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새로운 질서(5)
55화-새로운 질서(5)
"반격의 시작이다. 침략자들을 몰아내라!"
끝도 없이 추락하던 기세를 살리는 것에는 단 한 번의 승리면 충분했다.
침식 그 자체였던 마왕군의 공격에 밀려가던 오크들은 다시 한 번 단결하여 역습을 시작했다. 그 근거는 당연히 가이샨의 강령술이었다.
"제 동지들이 있습니다.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들 역시 이곳에 와서 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불러오도록!"
거기에 더해 가이샨은 자신과 같은 어둠 오크 강령술사들 다수를 불러들였다. 애초에 플라우로스는 선택지가 없었다. 희망을 봤으니 그것을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나는, 우리는!'
가이샨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그리고 전공을 세운 자신에게 펼쳐질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면 그 웃음은 더 커졌다.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의 효과는 확실했으니까.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일개 강령술사 하나가 이루기엔 불가능한 전공들이었다. 그러니 보상도 그만큼 크다.
"놈들은 영지 전역에 흩어져 수 백, 수 천 이상 되는 자신들의 둥지를 만들고 말 그대로 영지 전체를 초토화 시키고 있다. 우리도 병력을 나누어 한 번에 놈들을 몰아낸다."
어둠 오크 강령술사들이라는 비밀병기를 손에 넣은 갈색 오크군은 긁어모은 병력을 나누었다.
마왕군이 하나로 뭉치지 않고 사방에 퍼져 있기도 했고, 어차피 강령술사들의 강령술이 있다면 마왕군이 더 많다 해도 쉽게 이길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작전 실행 초기에는 오크군이 각지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를 승리하고 단숨에 넓은 영토를 회복해가며 이 계획이 확실히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부족하지 않은가? 더 많은 전공이 탐나지 않나? 가이샨 너는 네가 불러 온 다른 동료들에게 전공에서 밀릴 생각인가?"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대장군."
가이샨과 함께 움직이는 대장군 기오로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몸을 두드렸다. 마찬가지로 웃어 보인 가이샨은 직접 제조한 물약을 먹으며 지쳐가는 기력을 보충했다.
현재 그들은 다른 부대들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 하며 마왕군이 점령한 지역을 수복해 나가는 중. 벌써 6개의 둥지가 그들 손에 파괴되었다.
'더 큰 전공...!'
가이샨의 눈이 번득였다. 더 큰 전공을 원했다. 자신과 다를 것 없던 이가 성녀 이벨리아에게 [성장의 권능]을 부여 받고 단숨에 귀족 계급으로 치고 올라가 신시대의 새로운 질서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본 이후 그는 늘 신분상승에 매달렸다.
"저기 놈들의 둥지가 있습니다!"
"7번째 전공이 되겠구만."
그런 그들의 앞에 꽤 규모 있던 오크 마을을 부수고 그 위에 만들어진 마왕군의 둥지 하나가 나타났다.
다만 이제 그들은 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뻐했다. 지금까지 맛 봐왔던 짜릿한 승리를 다시 맛보기 위해 몸이 달아올랐다.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오크군은 이미 그 기세를 끝까지 끌어올린 상태였다.
[목표물 접근중]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교묘하게 짜여진 일종의 과정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상대는, 그들의 기세 따위가 어떻든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대장군 급 1명, 전사장 급 5명, 오크 전사 450명, 그리고 강령술사 1명]
루시는 전부터 주시하고 있던 그들이 근접하는 순간부터 지금 이 상황을 만들고 대비했다.
현재 승전에 취한 가이샨과 기오로는 다른 부대들보다도 조금 더 깊숙하게 마왕군의 영토에 들어와 있는 상황.
이것 역시 루시의 설계였다. 그 넓은 전장 전체를 조율하며 전투의 속도와 밀도를 조절해 그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다른 부대들보다 한발 빠르게 이곳에 오게 만들기 위한 설계.
덕분에 그들은 다른 오크 부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곳에, 시기에 이곳에 도달했다. 남은 것은 그들과 전투를 벌여 전멸시키는 것.
"절멸 작전 실행."
오크들이 몰려오는 둥지 안. 루시는 서로 엮이고 뭉쳐 마치 의자처럼 생성된 육벽에 다리를 꼰 채 삐딱하게 앉아있던 자신의 육신을 직접 움직였다.
오크들은 이곳이 다른 둥지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루시는 이미 그들을 저격할 마왕군 최강의 전력을 이곳에 집중시켰다.
"가라. 끔찍한 괴물들을 몰아내라!"
그리고 채 몇 분이 되지 않아, 오크들은 함성을 지르며 다짜고짜 둥지 내부로 쳐들어왔다.
그들 입장에선 굳이 심각하게 경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 마왕군은 영지 전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고, 무엇보다 그들에겐 강령술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연결을 끊으면 아군 병력 대부분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루시는 둥지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눈이 커진 오크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을 때려잡고 짓밟으며 느끼는 희열과 쾌락. 이건 사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감정이다.
"인...간?"
"검은 머리칼! 고블린 놈들이 떠들던!"
루시를 본 오크들은 순간 당황했다. 대장군 나르와 동귀어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유리아는 물론 도망친 고블린을 통해 이미 루시의 존재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소문만 무성하던 그 실체를 직접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마법이다!"
