건 아니라며."

그렇게 패닉에 빠진 루시를 구원한 것이 마침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였다. 그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루시를 위해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연결이 끊기지 않은 가장 빠른 병사를 보내서 현장 상황부터 살피자."

[즉시 시행]

그가 루시의 사고를 대신 해주었다. 루시는 과거처럼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면 된다.

묘하게 안정감을 느끼게 된 루시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그를 보좌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시야에 보이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비행종이 최대 속도로 현장을 향해 날았다. 오크군에 의해 공격 받고 있는 해당 둥지는, 일단은 격렬하게 전투 중이었다.

[제 연결이 끊기자 그곳에 있던 하위프로그램이 자율적으로 판단해 대응에 나선 것 같습니다]

전장의 중심에 있는 것은 몸에 박힌 강심을 빛내고 있는 오크ㆍ감마. 4개의 팔에서 4개의 검을 휘두르는 오크ㆍ감마는 광폭화를 발현하는 등 오크 대장군 기오로와 맞서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있었다.

급격히 상승한 마왕군의 근접전 능력은 이제 이정도로 발전했다,

"되겠느냐!"

하지만 오크 대장군의 힘은 아직 상위급 하나로는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마력이 휘몰아치는 창을 휘두르자, 결국 출력에서 밀린 오크ㆍ감마의 방어가 그대로 뚫리며 상반신 전체가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병사들과 연결된 통신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괴물들이..."

"역시! 이겼다!!"

모든 지휘개체와의 연결이 끊기자 판단을 담당하는 뇌가 없는 마왕군의 일반병사들은 마치 인형처럼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내제된 명령어를 작동시킬 트리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오크들은 자신들의 승전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함성을 지르며 환호하고 포효했다. 단순한 승리의 기쁨은 아니었다. 적들에게 확실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검증할 수 있어서, 그것이 기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반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와 루시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처음으로 맞이해보는 뼈아픈 타격이었으니까.

"이게 해답이었어. 강령술! 이거라면 놈들을 몰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은 흥분해서 큰 목소리로 떠들던 기오로가 해결해 주었다. 누군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기오로는 가이샨을 향해 웃어보였고, 루시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보라색 피부의 오크를 관측하여 데이터에 새겨 넣었다.

[해당 전투는 패배 처리하고. 강령술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보겠습니다. 제 연결이 끊긴 것이 아무래도 그 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루시의 연산력은 충격적인 패배 앞에서도 냉철하고 신속하게 후속 대책을 계산했다.

다만 결국 패배는 패배. 자신들의 움직임에 확신을 가지게 된 오크들은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루시에게는 완전한 해답을 찾기 전까지는 임기응변이 요구되었다.

[현장 지휘개체들의 영향력은 그대로 살아있으니 저들이 향하는 곳에 지휘개체들의 숫자를 급증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겠습니다. 차후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본 궤도에 오른 완전합성개조 기술을 사용해 지휘만 담당하는 개체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임시방편을 떠올리는 것도 이제 루시에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군세를 운용하며 쌓아 온 루시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단단해진다.

비록 처음 겪는 상황에 약간 흔들렸을지언정 루시는 빠르게 사고하고 움직이며 이미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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