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새로운 질서(6)
56화-새로운 질서(6)
"강령술...그걸 배우겠다고?"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만 대비할 수 있으니까]
루시는 보라색 피부를 가지고 있던 오크, 강령술사 가이샨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먹였던 강령술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겠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필요한 일이긴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지켜만 봤다.
애초에 처음 일격을 맞은 순간부터 찰나의 패닉을 진정시켜준 것 빼면 내가 해준 건 별로 없었다.
계속해서 성장해온 루시가 하나하나 자기 손으로 대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덕에 강령술이라는 전리품을 얻었고 그것을 분석해 다시 한 번 강해진다.
"화면은 굳이 돌리지 말아주고."
나는 혹시 몰라서 미리 말해두었다. 루시에게 상대방의 뇌에 들어있는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은 없다. 즉 강령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정말로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 문제는 루시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루시의 적들 뿐이었다.
패배한 상대가 순순히 알려줄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루시의 '학습'에는 꾸준히 잔혹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토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루시의 고문이 실패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학습은 순조롭습니다. 가이샨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그래."
그런 와중에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괜히 둥지 어딘가에 있을 오크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버티지도 못하고 그저 루시의 뜻대로 모든 걸 쥐어 짜인 뒤, 소화장에 던져저 산 채로 소화되는 미래 뿐이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루시는 모든 것을 학습한 상태로 나를 불렀다.
[그 원리를 반복해서 학습한 결과 어째서 강령술이 아군에 큰 타격을 입혔는지 알아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아군 병사들의 연결이, 강령시킨 영혼의 힘보다 미약한 탓이었습니다]
"난 설명해 줘도 잘 몰라. 배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처 방법이 있는거지?"
[병사들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것은 고대의 주술인 마왕소환식 같은 것 처럼 현재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상대의 힘을 꿰뚫게 된 루시는 여러가지 대응책을 동시에 떠올렸다.
강령술에 의해 루시의 연결이 방해 받는 것은, 강령술을 이용해 불러낸 악령이 병사의 몸을 차지하려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 때문.
그러니 그걸 막으면 우리는 더 이상 강령술에 의한 피해를 받지 않는다. 상대는 나름 적절한 무기를 찾아 온 셈이지만 루시는 성장과 분석이라는 특유의 강점을 통해 또다시 위기를 극복했다.
[하위프로그램들의 지배력을 더 강화하고, 지휘를 보조할 수 있는 새로운 타입의 병사를 만들어 각 부대에 배치하면 됩니다]
"그게 제일 효율적이라서?"
[그렇습니다]
문제 자체는 꽤 쉽게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거창한 것 필요 없이 루시는 기본적인 부분을 손보고 새로운 병종을 합류시키는 것으로 강체술에 대한 대비를 끝냈다.
"나도 다시 던전에 가볼 생각이야."
그리고 이제 반격을 시작해 갈색 오크들을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루시의 보고를 듣던 나 역시, 내 계획을 말해주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각성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사람들은 이제 괴물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도 강해져. 마치 스테이지를 넘어가면 적들이 강해지는 게임처럼."
[하지만 자칫하단 신변에 위험이 생깁니다. 제 마법 보조는 한계가 명확하여...]
"그만큼 이지연씨도 성장했으니 괜찮겠지."
이제 혼자서도 위기를 잘 넘기게 된 루시는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성장한 루시는 물론 함께 싸울 이지연의 성장 역시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몇 번 싸워보며 느낀 게 있어. 더 도움이 되고 싶단 거야. 욕심이 생긴 것이라 봐도 되겠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지만, 네게 도와달라 말해도...되겠지?"
이지연과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녀처럼 타인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싸움을 경험할 때마다, 뉴스에 나오는 참상을 볼 때마다 투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입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
루시는 당연하다는 듯 나를 돕겠다고 말했다. 나도 이제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루시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지켜 본 사람으로서 루시가 주고자 하는 도움, 굳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서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무기라고?"
루시가 어딘가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이 그때였다. 루시가 내게 줄 수 있는 새로운 힘.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강령술의 원리 중 하나를 응용하면 이제, 제 일부를 그곳에 보내도 연결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네가 직접 이곳에 오겠단 거야?"
[계산 결과 아직은 일정 크기, 일정 숫자 이상의 육신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크게 놀랐지만 루시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루시는 내게 살아있는 생물, 즉 자신과 연결 된 병사를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루시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자동으로 보호막을 형성하는 강심 정도가 전부.
하지만 이번에 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온전한 병사를 보내긴 힘들단 건가. 그럼 어떤 식으로 하려고."
[간단합니다. 조건과 환경에 맞는 새로운 병사를 만들어내면 됩니다. 최적의 효율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병사를]
루시에겐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 정해진 조건 내에서 최대한 비틀고 변형시키는 건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으니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노, 타입 오메가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해. 루시."
[전송 시작]
망설임 없이 승인한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루시가 처음 마법을 써서 날 도와준 이후로 거둔 또 하나의 성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장한다는 증거였다.
"이건가...!"