그 순간, 의자에서 일어난 루시는 손을 뻗어 체내에 잠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루시의 등에 연결된 6개의 촉수는 둥지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 박혀있는 수박만한 크기의 강심은 루시 같은 소형 유닛은 몸에 담을 수 없는 출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육신을 일종의 통로로 사용해 보조하는 형식으로 사용하면 그 출력을 이용할 수 있다.
"우아아악!"
"버텨라!"
루시의 마법진에서 뿜어진 엄청난 숫자와 출력의 전격 마법은 수 백 줄기로 갈라지며 말 그대로 일대를 뒤엎었다.
그나마 대장군 기오로가 전력을 다한 참격으로 일부분 상쇄하지 않았다면, 그 일격에 대부분의 병력이 전멸했을 위력이었다.
"대, 대장군."
"진정해라. 저 암컷도 이 정도 위력의 마법을 계속 쏠 수는 없다."
이를 간 기오로가 창으로 루시를 가리켰다. 그 말대로 방금 전의 일격으로 루시는 팔 하나가 마법의 출력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타버려 바스라진 상태였다.
"...쳐라!"
비록 조금의 변화도 없는 그 표정에 순간 식은땀을 흘렸지만 기오로는 아군에 명령을 내렸다.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여전했다.
"아군 대응."
루시 역시 자신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즉시 대기하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타났구나...! 그 몸을 내어 놓아라 영혼 없는 인형들아!"
몰려오는 수백의 마왕군을 보며 자신이 나설 때임을 직감한 가이샨이 지팡이를 쳐들고 강령술을 발동했다.
그 원리는 빈껍데기인 마왕군의 육신에 떠도는 잡귀를 강령시켜 루시와의 연결에 혼선을 주고 무력화 시키는 것. 뇌를 가지고 자의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위급 병종이 아닌 이상 그 방식에 분명 무력하다.
"어...?"
분명 그랬을 터였다. 그러나 가이샨은, 자신의 주술이 성공했는데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마왕군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설마 이놈들 전부!"
기겁한 기오로가 다그쳤으나 가이샨은 그때서야 경악하며 빽 소리를 질렀다.
강령술이 먹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불러 온 악령들이 마왕군의 몸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뜻은 저항력을 갖추었다는 뜻.
"효율이 300% 이상 향상된 내장형 강심을 장착한, 타입 델타."
루시는 강령술을 무시한 자신의 병사들이 오크들과 충돌해 단숨에 휩쓸어 버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식한 팔을 움직여 보았다.
루시가 동원한 전 병력은 모두가 강심을 장착한 상위급 병력. 나름 마왕군에 대한 지식을 쌓은 오크들은 몸 외부에 강심이 보이지 않는 그들을 베타급으로 착각했지만 그들은 루시가 새롭게 만든 타입의 병력이었다.
창현이 던전을 공략하고 그곳에서 얻은 코어의 파편을 분석해 마침내 만들 게 된 새로운 종류의 강심은, 기존의 강심보다 발달한 효율로 이제 병사들의 심장 대신 작동하며 그 출력을 더욱 향상시켰다.
"예상 승률 88%. 하지만 강령술사는 반드시 생포."
루시는 본인도 검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미 본인의 육신도 최상급의 전력이 될 수 있게 만들어 둔 상태.
"이, 이럴 수는..."
광폭화든 뭐든 사용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마왕군의 공격에 미처 힘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이미 피투성이였던 오크 대장군 기오로는, 전신에 검붉은 마력의 불길을 두르고 달려 온 루시의 검은 차마 막지 못하고 가슴을 관통당하며 탄식했다.
하지만 현재 루시의 목적은 대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이 아니라 일개 강령술사. 다른 병사의 시야와 연동한 루시의 시야에, 혼란을 틈타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는 검은 로브가 보였다.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뒤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가까운 비명과 고함소리 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아군의 것이었지 적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순간 극도의 공포를 느낀 가이샨은, 기오로가 죽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갈색 오크왕의 말이 맞았어. 저 괴물들은 반드시 박멸해야 한다!'
이미 패닉 상태였던 그는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주변에 아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포함해 지금 자신들이 승승장구 하는 것이 모두 함정이란 생각이 드니 소름이 돋아 몸이 떨릴 정도였다.
"끄아악!"
그런데 그 순간. 하늘에서 뿜어진 여러 개의 화염창이 지면에 내리 꽂으며 폭발을 일으키고, 가이샨은 그 폭발에 휘말려 나동그라졌다.
"크으...커허억!"
"도망칠 수 없습니다. 강령술사 가이샨."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등을 지긋이 짓밟은 존재는 청명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쓰러진 그는 시야에 보이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괴물의 발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발이었다.
"대체 넌 뭐냐. 원하는 게 뭐냔 말이다!"
"강령술에 대한 모든 데이터."
"...뭐?"
꽥꽥거리던 가이샨은 뜻밖의 대답에 얼어버렸다. 동시에 등을 짓밟은 존재가 허리를 숙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땅에 짓눌린 그의 시야에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까지 보이게 되었다.
"가설을 세워보니 시공을 뛰어넘어, 내 일부를 다른 세상에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당신의 힘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허리를 숙인 루시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가이샨은 그 속삭임에서, 무미건조한 지금까지의 말투와는 다른 묘한 감정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