곧 내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노ㆍ오메가는 기존 마왕군의 세포를 구성하는 세포단위 마족 나노를 개조한 착용형 병사입니다]
"으."
기묘한 기분에 자칫하면 휴대폰을 던져버릴 뻔 했다.
휴대폰 액정에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액체 같은 무언가. 그것은 내 팔을 휘감고 타올랐다. 솔직히 이것의 정체가 루시가 아니었다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닐 정도로 징그러운 생김새다.
"착용형이라고? 효과가 뭐지?"
[만능세포의 특성을 활용해 아군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 무엇이든 의태 가능한 존재입니다. 평소에는 의복이나 피부로 위장해 김창현님의 몸에 깃들어 있다가도, 강심등으로 동력을 공급하면 급격히 증식 및 변형하여 활동할 수 있습니다]
루시는 나노ㆍ오메가의 능력을 설명해 주었다. 비효율을 감수하고 그 능력을 극대화시킨 궁극 세포체. 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나노머신을 떠올렸다.
"네 설명대로라면 내게 꼭 필요한 능력이긴 한데."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완벽한 기술을 손에 넣게 되어 아군 자체를 그곳에 전송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멀쩡한 상태로 돌아 온 내 손을 내려다 보았다. 겉보기엔 전과 다를 것 없이 멀쩡한 상태.
하지만 지금 내 옷과 피부에 분명 루시의 일부가 존재한다. 이것을 이용한다면.
[이렇게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합니다]
루시의 행동과 함께 내 몸을 덮은 그것들이 즉시 변형을 일으켰다. 삽시간에 증식하며 딱딱하게 굳어가는 그것들은 내 전신을 덮고 짙은 검은색 갑주가 되었다.
마치 루시의 몸과 같은 형태다.
***
[제 보조가 있다면 단순한 육체 데이터는 물론 지금까지 수집한 기술적 데이터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노ㆍ오메가에 덮인 자신의 몸을 살피는 때. 루시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록 불안정하지만 마침내 그분께 닿아 하나가 된 것입니다]
동시에 루시는 그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희열에 찬 그 목소리는 끝이 잘게 떨릴 정도, 사실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진 순간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배우고 여기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 마계 영주들을 위협할 지경까지 성장했는데도 막상 그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은 무생물을 전해주거나 마법을 쏘아보내는 게 전부.
그와 직접 교감하고 싶다는 욕망은 급격하게 커졌지만 그것을 만족시킬 수단은 없어 답답하던 차에 이런 기회가 생긴 것이다.
[부족해. 부족합니다]
하지만 루시는 이제 이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일부나 마찬가지라지만 루시에겐 이빨이나 발톱에 불과한 말단 병사는 그 연결이 그리 강하지 않다.
적어도 서로 교감하고 맞닿으려면 머리나 가슴의 역할을 할 존재를 곁으로 보내야 했다.
"마왕님. 마신께서는..."
[휴식은 다 취했습니까 유리아? 그럼 이제 다시 움직일 때입니다]
이미 불 붙은지 오래인 루시의 욕망은 꺼질 줄 모르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루시는 완전히 회복한 유리아를 포함 모든 전력에게 갈색 오크들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비장의 한 수마저 채 며칠만에 간파당하고 무력화당한 오크들은 모든 것을 초토화 시키는 대가로 쉬지 않고 성장하는 마왕군을 감당할 수 없다.
"왕이시여. 이제 선택을 내리셔야 합니다! 안드라스 처럼 저 괴물놈들에게 유린당할 순 없습니다!"
"재앙..! 놈들은 이 마계를 멸할 재앙이 분명하다!"
갈색 오크왕 플라우로스는 격노하며 부들거렸지만 이미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이상 더 이상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후퇴한다. 우선은 옆 영지인 그레모리의 영역으로 가겠다. 만약 놈이 우릴 거부한다면 곧 그놈들과의 전쟁이 되리라!"
마왕군에게 자비와 타협 따위는 없다. 절멸이나 생존이냐의 이지선다에서 절멸을 고를 생물종은 없으니, 플라우로스와 살아남은 갈색 오크들은 살기 위해 급한대로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옆 영지로 대규모 이주를 시도했다.
"이게 무슨...플라우로스!"
당연히 그 땅의 주인, 마계 영주 그레모리는 기겁을 하며 그들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악착 같이 도주한 이들의 광기는, 인간계에서 벌어진 전쟁에 손올리느라 전력이 약화된 상태로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닥치고 내 말 들어라 그레모리. 그 심연의 괴물들이 안드라스의 영지로, 내 영지로 만족할 것 같으냐. 놈들은 이 마계 전부를 파먹을 것이다! 그러니 협조해라. 우리는 이제부터 좋든 싫든 함께 그 괴물놈들과 싸워야 하니."
대폭 줄어든 동족들을 겨우 이끌고 쳐들어 온 플라우로스는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자신과 같은 마계영주인 서큐버스 여왕 그레모리를 윽박질렀다.
────────────────────────────────────
────────────────────────────────────